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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또 하나의 일상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말의 근원지-청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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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에서 선비천 가는 다리

어릴 적 말썽을 피우거나 하면 주위 어른들이 너나없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로 놀리곤 했다. 서러운 마음에 더 소리내어 운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ㅇㅇ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듣고 동네 친구 하나는 ㅇㅇ다리 밑의 엄마를 찾으러 간다며 집을 나가는 바람에 아이를 달래느라 식겁을 먹은 부모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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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에는 원단촌(청다리)이라는 푯말이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 머리가 굵어지자 그 다리 밑이라는 말이 아이가 나오는 위치로 어림잡기도 하였다. 사춘기가 늦은 아이는 배꼽에서 아이가 나오는 줄 알았고 조금 철이 든 아이는 엄마의 몸을 통해 아기가 나온다는 사실에 다소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고 태어나는 줄은 커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지만 어릴 때의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야기는 두려움과 놀림의 대명사였다. 이 이야기의 진원지가 바로 영주의 청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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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다리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가 있어 옛 이야기는 상상속에 있을 뿐이다. 나무다리를 복원하여 옛 이야기를 되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풍기 나들목을 벗어나 부석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소수소원에 이르게 된다. 소수서원 입구를 지나자마자 왼편에는 금성단이 있고 원단촌(청다리)이라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정류장 앞으로 다리가 놓여 있고 다리와 관련된 비가 하나 있다. 비석에는 '죽계제월교竹溪齊月橋', '康熙庚寅五月ㅇㅇ立'이라고 씌어 있다. 곧 숙종 36년인 1710년에 세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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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다리 비석

옛날 소수서원에 공부하러 온 유생들이 데리고 온 종이나 동네 처녀들과 정분이 나 아기를 낳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차마 아이를 버릴 수는 없어 처녀와 짜고 아이를 다리 밑에 버리라 일러두고 자기가 우연히 이 다리를 건너다 버려진 아이를 주워 온 것처럼 하였다. 본가에는 이 사실을 감추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며 이를 불쌍히 여겨 키우게 했다는 것이다. 유생들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다리 밑에 버렸다가 주워왔으면 이 말의 진원지가 여기란 말인가. 지금은 콘크리트다리가 놓여져 있어 옛 이야기는 상상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예전에는 나무다리가 있었다고 하니 유생들의 이야기가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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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천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이곳을 지나 낙동강으로 흐른다. 풍광이 빼어나 퇴계 이황이 죽계구곡이라 이름을 지었으며 고려 말의 문신인 안축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죽계별곡"을 지어 노래하였다.

또 다른 설은 정축지변(세조 3년 1457년) 때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영월에 있던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으나 사전밀고로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이곳 죽계제월교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때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서울로 데리고 와 키우면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청다리를 밤에 건너려면 붉은 동백꽃을 입에 물고 소꼬리를 붙들고 건너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동백꽃은 귀신이 붉은 꽃을 보고 해꼬지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소꼬리는 무서워서 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붙들고 가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찾아가지 않고 끝내 버려진 아이들의 원혼이 무서웠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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