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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여행/여행의 기술, 칼럼

색다르게 시도한 여행 기획, 과연 반응은>

 

 

 

 

 

색다르게 시도한 여행 기획, 과연 반응은?

- 조선 선비들의 답사일번지, 원학동 인문학 기행에 부쳐

 

 월성계곡 사선대는 원학동에서도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이 정도면 시쳇말로 '자뻑'이다. 내가 이 글을 꼭 써야한다면 언론기사처럼 무미건조한 글은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중요한 건 내가 기획하고 진행한 사업을 내가 써야 한다는 것. 어쩌면 자칫 칭찬 일변도로 흐를 수 있어 적이 부담된다는 것이다. 다만, 조금은 색다른 기행이었다고 나름의 궁색한 변명을 하고 싶을 뿐….

지난 주말 6일(토)에 경남 거창을 다녀왔다. 혼자 떠난 여행이 아닌 45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닌 인문학 기행이었다. 그것도 내가 기획을 한 행사였으니 이제부터 '자뻑'은 시작된다. 그동안 기행이나 답사의 강사나 해설자로 나선 것은 꽤 많았지만 직접 기획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기행을 처음 머릿속에 그린 건 3월경이었다. 최석기(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조선 선비들의 답사일번지> 책 출간을 앞두고 저자와 함께하는 거창 원학동 일대의 인문학 기행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4월 9일쯤 이홍기 거창 군수를 만나면서 가시화되었고 마침내 4월 말에 기획을 해서 5월 중순에 참가자 모집을 시작했다. 사실 요즈음 기관이나 단체에서 기행이나 답사를 워낙 많이 열고 있어 참가자 모집이 가장 어려우리라 예상했었다. 우선 페이스북으로 이 난관을 돌파하려 했다. 이벤트 페이지를 만들고 페친들을 소집해서 신청을 받았다.

놀랍게도 하루만에 10여 명이 참가 신청을 했다. 다음에는 지역 언론이었다. 사실 전국 단위로 참가자 모집을 했지만 현실은 경남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일주일 만에 참가자 45명이 모집 완료되는 기적(?)이 발생했다. 아니, 대기자까지 생길 정도였다. 최종 집계해 보니 신청자가 54명이었다. 창원, 김해, 진주, 거창, 산청 등 경남 각지에서 모두 45명이 참석했다.


 영승 마을 사락정에서의 전정규 후손과 최석기 교수


다음으론 기행의 내용이 고민이었다. 먼저 기행 스타일을 짜 봤다.

내 여행 스타일을 접목하되, 단체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에서 고민은 시작됐다. 최근에 봇물처럼 터지고 있는 인문학 기행. 이런 상황에서 어떤 여행을 기획할 것인가, 가 관건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차별화가 필요했다. 여행전문가가 기획을 한다는 안팎의 기대도 부담이 되긴 했다. 각고 끝에 내린 결론은 참가자는 지역에서 모집하고 현지 주민들이 기행에 적극 참여하는 인문학 기행으로 콘셉트를 잡았다

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 그러기 전에 먼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탐방지인 '원학동'에 대해 잠시 소개해 보겠다. 원학동은 지금의 경남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로, 이황, 조식, 임훈, 김창흡, 이건창 등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찾았던 남도 제일의 명승이었다. 기행 일정은 원학동의 관문인 마리면 영승 마을에서 출발하여 진동암, 동계 정온 고택, 수승대, 구연서원, 갈계 마을, 갈계 숲, 강선대, 사선대 등 원학동 일대의 주요 명승을 탐방하는 것으로 잡았다.

문제는 이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코스라는 것이다. 이 코스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내용을 차별화할 것인가. 고민은 시작됐다. 더운 날씨도 고려해야 했다. 적어도 참가자들이 땡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고생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시간대별 햇빛의 각도를 계산하고 동선을 잡았다. 그리고 각 코스마다 현지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은 깊어졌다. 코스의 순서는 말 그대로 '점입가경' 방식이다.

