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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진달래 꽃길따라 하늘에 닿은 암자. 도솔암



진달래 꽃길 따라
하늘에 닿은 암자. 도솔암

마음의 고요를 찾아 길은 이어졌다. 봄빛 넘치는 청산도의 춘정春情을 식힐 곳, 암자를 찾았다. 몇 해 전 해남 달마산 도솔암을 찾았었다.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였다. 내가 아는 건 ‘도솔암’, 단 석 자뿐이었다.


달마산 벼랑 끝에 암자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작정 길을 떠났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 도솔암에 대해 물었다. 젊은 축들은 아예 암자의 존재를 몰랐고, 송지면의 어느 마을에서 만난 촌로에게서 바위산 능선에 암자가 있다는 걸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길을 물었다. 노인은 꼭대기에 보이는 송신탑을 가리켰다. 길을 설명하는데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꺾어야 암자에 이를 수 있는 지만 기억했다. 송신탑만 바라보고 길을 잡았다. 송신탑 방향으로 몇 번 접근한 끝에 산으로 오르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수년 만에 다시 도솔암을 찾았다. 이번에는 수월하게 길을 찾았다. “땅끝에서 만난 하늘끝 암자, 도솔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문구가 적힌 표지판이 도로 곳곳에 있었다. 덕분에 암자 가는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나의 몸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가는 듯한 혼란이 일었다.


도솔암이 자리한 달마산의 자태는 여전했다. 해발 489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기기묘묘한 달마산의 풍광은 예사롭지 않다. 공룡의 등줄기처럼 한 줄로 길게 늘어선 12km 정도의 달마산 능선은 사뭇 당당하다. 그 속에 미황사라는 아주 예쁜 절집이 있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은 돌산인데 길은 흙길이다. 부드러운 흙의 질감이 발바닥에 그대로 전해진다. 오붓한 산길, 눈을 감고 가더라도 바람이 암자로 데려갈 것 같다. 수려한 산세, 벼랑에 듬성듬성 핀 붉은 진달래, 점점 떠 있는 섬들. 풍경은 더디게, 아주 느리게. 여행자는 걸음을 자꾸 멈춘다.


얼마나 걸었을까. 애초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거대한 바위기둥 사이로 낭떠러지가 보인다. 돌을 차곡차곡 쌓은 층계 위 벼랑 틈에 암자가 있었다. 암자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 암자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암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아래로 인간의 세상이 보였고 그 외에는 하늘이었다.

“하나의 등이 밝아지면 천년의 어둠이 사라진다.”


한 떨기 바위꽃, 그 속에 암자는 자리하고 있었다. 한 뼘 남짓한 마당에 서면 다시 봉우리가 암자를 둘러싸고 있다. 꽃 속에 꽃, 두 겹의 꽃송이에 암자는 자리하고 있다.


암자에서 아래로 향했다. 산신각에서 암자를 올려보기 위해서다. 몇 해 전 왔을 때에도 그랬었다. 하늘에 닿은 암자, 도솔암을 가장 멋들어지게 볼 수 있는 곳이 산신각이다.


앞이 트인 벼랑에 돌을 하나하나 쌓아 축대를 올리고 그 위에 암자를 지었다. 저 낭떠러지에 돌을 쌓아 암자를 만든 스님은 누구였을까? 이렇게 수도하기 좋은 곳은 어떻게 찾았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애써 도를 얘기하지 않더라도 저 절벽에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면서 그는 이미 하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간혹 깨어진 기와조각이 나뒹굴었다. 예전부터 이곳에 암자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도 한결같다. 암자 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전각은 최근에 지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도솔암은 통일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의상대사가 자리를 잡은 수행저는 언제나 전망이 장쾌한 곳이다. 의조화상도 미황사를 창건하기 전에 이곳에서 수행 정진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암자는 터만 남게 되었다가 30년 전부터 여러 차례 스님들이 복원하고자 했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2002년 6월 월정사의 법조스님이 법당을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신각 마당에 앉아 하염없이 암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밑 샘에 가보셨어요?”

깊은 적막을 깨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예?”

“저 밑에 가면 샘이 있습니다.”

“아, 예.”

예전에 이곳을 왔을 때에는 미처 몰랐었다.


그의 말을 쫓아 산신각에서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예전에도 이 산길을 보았지만 산 아래 마을로 가는 등산로이겠거니 여겼었다. 벼랑 사이 좁은 산길을 내려 오른쪽으로 도니 이내 막다른 길이다. ‘이런 곳에 샘이 있다고. 막다른 길인데....’ 분명 앞은 막혀 있고 아래는 낭떠러지고 겨우 한사람이 지나갈만한 벼랑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을 대는 호수가 없었다면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길 끝까지 같더니 좁은 통로가 있었다. 바위를 오르니 거짓말처럼 동굴이 나왔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벽 아래 우물이 있었다. ‘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굴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온통 바위덩어리인 이 산에 어떻게 석간수가 나온단 말인가. 한참을 보고 있다 그제야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암자가 설 때 제일 먼저 물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예전 고승들이 수행처나 암자 터를 고를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이 물이었다는 그 간단한 사실을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다.


다시 암자 능선에 섰다. 바람이 불었다. 방금 샘을 가보라던 이가 어디선가 다시 나타났다. 산 아래 마을에 산다는 그는 샘을 이곳에서 ‘용샘’이라 부른다고 했다.

 

“샘 위 바위벽에 두 개의 굴이 뚫려 있지요. 옛날 그곳에서 두 마리의 용이 나와 하늘로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용굴이라 불리지요. 하나는 용이 입을 벌려 생긴 구멍이고 나머지 하나는 용이 뿔로 받아 구멍이 생겨 뿔구멍이라 불렸다고 하더군요.”

 

여행자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곳을 보니 기도발이 잘 받게 생겼지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국의 무속인들이 굿을 벌이기 위해 이곳을 많이 찾았습니다. 그만큼 기도발이 좋은 곳이지요. 문제는 무속인들이 버리고 간 음식이며, 쓰레기가 늘 골칫거리였습니다. 어떨 때에는 트럭 몇 대분의 쓰레기를 수거해 간 적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진한 애증이 묻어 있었다. 복을 빌러 온 사람들이 오히려 복을 버리고 가는 형국이다. ‘용담굴’로도 불리는 용샘은 이렇듯 신앙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걸은 터라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진득하게 앉아 있기로 했다. 안개가 짙어 멋진 일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퍼질러 앉았다. 해는 떨어졌고 기대했던 일몰은 없었다.
“이제 산길을 내려가시지요.” 사내가 말했다. “먼저 가시지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다시 바위에 걸터앉았다. 달이 떴다.


도솔암은 최근에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추노>와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아직도 개집 세트가 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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