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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지리산의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 천불암과 향적사

 

 

 

 

 

지리산의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서. 천불암과 향적사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9> 마지막회

 

 

 안개

ⓒ 김종길

 


천왕봉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안개 속이다. 바로 앞의 나무마저 분간하기 어렵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채색의 텅 빈 세계. 가만히 한참을 응시한다. 그제야 나무며, 풀이며, 산의 능선들이 어렴풋이 형체를 드러낸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무'라고 말하는 듯 온 세상을 가린 안개가 걷히면서 본래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법계사부터는 경사가 더욱 심해졌다. 천왕봉에 오르기가 쉽지 않음을 길은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사실 이 가파른 길을 가는 것은 천왕봉을 오른다기보다는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가는 길이다. 지리산 암자 중에서 천왕봉 아래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법계사 하나뿐이지만 오랜 세월 우리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간 암자들은 무수히 많다. 법계사, 세존봉, 천불암, 제석봉, 천왕봉, 도솔암, 향적사, 법주굴…. 이들 지명만 봐도 온통 불교식 이름이다. 천왕봉을 위시해서 지리산 전체가 예부터 '불국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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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 김종길

 


잃어버린 암자를 찾아서

천불암을 찾기로 했다. 지리산 유람록을 처음으로 남긴 이륙(1438~1498)은 <유지리산록>에서 "법계사는 천왕봉과의 거리가 20여 리이다. 배 모양의 큰 바위가 있는데, 천왕강(天王舡)이라 부른다. 이 절에서 천왕봉 쪽으로 3, 4리쯤 되는 곳에 또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수십 명이 들어앉을 수 있다. 이곳을 천불암(千佛菴)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세상을 피한 자들이 살던 곳으로, 부뚜막, 굴뚝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천불암에 대한 기록은 지리지에도 더러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천불암(千佛庵)은 천왕봉 밑에 있다.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고 했다.  <대동지지>에는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이 있는데, 집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다. 그 아래에 법계사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으며 법주굴(法住窟)이라고 부른다"며 유람록과 엇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불암(千佛菴). '집처럼 생긴 큰 바위'라고 했다. 유일한 단서는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며 집채만 한 바위를 매번 유심히 봤다. 그러기를 수어 번, 마침내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바위벼랑이 보였다. 그러나 요리조리 몇 번을 살폈으나 수도처로는 마땅하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길옆으로 정말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왼편으로 나타났다. 천불암이었다.

불과 10여 미터, 수풀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갔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아래로는 150cm 정도 되는 높이의 굴이 있었다. 앞이 탁 트인 굴 안은 넓었다. 이 정도면 암자라기보다는 천연수도처에 가깝다. 벽에는 누군가 새긴 이름들이 낙서처럼 어지럽다. 지금도 간혹 비박을 하는 이들이 이곳에서 비바람과 밤이슬을 피한 흔적들이 더러 보인다. 제법 널따란 공간은 십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굴 안에 들어앉으니 안방처럼 편안하다. 수풀에 가려 있지만 은둔처로서는 그만이다. 세상과 단절된 편안함이 느껴진다. 바닥에도, 천장에도 그을린 흔적들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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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암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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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불암 터의 굴 안
ⓒ 김종길

 


한평생을 지리산에 바친 김경렬 옹은 <다큐멘터리 지리산>에서 "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에 있었던 암자로 절이라기보다는 천연의 수도처였던 곳이다. 근세에 와서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란 때 의병도총부 소관의 부상병 치료소, 여순병란,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이 되었다. 지금은 때론 천막을 갖지 않은 등산객들이 여기서 불을 지펴 바위를 데운 뒤 그 위에 담요를 깔고 밤을 새운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암법주굴은 천불암이다.