처음엔 '이런 곳이구나!'에서 그 다음엔 '음, 이런 곳도 있구나!'로, 시간이 지날수록 '아, 이런 곳이 있다니…'로 감정을 점점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동선을 잡는 것. 영승 마을과 진동암이 서막이라면, 진동암, 동계 고택에서 서서히 감정이 고조되어, 수승대와 구연서원에서 절정으로 치닫다가 갈계 마을, 갈계 숲, 강선대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사선대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식이었다. 

일단 코스를 정한 뒤에는 참가자들에게 대략적인 일정만 공개했고, 상세한 것은 행사 당일까지 철저하게 보안(?)에 부쳤다. 긴장과 설렘이 없는 여행은 처음부터 잘못 꿴 단추처럼 너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동암에서 원학동 일대를 설명하고 있는 최석기 교수와 기행 참가자들

 

그리고 인문학 기행은 시작됐다. 어떤 색다른 기행이 되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

첫 탐방은 마리면 영승 마을 사락정(四樂亭)이었다. '사락'은 퇴계 이황이 이 마을에 우거하던 장인 권질의 부탁을 받고 마을 사람 전식이 시냇가에 지은 정자에 붙여준 이름이다. 사락정은 평소에는 굳게 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 없었는데, 인문학 기행 사전답사 때 마을을 찾아 수소문해서 정자를 관리하고 있는 후손 전정규씨를 만나서 행사 당일 문을 열 수 있었다. 전정규씨의 인사와 마을 이야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었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 시원한 정자 마루에서 최 교수의 해설을 들을 수 있었으니 첫 단추를 잘 꿴 셈이다.

다음으론 '원학동(猿鶴洞)' 바위 각자가 있는 진동암에서 원학동 일대를 가늠해 보고 본격적으로 탐방에 나섰다. 동계 정온 고택을 들렀을 때에는 오전 11시경이었다. 동계 정온은 이조참판, 대사간, 대제학을 지낸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영창대군이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렸고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결을 시도했던 인물로 낙향한 뒤 인근 모리재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동계 고택에서는 정완수 종손이 참가자들을 환영했다. 사전에 종손과 협의하여 사랑채를 개방해서, 참가자들은 500년 된 고택의 사랑채에 둘러앉아 동계 선생의 충절을 듣고 사랑채 안팎에 걸린 현판과 글씨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 깊은 체험을 했다.


 동계 고택의 정려문

 동계 고택 사랑채에서 최석기 교수의 해설을 듣고 있는 참가자들

 

이윽고 점심시간. 원학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승대 인근 식당에서 거창에서 난 농산물로 차려진 한식을 먹었다. 나중 사선대에서는 고로쇠 막걸리까지 곁들였으니 지역의 농산물을 맛본 참가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수승대에서는 위천 시냇가를 가운데에 두고 요수정, 거북바위, 구연서원 등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동선을 잡았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를 건너 울울한 솔숲을 거닐다 포인트마다 쉬며 최 교수의 해설을 들었다. 저 멀리 거북이를 쏙 빼닮은 바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너럭바위가 1차 포인트, 옛사람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요수정이 2차 포인트, 숱한 명사들의 글귀가 새겨진 거북바위와 하얀 반석이 으뜸인 계곡이 3차 포인트, 짙푸른 계곡물과 한 폭의 그림 같은 요수정을 내려다보는 거북바위 위가 4차 포인트, 깊이 숨은 구연서원과 관수루가 마지막 포인트였다.


 수승대 요수정 전경

 

수승대는 경관이 워낙 아름다운데다 당대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과 강호의 고수 갈천 임훈의 이야기가 서려 있어 더욱 명소가 되었다.

