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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적요한 숲길, 석굴암을 닮은 보안암석굴

 

 

 

깊은 숲길 끝에 만난 석굴암을 닮은 보안암석굴

 

서봉암에 올랐다. 구불구불 산허리를 힘겹게 감아 오르던 택시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암자에 섰다. 무슨 일인지 산꼭대기 암자에는 차들이 빼곡했다. 완사에 딱 두 대 있는 택시 중 한 대를 타고 온 것이다.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은 대중없는 버스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어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타기로 하고 택시를 불렀다.

 

서봉암

 

"오늘요. 백중 아니요. 백중." 아뿔싸! 그러고 보니 불단 앞에 하얀 백설기가 높이 쌓여 있었다. 암자 뜰까지 자리를 깔고 앉아있던 한 참배객은 소리 낮춰 답을 하면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조심조심 인파를 헤치고 한쪽 구석에 섰다. 암자 앞으로 멀찌감치 산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봉황이 깃들었다는 서봉암의 기운을 한층 북돋아 주는 듯했다.

 

산중 외딴집

 

암자에서 길을 물으니 의견이 둘로 나뉜다. 암자 아래로 난 오솔길을 따라 가면 외딴집 한 채가 나올 터이니 능선으로 갈 건지 아니면 계곡을 가로질러 갈 것인지를 결정하란다. 예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외딴 집은 대문 대신 정낭처럼 대나무를 입구에 걸어두었다.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해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이 산중에 사는 이는 대체 누굴까. 한참을 서성이다 차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산중 차밭

 

산중의 외딴집도 그러하거니와 이 깊은 곳에 제법 너른 차밭이 있다는 게 의아하다. 인근의 다솔사를 흔히 '다사(茶寺)'라고도 부르지만 이곳의 차밭도 제법 넓다. 다솔사의 차밭은 최범술이 인근에 자생하던 차나무 씨를 받아 절 뒤쪽 비탈에 일구어 반야로차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밭을 가로질러 약수터로 방향을 잡으면 금방 다솔사에 이르겠지만 에둘러 가는 능선 길을 택했다. 숲의 호젓함을 좀 더 오래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서봉암에서 다솔사 가는 길은 산책길처럼 평탄하고 고요하다.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하늘빛을 따라 능선에 올랐다.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이 길을 물어 아는 대로 가르쳐주었다. 보안암과 약수터 갈림길까지는 2km정도인데 이날 산행 중에 마주친 사람은 손꼽아 봐도 기껏해야 대여섯 명 정도였다.

 

 

길은 내내 평탄했다. 전에 두어 번 이 길을 걸었었는데 발에 감기는 길의 촉감도 여전했다. 산행이 아니라 산책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확할 것 같다. 혼자 걸으니 숲길이 적요하다. 새소리라도 들릴 법하지만 오늘따라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나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정성들여 쌓은 돌탑 무더기에 이르러서야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갈림길에서 보안암 가는 오솔길

 

맞은편에서 오던 등산객이 '물고뱅이마을 둘레길'을 물었다. '물고뱅이라...' 처음 들어본다. 한참을 되뇌어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봉명산에서 1005번 지방도를 건너 물고뱅이마을에서 다시 봉명산으로 돌아오는 둘레길이었다. 근래에 생긴 모양이다.

 

 

갈림길이 나왔다. 곧장 가면 다솔사로, 왼쪽으로 빠지면 약수터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굽어 들면 보안암 가는 길이다. 생각 끝에, 500m 거리에 있는 보안암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와 약수터를 거쳐 정상에 오른 후 다솔사로 내려가는 걸로 작정했다.

 

 

보안암 가는 오솔길도 퍽이나 운치가 있다. 하늘을 향해 적당히 솟은 소나무 아래로 그만그만한 풀과 나무들이 섞여 있는 조붓한 길이다. 걷는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무념이 찾아온다. 그 적요함을 깨는 건 눈앞을 가로막는 높다랗게 걸린 돌층계와 그 위로 고대의 신전 같은 돌 축대다. 마치 고대의 신전을 산중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누가 쌓았는지 산중의 돌담 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고 옹골진 것이 묘하다.

 

보안암석굴

 

푸르다 못해 검은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돌담 아래서 잠시 마음을 여민다. 암자로 오르기 위해선 이 돌담 아래를 에둘러 가야 한다. 백중날을 맞아 찾아온 객들의 도란도란 말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한낮의 암자 뜰에는 아직은 강한 햇살이 부딪혔다. 비구니 스님이 계신 모양이다. 정갈하다.

 

 

석굴은 뒷산의 경사면을 'ㄴ'자 모양으로 파낸 자리에 널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다. 이 널돌은 점판암으로 결 따라 깨진 조각이어서 별도로 다듬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다. 암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다. 석굴의 크기는 정면 9.4m, 측면 6.6m, 높이 3.5m 정도다. 고려 말에 승려들이 수행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석굴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16나한상이 좌우에 안치되어 있다. 나한상은 제각기 다른 모습인데, 오른쪽의 1구가 보이지 않는다.

