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걸음만으로 겨우 오를 수 있는 만동묘
충북을 대표하는 명승지 화양구곡이 유명한 것은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을 제향한 서원이다. 숙종 15년인 1689년에 왕세자 책봉 문제로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20년인 1694년에 노론이 다시 실권을 쥐면서 송시열은 복권되고 2년 후 화양서원은 사액을 받았다.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된 당시 화양서원의 위세는 대단했었다. 나라에서의 막대한 지원은 물론이고 유생들이 기증한 토지를 강원도와 삼남지방에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권력이 막강해지자 화양서원은 횡포의 온상이 되었다. 서원의 제수비용을 내라는 화양묵패를 보내어 고을 수령이든 백성이든 가리지 않고 재물을 함부로 갈취했으며 이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서원으로 잡아들여 사私형을 가하였다. 흥선대원군도 집권하기 전 말을 타고 화양서원 앞을 지나다 유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화양서원의 위세는 실로 대단하였다. 이와 같이 화양서원의 폐단이 심해지자 고종 8년인 1871년에 화양서원은 결국 철폐되었다.
화양서원 못지않게 기세등등했던 것이 만동묘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문인 권상하 등이 숙종 30년인 1704년에 세운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어 도와준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중국의 강물이 도중에 만 번을 돌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인 ‘만절필동’의 처음과 끝 자를 따서 지었다.
만동묘는 화양서원 제일 뒤쪽에 건립되었다. 해마다 만동묘에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1년 내내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또한 화양서원과 마찬가지로 폐단이 심해지자 고종 2년인 1865에 서울의 대보단에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고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그 후 재건과 폐철, 일본인에 의한 묘정비 훼손 등을 거듭하다 1940년 이후에는 건물도 모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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