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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신비의 섬

동남동녀의 슬픈 전설, 울릉도의 대표 성황당. 성하신당



  

동남동녀의 슬픈 전설, 울릉도를 대표하는 성황당. 성하신당

옛 울릉도의 중심이었던 태하마을에는 산악지대인 울릉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너른 땅이 있다. 개척 당시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구석이 있었다 하여 ‘큰황토구미’라고 불린 이 마을은 한자식으로 표기하면서 ‘대하臺霞’였다가 다시 ‘태하台霞’라 하게 되었다.

 

태하마을 버스정류장 옆의 잘 자란 솔숲에는 신당이 하나 있다. 울릉도의 대표적인 성황당인 성하신당이다. 울릉도에는 마을마다 해신당과 산신당 등 신당이 있었는데 성하신당이 울릉도 전체의 성황신당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울릉도에서 배를 만들면 선주들은 가장 먼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현포까지 도보여행을 하다 비가 와서 태하까지는 버스를 타고 성하신당을 찾았다. 신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맑은 물로 몸을 적시고 있는데 외지에서 온 듯한 부부가 신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들 부부가 나가기를 기다리다 신당을 촬영했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신당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여행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 다 찍었나요?”

“아, 예.”

“대학생인가 보네.”

“아닙니다. 하하.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은 별로 없어.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 빼고는. 무슨 자료조사 나왔는가 싶어서.”


태하마을에 살고 있는 신당지기 도봉춘(70)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자가 촬영을 끝내자 신당 문을 닫았다.


“할아버지. 지금 문을 닫나 봅니다.”

“그래요. 아침에 사람들이 찾기 전에 문을 열었다가 저녁 6시쯤 문을 닫지요. 비가 오면 시간에 관계없이 닫고.”


여섯 시가 되려면 아직 약간의 여유가 있었으나 비가 내려 일찍 문을 닫는다고 하였다.

 

태하에서 한 평생을 살아오신 도봉춘 할아버지에게 성하신당은 각별한 곳이었다. 지금도 하루도 빠짐없이 신당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 의해 도동항이 들어서기 전 태하는 울릉도의 옛 군청 소재지였다. 할아버지는 태하를 울릉도의 서울이라며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마 성황당이 선 지는 100년하고도 조금 더 오래되었지요. 원래는 지금의 위치보다 100미터 정도 더 위에 있었어. 홍수로 계곡물이 넘치면서 새로 지었지요. 무오생 어른들의 말로는 당시 아이였던 자신들을 업고 마을 사람들이 주위에 소나무를 심어 신당을 새로 지었지요. 아마 일제 때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약 20년 전에 지금의 건물로 단장을 했지요.”

 

할아버지는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와 안내문은 조금 다르다고 덧붙여 말했다. 실제로 2007년에 편찬된 <울릉군지>에는 성하신당의 최초 건립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19세기 말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 신당의 위치도 할아버지가 말한 현 위치보다 100미터 위가 아니라 오히려 10미터 남쪽으로 보고 있다. 신당이 유실된 대홍수도 1934년이고 다음해인 1935년에 중건하였으며 1984년 증․개축하였다고 적고 있다.


“한 10년 전부터 3월 초하루에 군수, 조합장 등이 모여 제를 올리고 있지요. 신당에 모신 동남동녀의 이야기는 마을에 전해오는 것과 안내기록이 조금 다르지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조선 태종 때 안무사였던 김인우가 울릉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지요. 섬 전체를 순찰하여 주민들을 모아 놓고 배를 띄우기 하루 전날 밤 꿈을 꾸었는데, 해신이 나타나 남녀 한 쌍을 두고 가라고 하였답니다.

다음날 배를 매어둔 도끼여에 가자 풍랑이 일어 출항할 수가 없었지요. 전날 꿈이 생각나서 동남동녀 두 명에게 자신이 잔 자리에 필묵을 두고 왔으니 가져오라고 했어. 동남동녀가 배에서 멀어지자 풍랑이 멎어 배를 띄울 수가 있었지. 동남동녀는 필묵을 아무리 찾아도 없자 배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미 배는 사라진 뒤였지. 안무사를 원망하며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린 둘은 결국 죽고 말았지요.

수년 후 명을 받고 다시 이곳을 찾은 안무사는 동남동녀에 대한 죄의식에 주변을 수색했어. 그랬더니 자신이 유숙했던 그 자리에 동남동녀가 부둥켜 앉은 채 있었지. 다가가서 만지니 사르르 무너져 버렸답니다. 안무사는 그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지요. 그것이 신당의 시초랍니다. 지금도 배가 진수를 할 때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지요. 올 때 배타고 오셨지요. 썬플라워호도 이곳에서 제를 지냈답니다.”

마치 서정주 시인의 ‘신부’에 나오는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는 시구 같았다.

 

신당 안에는 제단이 차려져 있고 동남동녀의 조형물이 있었다. 신위는 ‘성하지남신위聖霞之男神位’와 ‘성하지여신위聖霞之女神位’였다. 신당 벽에는 남녀 한복 한 벌이 걸려 있었다. 그 용도를 물어 보았다.


“아, 그거는 무당들이 두고 간 거랍니다. 동남동녀가 이제 어른이 되었다 여겨 어른 옷을 둔 것이지요. 매년 3월 초하루에 태운답니다.”


“신당이 영험하다 하여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심지어 서울, 수원 등지에서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지요.”

 

희생된 이들에 의해 바다가 수호된다는 이 희생제의적인 설화는 바다와 관련된 지역에서 종종 있는 이야기들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뱃길은 안전했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프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갑자기 비가 후드득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우산을 사야겠다고 말씀드리니 동네가게로 가자고 하였다. 마을 안쪽에 태천상회라는 조그마한 가게가 있었다. 우산 두 개를 달라고 하니 할아버지는 집에 가면 우산이 많다고 사양했다. 그럼 집에까지 모셔드리겠다고 했다. 한사코 거부하시던 할아버지는 큰길로 나오자 혼자 갈 수 있다고 버스시간이 다 되었으니 빨리 가라고 재촉하였다.


“내일 혹시 오게 되면 연락해요. 요 앞에 각석문이 있는데 같이 가봅시다.”


빗속을 총총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날 태하리 광서명 각석문을 찾았다. 이 각석문은 고종 때의 기록으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심순택을 비롯하여 이규원, 조종성, 서경수 등 울릉도에 공적이 많은 분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영의정 심순택은 흉년이 든 울릉도에 양곡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여 조정이 삼척, 울진, 평해의 환곡 중에서 300석을 지원하게 하였다. 이 각석문을 통해 조선 후기 울릉도의 실상과 울릉도 정책 등을 알 수 있다.

 

성하신당과 각석문은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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