그럼, 그가 말한 '(암)법주굴'은 어디일까. 천불암이야 그 위치가 명확히 밝혀졌지만 (암)법주굴의 소재는 명확하지 않다. 이륙(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다. 지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유람록에 기록되었지만 오랫동안 잊힌 채 전설로만 전해지던 '(암)법주굴'은 또한 이성계가 팔도 명산에 기도를 올리던 굴로 전해지는데, 지금은 법계사 오른쪽 2km 되는 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02년에 지리산에 오른 김회석은 <지리산유상록>에서 천왕봉에서 내려와 "법주암(法珠巖)에 나란히 앉아서 가지고 온 술을 마신 뒤 바삐 걸어 벽계암에 도착하였다."며 천왕봉과 벽계암(법계사) 사이에 법주암(법주굴)이 있었음을 적고 있다. 아쉽게도 법주굴까지는 가볼 수가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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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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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 아닌 것이 문도 아닌 것이

천불암을 지나자 개선문이다. 벼랑 밖은 안개절벽이다. 그 절벽으로는 긴 층계가 놓여 있다. 허공에 걸친 층계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나는, 어디인가…. 모든 것은 안개 속이었다.

남강의 발원지 천왕샘을 지난다. 높은 바위벼랑의 어디에 틈이 있기에 이처럼 물이 솟아난단 말인가. 절구 모양으로 파놓은 아래위 두 개의 둥그런 웅덩이는 홈을 파서 이었다. 고인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신다. 달다. 이제 길은 하늘 끝으로 이어지는 직벽에 가까운 길이다. 철 계단에 이은 돌계단, 사람들은 이곳에서 몇 번이나 걸음을 쉬어야 한다. 앞만 보고 가기에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정상으로 가는 길. 여전히 미망이다.

500년 전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오른 김일손도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는 길로 힘겹게 올랐다. 그의 <두류기행록>을 잠시 보자. "조금 쉬었다가 바로 올라갔다. 배 같기도 하고 문 같기도 한 바위(개선문)를 지나갔다. 길은 꾸불꾸불하고 돌 모서리를 붙들고 나무뿌리를 잡고 해서 겨우 봉우리 위에 올라섰다. 그때 안개가 사방에서 몰려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향적사의 승려가 솥을 가져와 기다리고 있기에 널찍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샘(천왕샘으로 보인다)을 이루고 있어 물을 떠서 밥을 지었다. (…) 저물녘에 천왕봉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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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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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천왕봉에 이르렀다. 자욱한 안개 속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올랐다는 희열보다는 사방의 안개에 홀로 서 있음을 깨달을 뿐이었다. 안개가 걷히길 한참을 기다렸으나 잠시 하늘을 여는가 싶더니 다시 오리무중이다. 안개 속을 한참 더듬다 장터목으로 향했다.

이젠 길마저 짙은 안개로 가려졌다. 오직 눈으로 더듬어서야 겨우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길이 스스로를 지웠다 드러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를 한참, 고사목 지대가 나타났다. 이미 앙상하게 죽은 나무와 가지. 모든 것을 벗어던진 채 본래의 면목을 그대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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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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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단과 향적사 이야기

통천문을 내려서면 제석봉이다. 제석천궁에 장엄되어 있는 수많은 보배 구슬의 그물인 인다라망이 서로 빛을 발하여 안개 속의 적군을 물리치고 있다.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천왕을 거느린다는 제석천이 지리산에선 천왕 아래에 있다. 아무렴 어떤가. 다만, 하늘에 대한 외경을 말할 뿐이니 그 자리를 탓할 것인가.

제석봉에는 제사를 지내던 제석단이 있었다. 1586년에 지리산을 오른 양대박(1543~1592)은 <두류산기행록>에서 폐허가 된 제석당 터와 신을 모시는 사당인 제석신당에 대해 적고 있다. 그보다 뒤인 1610년에 지리산을 찾은 박여량(1554~1611)은 <두류산일록>에서 "제석당의 규모는 제법 넓어 들보의 길이가 거의 23~24자 정도나 되었다.

좌우의 곁방을 제외하고 가운데 삼 칸의 대청이 있었다. 지붕은 판자로 덮었는데 못을 박지 않았고, 벽 또한 흙을 바르지 않고 판자로 둘러놓았다"며 한 노파가 돈을 내어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아 제석당을 새로 지었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제석당은 인근 주민들에게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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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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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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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봉과 더불어 유명한 향적사도 있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굳이 그 거처를 아홉 곳으로 나눈다면 향적산은 북방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 향적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조선 문인들의 유람록에서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향적사는 지리산을 유람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서쪽에서 천왕봉을 오르거나 천왕봉에서 하산할 때 반드시 거치거나 머무는 캠프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이륙(1438~1498)은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향적사가 있다. (…)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지붕을 덮었는데, 살고 있는 승려가 없다. (…) 지리산의 물줄기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발원하고 또 하나는 법계사 아래서 발원하여 살천에 이르러 합쳐져 하나가 된다"고 했다.