1543년 1월, 장인 권질의 회갑연을 맞아 원학동 영승 마을을 찾은 이황은 수승대로 가서 임훈과 신권을 만날 계획이었으나 급한 일로 조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황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기다리고 있던 임훈과 신권에게 '수송대(愁送臺)'라는 원래 이름을 '수승대(搜勝臺)'로 바꿔 시 한 수를 보낸다. 신권은 이황이 보내온 수승대라는 새로운 이름에 매우 기뻐하며 그를 만나 회포를 풀지 못한 서운함을 시로 지었다. 그러나 임훈은 이황이 비록 수송대라는 옛 이름의 '송(送)'자가 전아하지 못하다고 바꾸었으나 수백 년 동안 전래된 고사가 있는 지명을 임의로 바꾼 것을 선뜻 수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황이 찾아와 함께 노닐다가 늦은 봄에 떠난다면, 봄을 보내기도 시름일 뿐 아니라 그대를 보내기도 시름이라'며 '송(送)'의 뜻을 풀이해 알려주고 이황이 수승대로 이름을 바꾼 것이 잘못되었음을 넌지시 상기시켰다. 이황이 직접 와서 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점잖게 '수송(愁送)'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깨우쳐 주고,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이황과 강호의 고수 임훈의 미묘한 갈등이 드러난 것이다. 이황이 수승대로 이름을 바꾸고 시를 한 수 지은 이후,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수승대를 찾은 뒷사람들이 많은 시를 지어 남겼다. 이로 인해 수승대 일대는 풍부한 스토리와 빼어난 시문들로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수승대 거북바위에 새겨진 퇴계 이황과 갈천 임훈의 시

 


 구연서원 관수루에서의 거창국악연구회의 전통 공연

 

이날 기행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수승대에서의 마지막은 구연서원 관수루였다. 관수루에서는 거창국악연구회의 유금순 대표가 단소곡, 청성곡, 해금산조, 대금산조 등을 연주해 참가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한편, 거창군에서도 이홍기 거창군수를 대신하여 이창조 산업창조과장 등 직원들이 참석하여 거창 방문을 환영하고 자리를 함께했다. 요수 신권의 후손인 신용훈씨도 참석해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음 코스는 갈천 임훈의 생가가 있는 갈계 마을. 갈계 마을에선 갈천 임훈의 후손인 임무창 문중회장과 후손들이 참석하여 선조들과 유적,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어 인문학 기행을 한층 풍부하게 했다. 또한 마지막 탐방지인 사선대에서는 참가자 중 1명이 시조창을 하여 옛 선비들의 풍류를 되살려 참가자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사선대의 본래 이름은 송대(松臺)였다. 참가자들은 책에 실린 18세기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과 김희성의 <안음송대> 그림을 통해 사선대의 옛 모습을 오늘의 모습과 비교해보곤 그 변함없는 수려한 풍광에 감탄했다.


▲ 갈천 임훈 고택 최석기 교수(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갈천 임훈의 임무창 문중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후손들

 

이로써 모든 기행은 끝났다.

"물을 보고, 산을 보고, 옛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는 남명 조식의 글을 기치로 진행된 이번 인문학 기행은 명소마다 이어진 최석기 교수의 깊이 있는 해설과 거창의 현지 주민들이 함께함으로써 단지 풍경만을 보고 오거나 외부인의 시선에서 그 지역을 보고 돌아가는 기존의 여행과는 달리, 거창의 문화와 역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기행이었다고 참가자들은 평가했다.

 


 18세기 김희성이 그린 사선대(안음송대) 옛 그림,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는 풍경이다.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조선의 선비들이 현실세계에서 찾은 무릉도원, 원학동
조선 시대 선비들이 무릉도원처럼 이상향으로 여긴 영호남 제일의 명승은 경상도 '안의삼동安義三洞'이었다. 안의삼동은 안의현에 속한 세 동천洞天인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원학동은 가장 빼어난 명승으로 예부터 당대의 내로라하는 수많은 문인과 선비 들이 찾던 곳이었다. 원학동은 현재 경남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로, 진동암, 동계 정온 고택, 구연동, 수승대(국가지정 명승 제53호), 임훈 고택, 갈천동, 용암정(국가지정 명승 제88호), 강선대, 모리동, 금원산, 분설담, 사선대 등의 명소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행은 필자가 기획한 경상대학교출판부의 ‘지앤유 북로드-원학동 인문학 기행’에 대한 단상을 적은 글이다. 지역민이 참가하고 현지 주민들과 함께한 대학출판부의 색다른 기행을 기획했으나 어느 정도 충족시켰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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