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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여행의 기술, 칼럼

여인숙에서 만난 어느 섬 여행자 이야기


 

여인숙에서 만난 어느 섬 여행자 이야기

-dall-lee 이용한 시인의 ≪물고기 여인숙≫, 어느 섬 여행자의 표류기


여행서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요즈음, 여행자는 그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이 많은 책들, 특히 넘치는 여행정보서 중 과연 독자들에게 유용한 책은 얼마나 될까. 여행지에서의 볼거리, 맛집 등에 대한 일률적인 소개만 넘치는 책들, 먹고 즐기는 관광 위주의 여행을 더욱 부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늘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수 사도에서, dall-lee 이용한 시인(뒷줄 왼쪽에서 일곱 번째)과 여행자(뒷줄 왼쪽에서 여덟 번째). 사진은 박씨 아저씨가 제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그리고 만남.
책 한 권이 왔다.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의 유일한 투숙객인 dall-lee 이용한 시인이 그의 <물고기 여인숙>에 여행자를 초대하였다. 그와의 만남은 작년 이맘 때였다. 일면식도 없던 그. 그의 여인숙을 가끔 기웃거리며 흔적을 남기면서 알게 되었다. 애써 인연을 만들기보다는 언젠가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작년 여름 여수 공항에서 그를 처음으로 보았고 1박 2일 동안 그와 나는 여행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왜. 그에게 섬은 어떤 곳이었을까. 낡은 쑥색 배낭을 메고 망망한 바다 너머의 섬까지 시인 홀로 흘러오게 만든 것은 어떤 상처도 역마살도 아니었다. 낯선 행성에 떨어진 느낌. 뭍의 시간보다 분명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변두리, 뭍에서 진즉에 갖다버린 순결한 가치와 느림의 미학, 원초적 풍경이 존재하는 섬이 그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고유한 섬만의 시간을 천천히 그리고 가만히 거닐어 보는 것, 바다가 읽어주는 섬이 끝내 아름답고 눈물겨웠기 때문이리라.

 

물고기 여인숙. 오지와 두메를 떠돌며 방랑하던 그는 진즉에 사라져버린 뭍에서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섬을 찾았다. 그에게 섬은 궁극의 여행지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는 곳. 죽을 때까지 떠돌아도 다 가지 못하는 곳이 섬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바다에 뜬 섬은 때로 한 척의 고깃배만 하고, 푸른 물결을 헤치고 가는 배들은 고작 물고기만 하다. 하늘에서 보면 서해안부터 남해안까지 배만 한 섬들과 물고기만 한 배들로 그득그득하다.


이용한, <프롤로그, 하늘에서 본 섬의 미학> 중에서, ≪물고기 여인숙≫


하늘에서 본 섬 풍경의 황홀함을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지옥 같은 현실이 미화되어 낙원으로 보이더라도 눈에 보이는 풍경만이라도 아름다워서 지옥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된 거라고 말한다.

 

초대. 그의 초대는 가혹했다. 4년 동안 나뭇잎처럼 표류한 섬 34곳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바쁜 여행자는 개의치 않고 그는 밤새 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품으로 벌어진 입이 이마에 닿을 무렵 그의 이야기는 멈추었다. 이튿날 밤 다시 그가 불렀다. 퀭한 눈에 잠시 놀라는 눈치였으나 그는 역시 가혹하게도 전날 못 다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쏟아지는 잠도 잊은 채 여행자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여행자가 다녀온 섬도 더러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로하며 걷다. 그의 섬 여행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의 섬 여행은 봄빛 가득한 청산도에서 시작된다. 거기에서 그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과 목적의 굴레에서 벗어나 거침없는 섬 여행자가 되었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도 섬은 그 자체로 시인의 여행 목적이 되었다. 조도에서 우연히 얻어 탄 멸치배에서 파도로 인해 200여만 원에 달하는 렌즈를 버려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관매도에서는 상술이 되어버린 관매팔경을 배로 둘러보는 대신 ‘진짜’ 관매도를 찾아 나섰다. 욕지도를 거쳐 사량도에 이르자 그는 소주 몇 잔에 취해 아예 풀밭에 드러누워 버린다. 거문도에서는 달빛에 취했고, 사도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걷기 시작하였다. 섬에 가면 누구나 감탄하는 화려한 풍경보다 그는 금일도 잘피밭의 질퍽한 삶을 이야기했고 석모도에서 사랑을 노래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갯벌의 밤게에 한눈을 팔던 그는 볼음도에서 문득 분단의 아픔을 슬퍼했다.