 

 

흔히 '군위삼존석굴'을 제2의 석굴암이라 한다. 실제 안내판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군위석굴은 천연절벽의 자연동굴을 약간 확장한 것으로 이곳 보안암처럼 건축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경주 석굴암도 인공석굴임을 감안한다면 규모도 작고 다소 투박하지만 돌을 쌓아 만든 보안암이야말로 제2의 석굴암으로 불릴 만하다.

 

경주 석굴암이 귀족적이라면 보안암석굴은 민중적이다. 세련된 미의 극치인 석굴암의 불상에 비해 보안암의 그것은 질박하다. 세련되고 미끈한 석굴암의 불상과는 달리 동네 아저씨 같은 보안암의 불상은 친근하기 그지없다. 얼굴도 파손되어 군데군데 시멘트로 보수를 했다. 그래서일까. 우리네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이다.

 

 

약수터로 발길을 돌렸다. 샘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인 아무 길을 택하여도 좋다. 사방 숲에 둘러싸인 이 약수터는 인적조차 드물다. 여름 땡볕이 울창한 수림에 가리고 자는 바람도 여기선 깨어난다.

 

하늘이 샘에 잠겼는가 싶더니 샘 바닥에 깔린 자갈돌마저 푸른빛이다. 물이 맑다 못해 보는 눈이 시릴 정도다. 졸졸졸 물소리와 흘러내리는 줄기만 아니었다면 그 존재조차 몰랐을 테다. 새벽 토끼도 세수하러 왔다가 물빛이 너무 맑아 손을 담그지 못하고 물만 먹고 갔으리라.

 

2008년 7월의 약수터 모습과 현재의 모습

 

이 산중 숲속 옹달샘에 거대한 지붕이 생겼다. 예전에는 돌담으로 정성스레 쌓은 샘과 한쪽 구석에 삿갓만 하게 앙증맞은 나무지붕만 있었다. 빗물이나 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을 씌웠겠지만 주변을 압도해버리는 구조물에 씁쓸하고 애통하다. 숲속 옹달샘이라는 낭만과 호젓함이 사라지고 그저 물 마시는 흔하디흔한 약수터로 된 것이다.

 

봉명산 정상에 오르면 다도해의 풍광이 펼쳐진다.

 

봉명산 408m. 여태까지의 부드러운 육산이 정상에 다다르자 단단한 암산으로 바뀌었다. 마치 봉황이 짝 펼친 부드러운 날개를 그동안 걸어온 것이라면 이제는 단단한 머리 위에 오르는 듯하다. 길도 몇 갑절이나 힘들어진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에고’하고 숨을 고르게 된다.

 

이곳에는 유독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봉황이 울었다는 봉명산, 봉황이 알을 낳았다는 봉알자리, 봉황이 깃들었다는 서봉암... 그래서일까. 절의 이름도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다솔사이고 인근 은사리에는 단종태실지가 있었다.

 

 

정상에는 높다란 정자가 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니 다도해의 풍경이 펼쳐진다. 남으로 금오산, 서쪽으로 백운산, 서북으로 지리산 웅석봉이 보이다고 하나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점점 다도해의 풍경만 해도 넘치고 넘친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정상에서 다솔사로 가는 길은 제법 경사가 심하다. 행여 미끄러질 세라 소나무가 제 뿌리를 엮어 자연층계를 만들어준다. 강진의 다산초당 오르는 길에 보았던 그 ‘뿌리의 길’이다.

 

저 아래로 다솔사가 보였다. 고색창연한 사찰은 아니지만 그윽한 자연 속에 자리한 산사는 고요했다.

 

 

 

☞ 서봉암까지는 완사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완사에는 택시가 단 두 대 있다. 전화번호는 055-853-2070, 011-583-8809이다. 요금은 11000원 정도다. 서봉암에서 다솔사까지는 약 3.7km정도이나 길이 아주 평탄해 누구나 걷기 좋은 숲길이다. 약수터로 질러가면 2.2km다. 아니면 시내버스로 다솔사까지 가면 된다. 다솔사에서 보안암을 지나 서봉암까지 갔다가 약수터 지름길로 다시 다솔사로 돌아오는 산행 길을 택해도 좋다.

곤양-다솔사-완사 시내버스 시간표

곤양(출발)

다솔사(경유)

완사(출발)

8시 40분

8시 43분

9시

11시 40분

11시 43분

12시

-

-

13시 10분

14시 20분

14시 23분

-

15시

15시 3분

15시 20분

19시 10분

19시 13분

19시 30분

※ 곤양에서 출발한 버스는 다솔사를 거쳐 완사에 도착한 후 위 시간에 다시 완사를 출발하여 다솔사를 거쳐 곤양으로 되돌아간다.(적어도 버스시간 10분 전에 가서 기다리는 게 좋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