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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제주만의 액막이 방사탑을 아세요?

 

 

 

 

제주만의 액막이 풍습, 방사탑을 아세요?

 

대정읍 김정희 유배지를 떠나 대정향교로 향했다.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를 지낸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는 대정향교와 함께 파군산과 산방산이 보인다. 파군산이라.... 파군산은 오늘날의 단산을 말한다.

 

파군산이라는 이름은 단산을 일컫는 ‘바굼지오름’을 한자음을 빌어 표기한 것이다. 안덕면 사계리와 대정읍 인성리에 걸친 185m의 바위산인 단산은 날개를 편 거대한 박쥐같다는 데서 바굼지오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혹은 커다란 대바구니처럼 생겼다 하여 ‘바고니’, ‘바굼지’라 했다는 설도 있다. 과거 이곳은 삼별초의 격전지로 여몽연합군이 삼별초군을 격파한 곳이라 하여 ‘파군산’이라고도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산방산과 단산

 

산방산과 단산을 바라보며 대정향교로 가는 길은 제주의 여느 지역과는 달리 너른 들판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길이다. 중산간의 황량함도, 제주 바다의 눈부심도, 한라산의 빼어남도 아닌, 제주에도 이런 농촌의 서정성이 깊이 배인 곳이 있음을 절로 알게 되는 길이다.

 

대정읍을 나와 인성마을에 이르자 온통 마늘밭이다. 파릇파릇 갓 싹을 틔운 마늘이 온통 초록빛을 내는 들판에는 늦가을이지만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라는 관념만 없었다면 따스한 봄날인 줄 착각이 생길 정도다. 마늘밭에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도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인성리 방사탑

 

단산이 점점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얼굴빛을 한 초로의 노인 한 분이 저쪽에서 이리로 걸어왔다. 길옆에 방사탑이 있어 걸음을 멈추자 할아버지도 걸음을 멈췄다.

 

“내가 이 동네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예전에 농업학교를 나와서 읍사무소에서 일도 했지. 방사탑이 원래 3개가 있었는데 여기 두 개가 있고 저 너머 모슬포 방향으로 한 개가 더 있어. 원래 이쪽 땅이 기운이 없어 답을 세운 거야. 저 위에 있는 돌은 최근에 다시 올린 거고.”

 

동네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는 이인배(91) 할아버지는 농업학교를 나온 인텔리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제주 사투리가 심하지 않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귀가 약간 어두우신 탓에 소리를 조금 높여서야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체육복을 입었는데도 자세는 말쑥하고 꼿꼿했다. 얼굴은 으레 장수하는 분들이 그렇듯 맑은 빛이 흘렀고 기운이 넘쳤다. 사진 한 장을 부탁드렸더니 신사의 중절모를 닮은 산방산과 멋진 스카프 같은 단산을 배경으로 할아버지가 자세를 잡았다.

 

   여행자에게 인성리 방사탑을 설명한 인배(91) 할아버지와 단산 그리고 방사탑

 

할아버지의 기억과는 달리 인성리에는 4기의 방사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두 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알뱅뒤’라고 불리는 이곳이 허하여 마을에 불이 자주 나고 가축이 병들어 죽자 4기의 방사탑을 세웠더니 그러한 현상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서 보면 풍수를 잘 모르는 이라 할지라도 들판이 왠지 휑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인성리 방사탑, 석상은 최근에 올렸다

 

방사탑은 원래 마을의 경계나 허한 곳에 원통형의 돌탑을 쌓아 부정과 악을 막고 마을을 평안하게 하는 제주의 오랜 액막이 풍습이다. 육지의 솟대나 장승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원래는 ‘답’, ‘거욱대’, ‘가왁’, ‘극대’, ‘방시탑’, ‘방사탑’ 등으로 불렀다. 이러한 형태의 답은 약 50년 전만 해도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제대로 된 원형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인성리 방사탑 1호는 밭을 한참이나 걸어가야 했는데 진창에 발이 빠져 결국 신발을 버렸다.

 

최근 민속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명칭의 이것을 ‘방사탑’으로 총괄해서 부른다. 방사탑은 우선 큰 돌로 밑단을 둥글게 한 뒤 그 안에 잔돌을 채우고 다시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원통형으로 만든다. 맨 위에는 돌하르방이나 동자석 같은 석상, 까마귀나 매를 닮은 돌 등을 올려놓는다. 동자석이 있으면 ‘거욱대’, 까마귀는 ‘까마귀’, 매를 세우면 ‘매자재기’라고 부른다. 까마귀나 매의 경우 돌이 아닌 비자나무나 참나무 같은 잘 썩지 않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기도 했다. 흔히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를 세우는 것은 궂은 것을 모조리 쪼아 먹게 하기 위해서란다.

 

   인성리 방사탑 1호, 밭에 물을 대는 스프링클러가 계속 물을 뿌리는 통에 사진 찍느라 애를 먹었다.

 

탑 속에는 밥주걱이나 솥을 묻어두는데, 솥의 밥을 주걱으로 긁어 담듯 재물을 마을로 담아 들이고, 무서운 불을 솥이 이겨내듯 마을의 재난을 없애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에 39기의 방사탑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중 17기가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인성마을의 방사탑은 높이 2.3m, 지름 2.3m 내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