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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옛 절터로 떠나는 쓸쓸한 가을 여행지 5곳




 옛 절터로 떠나는 쓸쓸한 가을여행지 5곳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다. 연일 무더운 날씨에 가을이 오기는 올까하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었다. 가을, 굳이 단풍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길을 나서고 싶은 계절이다. 황금들판도 좋거니와 코스모스 피어 있는 간이역도 좋으리라. 이도 저도 아니라면 폐사지는 어떨까? 황량한 옛 절터에 서서 자신의 내면에 쓸쓸함을 가득 채워봄은 어떨까. 그저 타박타박 걷다가 지는 해를 보며 눈물 한 움큼 훔칠 수 있는 감성이라면 이 가을, 외롭고 높고 쓸쓸한 옛 절터를 찾아가자.

 

1. 옛 기억을 찾아 떠난 미륵사지의 황혼-전북 익산
. 천년의 세월이 세상에 드러낸 건 그것뿐이었다. 황혼이 지는 폐사지의 깊은 적막이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아무 것도 없음으로 인해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미륵사지의 옛 모습을 그려보며 텅 빈 절터를 하나 둘 채워나가기 시작하였다.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졌다고 하더라." 조선 정조 때의 선비인 강유진이 미륵사지를 유람하고 쓴 '와유록臥遊錄'에 적힌 내용이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되어 고려까지 성황을 누리다 조선 중기 이후 폐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미륵사는 이 때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사지를 해질녘에 찾는 이유가 있다. 특히 미륵사지는 발굴 후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폐사지의 흔적보다는 잘 정돈된 공원 같은 느낌을 준다. 대낮에 오면 옛 절터의 무상함보다는 단지 길 위를 산책하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근래에 지은 동 석탑이 다소 생경하다. 서 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비바람에 견디다 보니 몸이 상하여 치료 중에 있다. 늘씬한 당간지주 두기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 연못에 비친 붉은 노을에 선화공주가 막동이 무왕이 보았다는 그 옛날의 미륵삼존이 다시 나타날 듯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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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사지가 자리한 모산재

2. 폐사지 답사 여행의 백미, 영암사지-경남 합천
합천하면 으레 해인사를 첫 손에 꼽는다. 삼보사찰인 해인사의 명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여행자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규모와 역사성이 주는 의미 그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여행은 길 위에서 느끼는 대상과의 정서적 교감이라고 본다면 영암사지가 단연 으뜸이다.

 쌍사자석등과 금당터. 쌍사자석등은 영암사지의 핵이자 꽃이다. 이 석등으로 인해 영암사지는 더욱 빛난다.

영암사지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폐사지의 목록에는 어김없이 들어 있다. 비장의 답사처를 원하는 이들은 서부경남의 이 깊숙한 산중의 옛 절터를 찾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서금당터의 서쪽 돌거북과 모산재 전경

이제 외지인들에게 하나 둘 알려진 영암사지는 최근의 발굴로 통일신라시대의 대찰이었음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중문터의 석축과 삼층석탑, 금당터와 석등, 서금당터와 돌거북이 전부였다. 현재는 금당터 석축 아래로 넓은 절터가 새로이 발굴되었고 금당터 옆에도 최근 발굴이 이루어져 절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석등을 위해 석축을 불쑥 내었다. 통돌로 만든 무지개 돌계단이 인상적이다. 쌍사자석등 사이로 삼층석탑이 보인다.

