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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다

봄날, 남강 옛 장터와 나루를 쏘다니다




봄날, 남강 옛 장터와 나루를 쏘다니다

진주시 지수면 안계마을 산책

 

강이 그리워 진주시 지수면에 갔습니다. 오후가 되니 봄 그림자가 늘어지게 낮잠을 잡니다. 마을을 크게 휘감아 도는 남강 언덕에 안계마을이 있습니다. 안계. 마을 이름이 자욱합니다.


마을 어귀에서 밭에 농약을 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안계 마을의 유래에 대해 물었습니다.

“옛날 이곳 강가에 기러기가 많이 내려앉았다고 해서 불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마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잘은 모리것소.”


다시 몇몇 마을 노인들을 만나고 나서야 예전에 이곳을 ‘앵기’라 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앵기’가 안개를 뜻하는 것은 아닌지, 앵기를 한자로 기록하면서 ‘안계’로 불린 것이 아닌지를 주민들께 물어보니 한결같이 모르겠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러기가 많아서 불린 것이라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대밭에 있었던 옛 마을 흔적과 논밭터

안계 마을이 있는 용봉리는 용산과 봉산의 이름을 따서 용봉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한때 함안 땅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수면 용봉리가 되었습니다. 용봉리는 크게 동지, 안계, 용봉으로 3개의 행정마을로 되어 있습니다. 강마을인 동지와 안계에는‘동모리’라 불리던 대, 소동지와 삭등, 호노골, 뱃가 등의 마을이 있습니다.

옛 우물 논새미

대밭 사이 논새미를 찾아

마을에서 만난 최순병(54) 씨를 따라 논새미로 갔습니다. 마을 뒤의 푸른 대밭 사이를 오르니 우물이 있었습니다. 대밭 속의 우물, 운치가 그윽합니다. 마을에서 떨어진 숲속에 우물이 있다는 게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저 짝을 보실소. 담장이 보이지요. 예전 저 알로(아래)는 전부 물바다고, 이 짝 산 밑에 마을이 있고, 논이 있었지예. 저 담장들이 있던 곳이 옛날 집터고 논밭터입니더."

최순병 씨가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논새미 주위로 마을이 들어섰고 논밭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래밭이었던 마을 앞 강변은 댐이 서고 나서야 비옥한 농토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진주시 특산품인 마와 우엉을 재배하여 농가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물이 가득합니다.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아 당장은 마실 수 없었지만 물은 아직도 깨끗해 보였습니다. 최순병 씨에게 물 마시는 시늉을 해달라고 해서 사진 한 장을 담았습니다. 물맛이 기가 막혔다는 이 우물에는 치성을 드렸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장독대. 그리운 어머니

대밭을 빠져나오니 할머니 한 분이 장독대에 있었습니다. 장독 뚜껑을 열고 바가지로 흰 통에 무언가를 붓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뭐하고 계세요.”
“응, 아들이 온다고 해서 간장 좀 퍼 놀라꼬.”


할머니께도 마을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간장을 퍼 담으면서도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장독대와 어머니. 무척 보고 싶은 봄날이었습니다.


“저 뒤에 있는 건 뭡니까?” 동행했던 일행이 물었습니다. “재실이라요.” 최순병 씨가 답했습니다. 낡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집이었습니다. 굵직한 은행나무 한 그루와 화사한 벚꽃 사이로 비친 건물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뜸 언덕 아래를 뛰어 허름한 집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자세히 보니 재실이 아니라 가묘(사당)였습니다. 가묘가 있다는 것은 집안 내력이 깊다는 걸 의미합니다. 장을 푸던 할머니 집을 보다 천장 서까래에 반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에 울컥했습니다. 봄날은 그렇게 오랜 추억을 끄집어내며 사월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폐가에 천연덕스러운 쌀뒤주가

“선생님, 저기 보세요.”

앞서가던 문 선생이 허물어진 집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여행자를 불렀습니다.

“저게 뭡니까?”

그가 소리친 곳으로 서둘러 다가갔습니다. ‘아’ 하며 짧은 탄성을 저도 모르게 내뱉었습니다. “아, 그거요. 뒤주입니다.” 짧게 답변을 하고 여행자는 ‘저리 귀한 것을 보다니... 우와, 대박이다....’ 쉴 새 없이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사실 관광지화 된 옛집에서 가끔 쌀뒤주를 본 적은 있지만 농가에 천연덕스럽게 놓인 뒤주를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오늘 한 건 했습니다.”


뒤주하면 누구나 사도세자의 죽음을 떠올리고, 혹은 옛적 시골집 대청에 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뒤주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나락뒤주’라고도 불리는 이 쌀뒤주는 마당에 자리합니다. 가을에 추수한 벼를 잘 말려서 가득 채운 후 이듬해 필요할 때마다 작은 문을 열면 나락이 쏟아져 나옵니다. 대나무로 만든 뒤주도 있지만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를 판자로 막은 뒤주도 있습니다. 제일 위의 판자부터 1번을 매겨 순서를 정하고 곡식을 가득 채워 필요할 때 판자를 하나씩 빼면 나락이 쏟아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이 뒤주는 대나무로 엮은 뒤주입니다. 마치 큰 항아리처럼 배가 불룩한 모양입니다. 아래로는 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시멘트를 깔았습니다. 그 위에 소쿠리를 엮듯이 왕대를 엮어 몸통을 만들었습니다. 머리 위로 흙을 발라 단단히 마감을 하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습니다. 슬레이트가 나오기 전에는 대개 볏짚으로 이엉을 인 초가지붕이었습니다.



앵기뻔덕 장터와 나루터

강마을 뱃가로 향했습니다. 뱃가 마을은 예전 ‘뻔덕’이라고 불리던 마을이었습니다. 아마 강변 언덕이라는 말에서 온 것 같습니다. 남강에 댐이 들어서기 전에 이곳 마을은 늘 물이 넘쳐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뻔덕’에는 물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곳 지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강이 건너편 의령군을 크게 휘감아 돌면서 이곳 언덕을 감싸 흐르고, 지대가 주변보다 조금 높아 자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 이곳에는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나루터 주위의 ‘앵기뻔덕’에는 장이 섰다고 합니다. 마을에서 만난 한찬동(88) 할아버지는 뱃가 마을의 장터를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루터 주위의 장에는 장사꾼들과 노름꾼들로 북적대었다 합니다. 장이 서니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이니 술집이 생기고, 술집이 생기니 진주에서 기생들이 모여들었다 합니다. 당시 위로는 진주까지, 아래로는 의령 정암나루까지 뱃길이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옛 나루터에서 본 남강 풍경

한때는 번잡했을 강변에 섰습니다. 연둣빛의 나무 사이로 허물어진 옛집이 보입니다. 음기가 조금 세어 보이니 살림집으로는 꺼림칙하고 술로 기운을 누를 수 있는 주막이 제격이겠습니다. 저런 집을 수리해서 주막을 열고, 배를 저어 오가는 손님들을 강 건너로 보내는 상상을 해봅니다. 높은 제방에 꾹꾹 묻혀버린 그 옛날 장터의 활기를 봄빛 강물에 그려보았습니다.

건너편 대곡면 산방마을에서 내려다본 안계마을 뱃가 옛 장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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