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집 기행

고향 단풍놀이에 신난 아이들

고향 단풍놀이에 신난 아이들
- 시제를 드리러 고향을 가다


"자네, 본이 어떻게 되는가." "예, 안동 김가입니다." 어릴 적 친구집에 놀러 가서 어르신들께 큰 절을 올리고 나면 제일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유난히 강한 서부경남의 지역적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들입니다. 시조, 중시조가 어떻게 되며 몇 세손인지를 꼭 확인받고 나서야 친구와 놀 수 있었습니다.


'좌안동, 우함양'으로 불릴 정도로 서부경남의 함양, 산청, 거창, 함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향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도 유교적 전통이 강하여 아직도 장례 때 옛 상복을 입고 상여를 맨 상두꾼들이 상엿소리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영화 '학생부군신위'를 고향에서 촬영할 정도였습니다.


안동 장씨, 파평 윤씨, 김해 허씨, 상산 김씨, 안동 김씨가 제각기 산기슭에 마을마다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팔자 걸음으로 마을을 오가는 노인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 시제를 드리러 고향을 찾았습니다. 장가를 들기 전만 해도 매번 빠졌지만 아이가 생긴 후 마음가짐이 달라졌습니다. 조상을 모신다는 여러 절차가 까다롭게만 느껴졌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릴적만 해도 묘에서 지내는 '묘사'가 있었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이 대부분 돌아가신 요즈음은 객지에 있는 바쁜 친지들로 인해 묘사를 시사로 돌려 재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어릴적 수업이 끝나자마자 묘사를 지내는 산소로 뛰어가 줄을 서곤 했습니다. 묘사를 지내고 난 후 아이들에게 떡과 음식을 나눠 주었기 때문입니다.


회암정回巖亭.
증조부께서 물 맑은 계곡가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물이 바위를 휘감아 도는 곳이라 하여 '맷돌바위'라는 마을 이름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멀리 황매산 자락의 두 갈래 물줄기가 모이는 곳에 자리한 회암정은 언제나 저의 로망이었습니다. 안동에서 1년 여 동안 침묵에 빠져있을 때 바깥 세상에 나가면 따뜻한 내 고향 회암정 계곡에 집을 짓고 깊이 침잠하리라 다짐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회암정에 집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전날은 대종 시사였고 오늘은 소종의 시사입니다. 대개는 남자 혼자 오는 경우가 있으나 유사를 맡은 집에서는 며느리들도 함께 와서 정성을 보입니다.


팔순을 넘기신 집안의 아지매들도 자식들의 부축을 받아 구부정한 허리로 힘겹게 시사를 모시러 왔습니다. 우리같은 젊은 사람들이야 바쁜 일을 핑계로 빠지기도 하지만 어르신들은 만사를 제끼고 조상님 모시러 빠짐없이 참석하십니다. 


이번 시제에는 아이들도 몇 명 왔습니다. 촌수가 차이가 나다 보니 서로 면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처음에는 서먹해 하더니만 이내 자기들끼리 잘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가까이는 사촌에서 십촌이 넘는 촌수까지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아이답게 어울려 뛰어 놉니다.


 
그들이 맨처음 한 놀이는 회암정을 휘감아 도는 게류 위의 '다리 건너기' 였습니다. 한 아이가 다리 입구를 지키고 나머지 아이들이 줄을 서서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기면 다리를 통과하고 지면 다시 제일 뒤로 가는 놀이였습니다. 어찌나 재미있어 보이는지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바람을 부르고 바람을 맞이하는 풍호대의 암반 위는 아이들이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혹여 벼랑 아래로 떨어질까봐 계곡 옆 논으로 아이들을 몰았습니다. 이제는 막대를 하나씩 들더니 칼싸움을 시작합니다. 쫓고 쫓기는 아이들의 쾌활한 소리가 잔뜩 찌푸린 하늘을 가릅니다.


 
그것도 잠시 아이들은 볏짚을 모아둔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볏짚이 차곡 차곡 층을 이루며 쌓여 있어 미끄럼 타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큰 아이는 용감히 몸을 날리지만 꼬마 아이들은 무서워 부러운 눈으로 그저 바라 볼 뿐입니다.


시제 중간의 음복 시간을 활용하여 아이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시제가 끝난 후 회암정 뒤의 계곡을 찾았습니다. 이곳에는 길이가 10m 넘는 암반을 타고 흐르는 실폭포가 있습니다. 고향에 올 때 간혹 찾는 저만의 장소입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위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집채만한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가 앙증맞습니다.


아이가 낙엽을 손에 한 웅컴 지더니 허공을 향해 날립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조상님 덕분에 아이들이 신난 하루였습니다. 고향의 땅을 마음대로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나라 교육도 언젠가 그러하리라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