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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소설 '태백산맥' 김범우의 집에 가다

소설 '태백산맥' 김범우의 집에 가다
- 관리 대책의 절실함을 느끼다.



소설 '태백산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갖게 된 곳이 벌교이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곳에 있었던 옛 '뗏목다리'에서 유래하였다. 보성군과 화순군 등 내륙과 연결되는 포구였던 벌교는 고흥반도, 순천, 보성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작은 포구였던 벌교는 일제시대에 고흥과 보성 일대의 물산을 실어내는 창구로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급속히 성장화였다. 1930년에 경전선이 이곳을 지나면서 벌교역이 생겼고 이곳은 그야말로 상업 중심의 신흥도시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일본인들만 500여 명 이상이 벌교에 살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상업도시 벌교는 보성읍보다 4년이나 빠른 1937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소설 속에 벌교는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실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이 읍보다 많아 왜색이 짙었으며 유입 인구가 늘어나니 돈의 활기를 좇아 벌교에도 주먹패가 생겨났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해는 이미 포구 너머로 사라졌다. 소설 속 인물인 김범우의 집이 있는 봉림리로 향했다. 매서운 바람이 홍교 위를 한 차례 쓸고 간다. 마을 입구에는 아무 흔적이 없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마을 분이 아니라면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은 끝내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김범우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아" 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십여 년 전에 무작정 찾아왔던 그 겨울, 이 집을 방문한 기억이 났다. 아니 방문이 아니라 굳게 닫힌 대문으로 인해 성벽같은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고 나온 게 전부였다. 그때는 다만 이곳을 현부잣집 혹은 김범우의 집으로 추정만 했을 뿐이었다.


이곳 마을에 사시는 오세진 옹이 안내를 자청하셨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어 이 분의 안내가 아니라면 실례를 범할 뻔 하였다. 보성군의 관광안내도에는 '김범우의 집' 이라고 안내를 하고 있지만 고택의 아랫채에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는 이의 사전 허락은 받아야 될 성싶다.
 

이 집은 원래 천석꾼으로 불리던 대지주 김병옥의 집이었다고 한다. 인근 순천에 김사천이라는 만석꾼이 있었는데, 같은 일가가 아닌가 오세진 옹이 추측하였다. 건너편 산을 깍아 낸 흙으로 갯벌을 메워 땅으로 만드는 등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이 기운 것은 이승만 시절의 토지개혁이 결정적인 원인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였다.


벌교읍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산등성이에 지은 이 집을 조정래 작가는 어린 시절 종종 찾곤 했었다. 안채의 대문 옆에 딸린 아랫채에서 작가가 친구인 막내 아들과 자주 놀았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양심적인 대지주 김사용(김범우의 아버지)의 집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성벽같은 높은 담으로 둘러쳐진 이 집은 한 눈에 봐도 예사가 아니다.사랑채, 안채, 창고, 아랫채 등 어디를 봐도 대지주의 가옥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특히 지붕의 암, 수 기와나, 옛 붉은 벽돌 등은 전통 한옥에 근대 문물이 결합된 형태로 이 집이 근대 이후 가장 번창했음을 엿볼 수 있다.


허나 이 집은 쇠락한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담장은 허물어지고 건물들은 비바람에 방치되어 을씨년스럽다. 소설 속의 회의하는 지식인이지만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김범우처럼 이곳도 허물고 퇴락한 채 관광지로서의 강요를 받고 있다. 최근 보성군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문화재로 관리하고자 하나 매입 보상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모양이다. 매입하여 새로운 문화재로 관리하는 것도 의미 있겠으나 박제화된 번듯한 복원보다는 일부 훼손된 부분의 개보수로 소설 속 김범우의 집으로 다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박제화된 복원은 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문학적 상상력은 고갈시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