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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타임슬립

여름향기 촬영지 명봉역에서 봄을 만나다




기차는 떠나고 화려한 봄꽃의 명봉역

섬과 암자를 찾아 무던히도 헤매던 때, 간이역을 종종 찾곤 했었다. 간이역은 언제나 바다 가운데의 섬, 산중의 암자 같은 존재였다. 배를 타고 몇 시간을 파도와 씨름하고 나서야 섬에 다가설 수 있었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 하늘에 이르러서야 암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여행자에게 간이역은 기차로 편히 만날 수 있는, 쉬이 허락하지 않는 섬과 암자를 대신할 수 있는 그리운 그 무엇이 되었다.


3일 동안의 남도여행은 명봉역에서 끝이 났다. 애초 장흥 일대를 쏘다닐 요량이었으나 차에 문제가 생겼다. 망설임 없이 완도의 어느 부두에 차를 버렸다. 튼튼한 두 다리로 섬을 걷기로 했다. 청산도로 가는 배에 무작정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장흥에서 1박을 했다. 숙소를 정하지 못해 몇 번 허탕을 치다 골목길 안쪽의 허름한 모텔을 잡았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맥주 몇 병을 사서 몇 잔 기울이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그다지 긴 여정이 아니었음에도 여행자는 지쳐 있었다. 집으로 바로 갈까 고민하다 김밥 한 줄로 아침을 대신했다. 배가 고프면 길 위에 서기가 어렵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차는 이미 집으로 가는 길을 벗어나 어느 한적한 시골을 달리고 있었다. 연초록의 잎이 나뭇가지에서 돋아나고 벚꽃은 서서히 지고 있었다. 그래도 달렸다. 처음의 계획이었다면 3일 전에 명봉역에 들렀어야 했다.


늘 가슴에 품고만 있었던 짝사랑, 어느 날 문득 떠나버린 그, 바람결에 들려온 어딘가에 산다는 소식, 멀찌감치 서서라도 살짝 보고 오고 싶은, 간이역은 일종의 그런 그리움이었다.


벚꽃은 졌을까. 간이역은 어떤 모습일까. 가는 내내 궁금하다. 길 앞에 철로가 나타났다. 크게 곡선을 그으며 철길은 시야에서 벗어났다. 저 어디쯤 간이역이 있겠지. 오랜 경험과 직감은 그런대로 정확했다. 명봉역이 눈앞에 나타났다.


역 앞의 오래된 집들이 눈길을 끈다. 고개를 돌리니 자줏빛 꽃잔디와 하얀 벚꽃이 인상적이다. 10여 그루쯤 되어 보이는 오랜 벚나무는 간이역과 퍽이나 어울린다. 길게 늘어진 하얀 벚꽃 가지 사이로 ‘명봉역’ 세 글자가 들어왔다.


역 앞 마당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자리를 깔고 정성스럽게 사온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가족이었다. 할아버지부터 손자들까지 너무나 행복한 표정들이다. 이런 한갓진 곳을 찾은 것을 보니 봄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가족이었다.


간이역 앞마당을 거쳐 역사로 들어갔다. 따스한 바깥과는 달리 역사 안은 쌀랑했다. 기차 손님이 없어 그런 지도 모르겠다. <여름향기>를 촬영한 역이라며 송승헌과 손예진의 사인과 촬영장면들이 벽면에 붙어 있었다.


대합실의 긴 의자는 비어 있었다. 간혹 오가는 이들이 한 번씩 보았을 책들이 꽂혀 있다. 철도직원들과 주민들이 기증한 도서를 모아 놓은 녹색문고였다. 대여부에 기록만 하면 열차 안에서 읽을 수 있고 다시 명봉역을 찾을 때 돌려주라고 적혀 있다. 빈 간이역을 가득 채우는 훈훈한 정이다.


철길로 나섰다. 깊은 적막이 흐른다. 기차는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가만히 걸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우두커니 앉았다, 서서 걷기를 반복했다.


서울 가는 상행선 기차 앞에 차창을 두드릴 듯

...

 

나의 아버지 저녁노을 목에 감고

벚나무들 슬픔처럼 흰 꽃 터뜨리겠지

 

지상의 기차는 지금 막 떠나려하겠지

아버지와 나 마지막으로 헤어진 그 간이역엔

 

눈앞에 빙판길 미리 알고

봉황새 울어주던 그날

 

거기 그대로 내 어린 날 눈 시리게 서있겠지

아버지와 나 마지막으로 헤어진 새가 우는 역

...

문정희의 <명봉역> 중에서


명봉역은 ‘새가 우는 역’이다. 딸을 배웅 나온 아버지. 더 이상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 시인은 간이역에서 아버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실제로 명봉역은 울
, 봉황새 자를 쓴다.


가방을 둘러맨 한 사내가 철길을 건너왔다.

“저, 기차가 몇 시쯤 올까요?”

“글쎄요. 한 네 시쯤....”

 

사내와의 이야기는 그뿐이었다. 기차가 오려면 네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봄날은 가고 있었다.










명봉역은 전라남도 보성군 노동면에 위치한 경전선의 철도역이다. 1930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전형적인 농촌에 있는 명봉역은 보성읍내 5일장을 이용하는 주민들이나 읍내 중고등학교에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했다. 2008년 6월부터 역무원이 근무하지 않는 무인역이 되었다. 역사는 1950년에 준공하여 수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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