이 글과 김종직, 김일손, 양대박, 박여량 등 조선시대에 천왕봉을 올랐던 문인들은 모두 천왕봉에서 석문(통천문)을 지나 향적사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향적사는 천왕봉 아래 장터목 대피소 동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중산리 계곡의 발원지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산꾼들이 향적사라고 추정하고 있는 곳을 가보려 했으나 역시나 폭우로 인해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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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 고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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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 고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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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향적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이 언어로 '불이'를 설명하자 유마거사는 오로지 침묵을 지켜 진실 그 자체를 보여 주었다. 침묵이 있은 후 유마거사는 대중들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초능력으로 나라 전체가 향기로 가득한 '중향(衆香)'이라는 정토를 대중 앞에 출현시킨다. 그곳은 '향적(香積)'이라는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들만이 살고 있는 이상향이다.

마침 이 정토에서 향적불을 비롯해 보살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유마거사는 한 사람의 화신 보살을 만들어서 남은 밥을 얻어 오도록 중향으로 보내고, 이에 부처는 발우 가득 향기 높은 밥을 담아내어주며 그 나라의 보살들을 보낸다. 중향국의 보살들과 함께 돌아온 화신의 보살은 향기로운 밥을 대중 앞에 내놓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배부르게 먹어도 음식은 줄어들지 않았고, 마음은 더욱 편안하고 즐거워졌고, 몸에서는 비유할 길 없는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 나왔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중산리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 계곡 물소리가 세차다. 빗방울도 굵어졌다. 밖으로 향하던 마음이 오롯이 안으로 들어온다. 잠시 계곡으로 다가섰다. 물빛이 옥빛이다. 지난 1년 동안의 암자 순례는 결국 저 맑은 본마음 그것을 찾는 것이었다. 계곡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 옛날 누군가도 이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시인 응우엔꽁쭈의 시를 떠올려본다.

"지난날 많은 이들 앉았던
같은 자리에 오늘 나 앉아 있네.
천년 뒤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와서 앉아 있겠지.
노래하는 자 누구며, 듣는 자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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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리 계곡 물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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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이로써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은 끝났다. 2014년 6월 지리산 북쪽 도솔암에서 시작한 암자 연재는 동쪽, 남쪽, 서쪽의 암자들을 순례한 후 1년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현재 지리산에는 모두 50여 곳이 넘는 암자가 있다. 이곳을 거의 순례했으나 연재에서는 모두 싣지 못했다. 이후에 책에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지리산 암자 순례는 그 자체로 불국토 지리산을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그 길에서 수많은 스님들을 만나고 불자들을 만나고 심지어 불교와 관련 없는 이들도 만났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스승이자 깨달음을 주는 이들이었다. 1년 남짓한 암자 순례는 부처의 세계란 결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 우주 자체, 우리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다. 이 현실 세계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리하여 스스로 깨닫는 '자리행'과 남을 깨닫게 하는 '이타행'을 실천하는 것이 곧 순례의 목적임을 알게 되었다.

<화엄경>에서 구도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선재동자는 53선지식을 만난다. 그러나 선재동자가 만난 선지식들 중에는 불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이들, 심지어 매춘부도 있었다. 선재동자는 오로지 그 사람이 도에 통달해서 자기를 깨닫게 할 수 있는지만 기준으로 삼고 구도를 계속했다. 소년이든, 왕이든, 의사이든, 외도인 바라문이든, 배 만드는 목수이든 매춘부이든, 다른 모든 조건들은 무시했다. 세속의 모든 조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도를 위해서만 구도를 계속했다.

선재동자의 구도여행은 처음 지혜의 대표자인 문수보살에게서 시작하여 쉰두 번째 문수보살로 다시 돌아와서 마지막 쉰세 번째 보현보살에서 끝난다. 53선지식의 방문이 모두 끝나자 입법계품이 끝나면서 <화엄경>도 끝이 난다. 마지막 선지식인 보현보살의 최후의 설법으로 선재동자는 깨달음의 완성이라는 궁극의 목표로 향하는 새 출발점에 서게 된다. 결국 선재동자의 새 출발로 <화엄경>은 끝맺음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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