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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우도에는 우도의 시간이 흐른다

 

 

우도에는 우도의 시간이 흐른다

 

섬 속의 섬 우도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차를 빌려 해안을 달릴 수도 있겠고, 자전거로 밭담을 흘깃 훔쳐보며 페달을 밟을 수도 있겠고, 바다를 애인삼아 옆구리에 끼고 느릿느릿 걸을 수도 있겠다. 걷는 것이 여행의 기본임에는 틀림없으나 이곳에 오면 어느 하나를 두고 여행의 정석이라고 단정 짓기가 힘이 든다.

 

서빈백사

 

바람이 할퀴고 간 서빈백사의 모래 한 줌을 움켜쥐었다. 가볍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했으나 날지 못했다. 구멍이 숭숭 뚫려서 그런가 보다. 부러 날지 않으려 제 몸에 구멍을 내었겠지.

 

 

나른하고 지루한 오후에 말도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옛날 이곳은 말 방목지, 그때만 해도 초원을 뛰어다녔을 말은 오늘은 고삐에 단단히 묶여 있다. 어쩌다 지나는 손님을 태우고 돌담 안을 한 바퀴 휑하니 돌고 나면 다시 지루하고 나른한 날들이 이어진다.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온다.

 

 

우도의 만남은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다. 해안을 따라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간혹 섬의 가운데로 들어가는 길이 있긴 하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만남보다는 머무르기 위한 길이다.

 

 

 해변의 등대는 연인들의 차지다. 우도의 화가 안정희 씨가 그랬듯이 이곳에선 오늘도 그와 그녀가 사랑을 속삭인다. 바다에는 하트 모양의 돌담이 쌓여 있다.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독살 같은 일종의 돌무지가 지금은 서로의 사랑을 잡기 위한 공간으로 바뀐 듯하다.

 

 

해녀들의 공간이었던 불턱에선 이제 관광객을 위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등대 옆 불턱에는 더 이상 해녀들이 찾지 않는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물질에서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우던 불턱은 껍데기만 남았다. 제주 해안마을 갯가에는 이런 불턱이 많은데 1980년대 중반부터 온수시설을 갖춘 탈의장이 들어서자 그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금은 우도를 찾는 이들을 위해 물건들을 팔고 있다.

 

전흘동 망대

 

우도에는 망대가 두 곳 있다. 둘 다 북쪽 바닷가에 있는데 전흘동 북쪽 바닷가에 있는 '답나니탑' 이라고 불리는 망대와 비양도에 있는 망대가 그것이다. 제주도 본섬에 있는 연대들과 그 형태는 비슷하나 용도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비양도 망대

 

이 망대들은 제주도 4.3 때 우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 두 망대는 남해안 쪽을 살피고 있다. 왜 일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4.3 때 만들어졌고, 그것도 우도 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망대가 바라보는 쪽은 모두 북쪽이다. 육지에서 오는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려 그들이 바라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수동해수욕장

 

우도의 바다는 평화로웠다. 섬은 섬의 시간대로 흘러가는데, 이곳은 두 개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우도의 시간은 뭍에서 흘러온 시간에 묻혀 좀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해안을 따라 펼쳐진 평상이 인상적이다. 노부부는 평상에 기댄 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에 몸을 담글 법도 하지만 그저 바다만 바라본다.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렀나 보다.

 

 

커피, 브런치, 주스, 버거... 이 모든 것들이 섬에서는 테이크아웃. 편리해졌다. 아까부터 혼자 걷고 있던 올레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습을 보인다. 모든 편리를 벗어던지고 그녀는 걷는 것을 택했다. 어쩌면 편리와 영혼은 공존할 수 없음을 진즉에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섬의 끝에서 섬 하나가 나타났다. 섬 속의 섬, 그 섬 속의 섬. 도대체 섬의 끝은 어디일까. 비양도. 제주 서쪽에 있는 섬과 이름도 같다. 검은 암석들이 바다까지 내달려 물빛을 검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암초가 많다는 걸 넌지시 말하는 노란 등대는 섬이 되었다 뭍이 되었다 외로이 반복하고 있다.

 

비양도

 

비양도 언덕에 오르면 우도는 또 다른 모습이다. 우도 팔경 중의 하나인 절벽을 이룬 후해석벽과 시커먼 화산암 해변이 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늘은 금방 비라도 퍼부을 듯... 섬의 남쪽 끝에 불쑥 솟은 소머리오름이 희뿌옇다.

 

비양도

 

북적거리는 우도에서도 이곳은 한갓지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꼽아 놓은 게 이채롭다. 우도봉으로 향하는데 마을 앞 공터가 분주하다. 어릴 적 보았던 볏짚가리 같은 것이 보였다. 어릴 적 추수철이 되면 집 마당이나 너른 공터에 탈곡 전의 보릿단, 볏단 등을 둥글게 쌓아두곤 했었다.

 

 말린 감태를 쌓아두는 작업에 한창인 주민들

 

건데 자세히 보니 탈곡 전의 곡식이나 탈곡 후의 짚단을 쌓아둔 것이 아니었다. 아래에는 말린 미역 비슷한 것을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비를 막으려 억새로 지붕을 잇고 있었다.

 

“감태라요. 감태. 말린 감태를 이렇게 쌓아서 보관했다가 나중에 공장에 파는 거지요.”

 

그중 젊어 보이는 한 사람이 더미 위에 올라 감태를 발로 꼭꼭 밟아 탑처럼 쌓아 올렸다. 나머지 두서너 명은 감태를 올려 비닐을 두르고 억새로 덮어 마무리를 했다. 손발이 척척 맞으니 순식간에 감태더미가 완성이 되었다.

 

감태

 

감태는 우도의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육지에서 온 사람들은 대개 미역으로 착각하곤 한다. 종종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도로가와 돌 위에 널려서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화장품과 요오드 등 화공약품 20가지의 재료로 쓰이는 감태는 우도의 주 수입원이 되고 있다고 했다. 태풍이나 파도에 의해 떠내려 온 것을 줍거나 바다에서 채취한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경운기를 몰고 나타났다. 작업을 끝낸 할머니들이 서둘러 경운기에 올랐다. 이 잠시의 풍경이 왠지 낯설었다. 여태까지 머릿속에 그려진 우도의 풍경은 뭍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감태더미를 쌓는 것이야말로 우도 그 자체의 풍경임을 이제야 알겠다. 버스가 왔다. 섬의 시간과 뭍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