 

멀고 또 멀다. 그가 다녀온 섬은 최북단의 연평도에서 최남단 마라도, 최서남단 가거도, 변방의 섬 두미도, 한반도의 막내 독도까지 아우른다. 여전히 고되고 쓸쓸한 삶, 그래서 시인에게 가거도의 일몰은 아름다웠나 보다. 멀어도 인정 넘치는 해녀들의 웃음소리에 취하고 주민들이 아니라면 관심도 없을 발짱이며, 딱가리며, 옹딩이가 널려 있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만재도의 어느 민가의 다락방을 기웃거린다. 홍도에서는 유람선을 타는 대신 찾는 이 드문 깃대봉을 너머 옛 빛 그윽한 당집을 찾는 고집을 부린다. 머나 먼 섬의 변방에서 그는 불편과 단절을 즐기며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섬만의 시간으로 걸었다.


그 섬엔 문화가 흐른다. 그는 섬에서 단지 풍경만을 말하지 않았다. 섬에 고유하게 남아 있는 문화의 원형을 찾아 그는 섬으로 떠났다. 석 달 열흘을 섬에 갇혀 겨울을 나더라도 시인은 괜찮았다. 위도의 띠뱃놀이, 연평도의 풍어제, 증도의 염전, 임자도 전장포 새우 파시, 흑산도 홍어, 송이도의 앉은초분, 교동도의 토지신을 찾는 그의 섬 여행은 느리지만 옹골찬 여정이었다. 도초도에서 그는 본격적인 섬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1998년만 해도 즐비했던 초가집들과 초분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섬 문화를 기록하지 않으면 다른 섬의 문화도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절박함이 그를 섬으로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얽매이지 않았다. 기록해야 한다는 목적이 부질없음을 이내 깨닫고 섬은 그저 여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함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섬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거침없는 자유로운 섬 여행자가 되었다고 단호히 고백하게 된다.


잠시 바람이 머물다 간다. 그가 들려준 마지막 섬 여정은 제주도 가는 길목, 머나먼 추자도에서 시작된다. 여행자도 몇 해 전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선을 빌려야 들어갈 수밖에 없는 횡간도를 찾게 된다. 숨비소리를 들으며 우도의 돌담에서 그는 누구나 다 가는 관광코스를 벗어난 곳에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였다. 느릿느릿 시간을 여행하던 섬 여행자는 독도를 가만히 부르며 길고 지난했던 섬 여행을 마무리한다. 몇 번이나 독도행 배를 탔지만 단 한 차례 독도를 밟지 못했던 섬 여행자. 그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대신 섬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끝없는 표류를 지금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떠도는 물고기 여인숙은 비루하고 이따금

녹슨 지느러미를 턴다

문을 열 때마다 모래바람이 들이치는 자정을 껴안고

나는 지난 시절의 물고기를 중얼거린다.


이용한, <떠도는 물고기 여인숙> 중에서, ≪안녕 후두둑 씨≫

 

불편한 섬 여행자는 책의 말미에 와서야 친절을 베푼다. 중간 중간 섬과 배편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미안했나 보다. <천천히 걷고 싶은 섬길>, <나만의 섬 일출 일몰 명소>, <섬에서 즐기는 낭만해수욕장>, <TV도 반한 우리 섬-1박 2일, 영화 촬영지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그것이다. 마지막 블루노트에는 못 다한 이야기를 끼적거린다. 아니 표류한다.



 

☞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물고기 여인숙≫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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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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