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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여왕을 위한 마루, 하회마을 충효당의 비밀!

 

여왕을 위한 마루, 하회마을 충효당의 비밀

 

하회마을의 중심, 그곳에는 충효당이 있다. 양진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형과 아우의 종택이 나란히 있다. 형제는 각기 강 건너 산기슭에 옥연정사와 겸암정사를 지어 학문을 닦고 왕래를 했던 것처럼 사는 것 또한 함께하여 이들의 우애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바깥마당에는 구상나무 한 그루가 있다.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하회마을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심었다. 많은 나무 중에 구상나무를 택한 것은 한국 고유의 수종인 데다 그 힘찬 기상과 추위를 견디는 굳건한 힘이 있기 때문이란다.

 

 

一자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를 들어서면 곧장 사랑채가 나타난다. 사랑채는 다른 종가에 비해 기단이 낮아 눈높이가 적당한데, 그러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기단이 조금만 높았어도 행랑채와의 간격이 좁아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앞면 6칸, 옆면 2칸의 사랑채는 가운데 4칸을 대청으로 쓰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왼쪽의 방에 세살문을 단 것과 달리 오른쪽은 판문을 달았다. 사랑채가 서향이다 보니, 여름의 강한 햇빛과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전체가 방인 왼쪽과는 달리 오른쪽에는 마루와 방이 각기 하나씩 있다.

 

 

특이한 것은 이 넓은 사랑채에 오르는 길이 앞과 뒤 단 두 쪽 뿐이라는 데 있다. 대신 마루 저편이 훤히 뚫려 있어 개방적인 데다 앞과 옆으로는 헌함을 두르고 계자난간을 두어 공간을 좀 더 넓게 사용함과 동시에 이동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충효당은 류성룡의 종택이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는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애 류성룡의 손자인 졸재 류원지가 유림과 제자들과 함께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1600년대에 지은 집이다. 당시는 안채를 지었고, 그의 아들 눌재 류의하가 확장․수리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일우 류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불시에 닥칠 군사를 맞이하려고 급조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마루 위쪽에 ‘충효당’이라는 글씨가 선연하다. 전서로 쓴 현판은 얼핏 봐도 선비의 꼿꼿함이 느껴진다. 조선 중기의 명필 미수 허목의 글씨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랑채의 옆을 돌아 안채로 향했다. 안채는 종손이 거주하고 있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돌아갔다.

 

 

이른 아침이라 집 구경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사랑채의 문을 열고 나온 종손을 우연히 마주치면서 현실이 되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안채를 구경하겠다고 하니 흔쾌히 응하신다. 꾸벅 절을 하고 종손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예상 밖이었다.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구조이지만, 굵직한 기둥에다 중층의 구조인 안채는 보는 이를 압도해 버린다.

 

 

안채에선 하늘도 네모였다. 일단 안채는 나중에 찬찬히 살피기로 하고 중문을 거쳐 뒷마당으로 갔다

 

 

뒷마당에서 보니 벽면 구성이 놀랍다. 일정한 규칙이 있는 듯하면서 제각기 나뉘어져 있는 공간이 인상적이다. 마치 벽화를 그린 듯한 흥미로운 벽면 구성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문의 형식도 제각기이다. 널판을 단 판문, 세살문, 광창 등 역할에 맞게 구성되어 있다. 똑바른 나무도 있고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대로 쓴 것도 있다. 높낮이도 각자의 쓰임에 따라 달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아까 사랑채에서 봤던 행랑은 안채 앞 중정까지 길게 이어진다. 사랑채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일각문이 있는데, 이 일각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있고 중문간에 들어서게 된다.

 

 

다시 안채로 들어가는 길, 탄탄한 갈색의 문짝이 듬직하다.

 

 

안채는 사랑채와 건물이 붙어 있지만 방이나 마루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신발을 신고 후원을 통해 드나들 수 있게 했다.

 

 

 

몸채는 앞면 7칸 옆면 7칸의 거대한 건물인데, 가운데에 화단과 장독대를 두었다. 안채 전면에는 둥근기둥(원주)을 썼고 나머지에는 모난기둥(방주)을 썼다.

 

 

몸채와 오른쪽 날개 건물은 방과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왼쪽과 아래는 주로 부엌, 광과 찬방이 있어 살림을 살 수 있다. 특히나 2층인 고방과 찬방은 습기와 바람이 잘 통할 뿐 아니라 큰 살림살이에 필요한 많은 수납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충효당 안채는 예전에 봐왔던 고택의 구조와는 다르다. 공간 구성이 크고 자유로운 것이 거침이 없다. 특히나 높은 기단에다 굵직한 기둥을 높이 올려 한층 더 위엄을 갖추게 했다. 안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두어 동선의 연결을 꾀하고 있다.

 

 

안채를 살피던 중 특이한 구조물을 발견했다.

 

 

안채로 오르는 돌층계 끝 섬돌 옆으로 나무 계단처럼 보이는 작은 마루가 하나 있었다.

 

 

옛 가옥에서 처음 보는 형태라 약간은 의아했다. 어떤 용도일까? 가까이 다가서니 하얀 글씨가 붙어 있다.

 

 

'1999년 4월 21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문을 위해 설치한 마루'였다. 섬돌이 놓였음에도 행여 오르내릴 때 불편함이 있을까 마루를 내어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다.

 

 

섬돌을 오르내릴 때 도와주는 끈도 보인다.

 

 

 

사랑채를 돌아 뒷마당으로 가면 사당이다. 사당은 몸채와는 달리 남향을 하고 있다.

 

 

 

그 앞으로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부챗살처럼 하늘을 향해 뻗은 모양이 일품이다. 13대 종부 무안 박씨가 심었다고 한다. 이름 하여 만지송이다.

 

 

고래를 돌리니 시멘트로 만든 영모각이 보인다. 고택 뒤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건물이다.

 

 

 

영모각 안에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일을 기록한 <징비록>을 비롯해 각종 문서 19권이 보물 제160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그가 평소에 썼던 갑주, 가죽신, 갓끈 등도 보물 제4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효당은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