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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섬

변방에서 신앙의 중심이 된 <흑산 성당>


 

변방에서 신앙의 중심이 된 흑산 성당

 

예리항에서 봄빛에 몸을 맡긴 채 느릿느릿 걸었다. 잔잔한 흑산도항을 따라 걷는 길은 봄빛이 가득하였다. 나른해진 갈매기들마저 꾸벅꾸벅 졸고 있다. 흑산중학교를 지나니 섬에서는 제법 호사스러운 호텔이 언덕 위로 보인다. 그 아래 낡은 조선소 풍경이 정겹다. 짧은 흙길에 빠져든 것도 잠시 언덕 너머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면소재지인 진리의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길은 비탈져 성당으로 나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 양 옆으로는 <십자가의 길14처>가 있어 경건하게 한다. 일요일이여서 그런지 성당은 신자들로 다소 붐볐다.

초대 진요한 주임신부와 제2대 추실베스텔 주임신부. 1958년 초대 진요한 주임신부와 보좌 신부, 수녀
 

제일 먼저 성당 한 편에 있는 전시관을 들렀다. 흑산도의 민속자료와 천주교 전파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념관인 <초장골 전시관>이다. 성당 설립 당시의 흑백 사진과 각종 유물이 있어 흑산도에서의 천주교 전파과정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천막 미사 봉헌. 공소가 설립되기 전인 1956년 다물도 공소 방문 당시 미사를  봉헌했던 이동식 천막이다. 

흑산성당은 정약전이 유배된 지 150년도 훨씬 더 지난 1958년에야 세워졌다. 흔히 흑산도의 천주교하면 정약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일원이었던 정약전은 신유박해 당시 황석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그러나 당시 정약전은 이미 배교한 상태였기 때문에 흑산도 천주교 전래와는 무관하다. 실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작고 예쁜 성당을 대하니 천주교를 믿다가 이곳에 유배 온 그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린다.

1957년 본당 신축 시 바다모래를 나르고 있는 신자들
 

흑산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951년경이다. 흑산도 출신 천주교 신자인 조수덕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조수덕의 전교활동으로 흑산도의 신자 수가 점차 늘어나자 조수덕의 아버지인 조준열(요셉)이 흑산도 지역을 관할하던 목포 산정동 본당의 모란신부에게 선교 전망을 알렸다.

1959년 흑산 본당 출신 수녀님들. 본당과 11개소 관할 공소 아가씨들(1958년)

 

이에 모란신부는 1952년 1월 정용관(바오르)를 전교회장으로 파견하여 사목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아울러 카톨릭 구제회로부터 흑산도 주민의 어려운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구호품을 전달하면서 신자 수는 급속하게 늘어났다.

초대 주임신부인 진요한 신부와 홍도 1구 신자들(1959년). 뒤로 홍도의 견산과 녹섬 일대가 보인다.

1958년 본당 축성 기념 사진

 

이러한 활동이 바탕이 되어 신자가 급증하자 공소로 사용되었던 가정집으로는 더 이상 미사 봉헌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1951년 8월 죽항리(대목)에 공소 건물을 건립하였고1954년에는 장도, 1956년에 심리, 1957년 사리에 공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산정동 본당에서 흑산도 지역을 담담하고 있던 브라질 신부는 1957년 흑산면의 중앙에 위치한 진리에 골롬반 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성당 부지를 마련하였다. 마침내 1958년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분리하여 흑산 본당이 설립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브라질 요한 신부가 부임하였다. 현재는 흑산 본당과 사리공소, 장도공소, 다물도공소, 대둔도의 오리공소, 홍도의 1구, 2구 공소가 있다.



 

흑산성당은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진리 35번지에 있는 광주대교구 소속 본당이다.

성당에 서면 진리해안과 흑산도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영산도, 외영산도. 뒤로 다물도와 대둔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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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소리를 만나니 바람에 손을 씻다.  김천령  (http://blog.daum.net/jong5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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