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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기행

일제가 만들고 북한군 사령부가 주둔했던 해망굴

 

일제가 만들고 북한군 사령부가 주둔했던 해망굴
-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해망굴과 월명공원

오후 세 시. 더 이상 더위를 견딘다는 건 무리였다. 아스팔트 열기가 온몸을 태웠다. 나의 몸은 이미 무방비상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빵집이라는 이성당 앞에서 홀로 기웃거리다 지도를 꺼냈다. 숲. 숲을 찾아야 한다.

 

지도를 보고 일정을 수정하였다.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은 지도마저 적셔 버렸다. 땀을 연신 훔쳐내며 숲이 있을 만한 곳을 지도에서 찾았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해망굴과 월명공원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뛸 힘도 없어 타박타박 걷기로 하였다.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의 그늘을 잠시 빌려 길을 걷는다. 멀리 산동네가 보인다. 따닥따닥 붙은 집들은 머리에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있다.

 

해망동이다.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제법 너른 주차장이 있었다. 군산 시민들이 자주 오른다는 월명산의 월명공원이 있어서다. 마을을 한 바퀴 돌기로 하였다.

 

각국 공원으로 시작된 월명공원과 바닷가 선창 사이의 비탈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해방 후 피난민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층층 쌓인 마을의 집들과 미로 같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집들은 하늘과 맞닿아 이어진다.

 

예전 이곳은 수산업과 합판산업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활기를 띄었다고 한다. 지금은 쇠락하여 시간을 거슬러 옛 기억을 더듬을 뿐이다. 한때 이곳은 공공미술 사업으로 벽화가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관리 소홀로 마을은 더 을씨년스럽게 변해 버렸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속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걸 이곳에서 알 수 있다.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말라. 그들에게 있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저 한낱 바람 같은 존재일 뿐이다.

 

해망굴로 접어들었다. 해망굴 안에 들어서니 냉기가 돈다. 굴 이쪽저쪽을 사람들이 바삐 오간다. 마실가는 동네 할머니, 자전거로 물건을 나르는 중년의 사내, 하교하는 학생들. 굴 안에는 군산의 일상들이 모여 있었다.

 

해망굴은 일제강점기 군산항의 제3차 축항 공사기간이었던 1926년 10월에 개통되었다. 길이 131m에 높이가 4.5m인 해망굴은 옛 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한 반원형의 터널이다.(국가등록문화재 제184호)

 

당시 해망굴 인근에는 군산신사와 광장, 공회당, 도립군산의료원, 은행 사택, 현재의 홍천사인 안국사 등이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군산에 주둔하였던 북한군 지휘본부가 터널 안에 자리하여 연합군 공군기의 공격을 받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터널 밖을 빠져 나와서 월명공원에 올랐다. 군산의 상징이자 군산시민들이 즐겨 찾는다는 월명산에 있다. 공원에 오르니 군산 시가지와 금강하굿둑, 군산항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짙은 녹음 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더위를 피했다.

 

소설 <탁류>의 채만식 문학비 앞에서 새만금을 생각하였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수시탑은 미래의 영광과 오늘의 고통을 안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과 나부끼는 돛의 형상인 수시탑에서 마치 새만금의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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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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