영암사지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연 석등이다. 금당 앞이 좁은 것을 감안하여 석등이 있는 자리를 앞으로 불쑥 내고 거기에 석등을 올려놓았다. 금당으로 오르는 통돌로 만든 무지개 돌계단의 멋드러짐은 석등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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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원사지 가는 길의 서산마애불

3. 폐사지에서 시인의 하늘을 보다. 보원사지-충남 서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페사지는 그 휑한 느낌이 좋아 종종 찾는다. 가득 차 있는 절집보다 옛 흔적들만 바람에 나뒹구는 곳. 스님들은 떠나고 구름만 남은 곳. 쓸쓸함이 높아 햇살만 비추는 곳. 터만 남아 더는 비울 것이 없는 곳. 깊은 적막이 소리를 만날 뿐 아무도 찾지 않는 곳. 한 줌 바람에 손을 씻으면 그만인 곳. 그곳이 폐사지이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옛 절터의 흔적을 밟는다. 석등 하나, 탑 하나, 깨어진 부재들, 무성한 잡초들이 폐사지의 모습이었다. 애초에 무언가를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부질없는 짓이었다.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중에서


보원사지는 서산마애불 입구에서 1km 남짓 가면 된다. 용현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확 트인 널찍한 지대가 나온다.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는 상왕산과 가야산의 한 자락에 보원사지(터)가 있다. 절의 내력에 관해서는 한창 발굴 중인 결과가 나와야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겠다. 서산마애불의 본사라고도 하고, 통일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로 여겨지나 어느 하나 정확한 것은 없다. 다만 고려 초 광종에 의해 국사로 임명된 법인국사 부도와 부도비가 있어 고려 시대에는 번성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당간지주, 오층석탑, 석조, 법인국사 부도와 부도비가 폐사지에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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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은 망하고 걸작품을 남긴 곳. 고달사지-경기 여주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고 언제 산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이었던 고달사는 전성기인 고려시대에는 사방 30리가 절 땅이었고 수백 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었다고 한다. 절터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는 거대한 둥치의 나무가 있어 오고가는 길손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원종대사 혜진탑비(보물 제6호)의 귀부와 이수, 이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우리나라에 남은 부도 중에 가장 크며 고려 초기 부도의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휑한 폐사지를 멀리서 보면 간혹 눈에 띄는 석조물 외에는 이렇다 할 볼거리는 없다. 그러나 미리 실망을 할 필요는 없다. 폐사지가 주는 그 스산함이 오히려 고즈넉함으로 다가오니 한때 선풍을 떨쳤던 산사를 그리며 산책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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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지(좌). 분황사지(우)

5. 천년의 시간, 경주 폐사지 여행-황룡사지, 분황사지, 남산 용장사지, 감은사지

한때 경주를 제집 드나들 듯 번질나게 간 적이 있었다. 전공이 역사인지라 당시만 해도 문화유산 답사를 위주로 하는 여행이었다. 굳이 카메라에 담기보다는 우리 문화유산을 내 손과 눈길로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경주는 문화유산의 보고답게 몇 달을 두고도 다 볼 수가 없다. 그중 분황사지는 경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옛 절터이다. 늦가을 단풍이 지고 낙엽이 떨어질 때 분황사지는 가장 아름답다. 해질녘에 찾아 가면 쓸쓸히 지는 해와 더불어 절집의 고요함은 극치를 이룬다.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좌)과 감은사지 삼층석탑(우)

분황사를 나서면 수만 평의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황룡사지. 평지 사찰의 대표인 황룡사가 몽고군에 의해 불타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옛 영화는 터만 남고 아이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넓은 대지를 뛰어다닐 뿐이다. 절터 멀리 고층 아파트가 옛 절터의 무상함을 말해줄 뿐이다


남산을 가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해발 500m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산인데도 기기묘묘한 바위가 있어 예사로운 산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은 왕도 가까이 있는 이 산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였다. 신라인들의 염원이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산 곳곳에 서려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절터와 암자터가 112군데, 석불이 80개, 석탑이 61기, 석등 22기로 남산 전체가 불교문화의 보고이다. 바위면만 있으면 불상이나 심지어 탑까지 선으로 새기어 그들의 염원을 그렸다. 정일근 시인은 남산을 둘러보고 '신라인의 마음을 싣고 흘러가는 한 척의 배'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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