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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기행

책이 있는 풍경, 보수동 책방골목(부산)



이 있는 풍경, 보수동 책방골목(부산)

 

누구에게나 학창시절 책에 대한 추억은 짙다. 어릴 적 집이 조금 산다하는 친구들은 수학 참고서를 사고 나면 용돈을 더 타낼 욕심으로 있지도 않은 <삼각함수> 책을 사야 한다며 그들의 부모에게서 돈을 받아오곤 했다. 그러고 난 후에는 <사인>, <코사인> 책 등 부모들이 잘 모르는 수학 용어를 마치 책 제목인양 들먹이며 책값을 받아오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27년째 책방골목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청산서점 할머니

이 친구들은 다시 헌책방에 가서 나름 깔끔한 책을 골라 사서 포장지로 책표지를 새로 입히고 그들의 부모에게 책을 샀다고 거짓말을 한다. 바쁜 부모는 책의 겉모양만 대충 보고 그런 줄 알고 넘겨 버렸고 아이들은 확실히 돈세탁에 성공했음을 자축하며 어묵파티를 벌이곤 했다. 가난했던 여행자는 이 친구들을 내심 부러워하며 헌책이나마 만족해야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다른 욕심은 덜한 데 비해 책에 대한 소유욕은 유달랐다. 지금은 보지도 않는 예전의 책들인데도 나의 서재는 욕심으로 책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재산 목록 1호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대며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빼곡한 나의 서재도 정리할 때가 된 듯하다. 버릴 수 없는 소유욕. 나이가 조금 더 들면 이 욕심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부산으로 향했다. 딱히 생각나는 곳도 없고 마침 김해에 볼 일이 있어 가던 중에 보수동을 떠올렸다. 아내도 몇 권의 책을 사야겠다며 따라 나섰다. 딸아이도 책을 사준다는 말에 빨리 가자며 길을 재촉하였다.

 

부산은 여전히 복잡했다. 번질나게 오는 곳인데도 이 도시에서는 머리가 아프다. 여행자에게 도시로의 여행은 언제나 고달픈 일이지만 부산이라는 거대도시는 길 위에서 이미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동전을 던져야 하는 수고로움이 아이에게는 마냥 신기한 놀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름도 유명한 자갈치 시장을 지나니 ‘보수동 책방골목’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길 좌우로 크고 작은 책방들이 어깨를 다투며 줄지어 있었다. 좁은 공간에 쌓은 책은 천장까지 올라가 있고 길거리에도 겨우 두세 사람이 지날 정도의 통로만 허용하고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책을 꺼내올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책의 탑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오래된 고서적부터 참고서, 아동도서, 전집류, 소설류, 종교서적, 대학교재, 참고서, 만화책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취급하는 책의 품목이 워낙 다양해서 이곳에 오면 어떤 책이라도 살 수 있을 법하다. 여행자가 보기에는 책방이 다소 어수선한데도 주인은 책제목만 이야기하면 귀신같이 책을 척척 찾아 내왔다.

 

아이들의 관심거리는 단연 그림책이 있는 아동도서매장이다. 동행한 부모는 보이지 않는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가온다. 이곳에 자주 온 모양이다.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네들이 원하는 책만 골라 읽곤 한다. 아이들에게도 이곳은 좋은 나들이 장소인가 보다.


 
이곳 책방골목은 꽤 오래된 역사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이북에서 피난 온 손정린씨 부부(구 보문서점)가 보수동 사거리 입구(현재 글방쉼터) 골목 안 목조 건물 처마 밑에서 박스를 깔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 만화, 고물상으로부터 수집한 각종 헌책 등으로 노점을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있던 학교는 물론 피난 온 학교까지 보수동 뒷산 등에서 노천교실이나 천막교실로 수업을 했던 터라 보수동 골목길은 자연히 통학로로 이용되며 수많은 학생들로 붐볐다.


 

당시의 수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책을 구입하기가 어려워 헌책이라도 구입하면 감지덕지할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점 헌책방은 자연히 늘어나게 되었고 차츰 다른 피난민들이 가세하여 책방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60, 70년대에 이르자 이곳에는 70여 점포가 들어서 부산의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학기가 되면 책방골목은 책 보따리를 들고 책을 팔고 사려는 이들로 가관이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자신이 가진 귀중한 책들을 팔기도 하고 때론 저당 잡히기도 하였다. 때때로 개인이 소장한 값진 고서도 흘러 들어와 지식인 수집가들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책방 골목의 중간쯤에는 이곳을 오가는 이들이 잠시 다리쉼을 하기 좋은 까페가  최근 하나 생겼다. 책방골목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글들로 까페 유리창은 빈 틈이 없다. 그 옆에는 주전부리를 할 수 있는 작은 분식점이 있어 잠시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이곳은 비단 헌책뿐만 아니라 새 책도 팔고 있다. 골목의 끝에는 최근에 생긴 인테리어를 깔끔히 한 서점들도 몇몇 보인다. 책방골목에서는 중고서적을 40~70%까지 싸게 살 수 있다. 물론 새 책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이 골목의 또 다른 매력은 절판된 서적이나 희귀 고서들을 살 수 있다는 데 있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책을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그 기쁨은 보물을 찾은 것이나 진배없을 것이다. 

비록 낡았지만 앞선 사람들의 체취가 남은 헌책들, 손때 묻은 시간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과거 누군가가 보았고 지금은 내가 보고 있고 앞으로는 다른 누군가가 볼 책의 시간들이 이 골목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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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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