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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빨치산 혼령 만난 푸른 눈 스님

 

 

 

 

 빨치산 혼령 만난 '푸른 눈' 스님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 25> 산중의 비경, 상선암

 

 

 상선암

ⓒ 김종길

 


"불이야!"

일체중생이 잠든 한밤중의 지리산 천은사. 느닷없는 외침과 함께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놀란 천은사의 대중들은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절 아랫마을도 소란스러워졌다. 마을 위 절에서 대낮처럼 환한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도 절로 향했다. 불길은 보광전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근데 활활 타오른 건 불길이 아니라 강한 빛줄기였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동요하며 다가서자 스님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불길은 스님의 몸에서 뿜어 나온 빛이요."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이처럼 밝은 빛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빛을 뿜어낸 스님은 과연 누구일까. 절집은 순식간에 저잣거리처럼 왁자지껄했다. 이윽고 법당에서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나왔다.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얼마 전에 절에 들어와서 아침저녁으로 나무만 하던 땔나무꾼이었다. 설마하니 그의 몸에서 빛이 났을까. 사람들은 갸우뚱했지만 절의 스님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합장을 하는 걸 보고서야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다. 이 불가사의한 광경 앞에서 사람들은 한참동안 넋을 잃었고, 얼마 후 더없이 편안하고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수월 스님이었다. 수월 스님이 방광(수행자의 몸이나 성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스승 경허 선사와 함께 있던 천장암에서 첫 방광을 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한낱 땔나무꾼으로만 여겼다. 천장암에서의 방광 이후 깨달음을 얻은 수월 스님은 금강산에서 보림(깨달은 뒤에 더욱 갈고 닦는 수행법)을 한 후 지리산으로 행각을 했고 땔나무꾼 모습을 하고 천은사로 들어갔다.

천은사에 와서 수월은 자신을 감춘 채 스님 행세를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산에 들어가 땔나무를 해 나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방광으로 그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되자 천은사 대중들은 수월 스님을 상선암 조실로 모셨다.

수월 스님은 하안거가 끝나자 종석대 아래 우번대로 가서 수행했고, 그곳에서 또다시 방광을 하게 된다. 수행이 높은 고승들이 방광을 했다는 이야기는 더러 전해지지만 수월 스님처럼 한 사람이 세 번을 방광한 것은 거의 드물 정도로 경이로운 일이다. 이때가 수월 스님의 나이 마흔둘이 되던 1896년이었다.

산중의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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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절터의 전나무
ⓒ 김종길

 


지리산 서쪽 끝 봉우리인 종석대 아래에는 우번대라는 지리 10대가 있고, 그 아래에 오랜 옛날부터 산중의 비경으로 불리는 상선암이 있다. 지금이야 지리산을 관통하는 도로에서 산길을 따라 얼마 정도 오르면 되지만, 예전에는 천은사에서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했다.

천은사에서 성삼재 가는 구불구불 고갯길. 계곡으로 크게 휘어진 길모퉁이에 상선암 가는 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암자로 가는 유일한 이정표라고는 글자마저 지워진, 손바닥만 한 하얀 입간판 하나와 잡풀에 가려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시멘트 계단이 전부다.

"지리산에 이런 곳도 있군요. 아름드리나무와 오솔길의 매력이 등산로와는 또 다른 매력인 것 같네요. 정말 멋집니다."

숲속에 들어섰을 때 동행했던 월간 <마운틴> 강성구 기자는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계곡을 가로질러 산길을 오르자 이내 절터로 보이는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나온 햇살은 절터 여기저기를 골고루 그리고 부드럽게 비췄다.

땅은 평평하니 제법 널찍해 안온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기와조각과 일부 무너졌지만 아직도 건재를 과시하는 돌 축대는 옛 절터의 영화를 드러내는 듯 뚜렷했고, 그 옛날 절을 세웠을 때 심었을 전나무가 절터 사방으로 장하게 자라고 있어 신비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절터를 가만히 몇 번이고 거닐다 상선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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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자의 한 평 텃밭
ⓒ 김종길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저 멀리 허공에 매달린 듯, 높은 축대 위의 암자 마당 끝에 선 스님 한 분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쑥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어둑한 숲과는 달리 암자에는 햇살이 넘쳤다. 약간 간격을 두고 잇달아 있는 두 채의 암자 건물은 ㄱ자 모양이다. 특히 왼쪽의 상선암 현판이 걸린 법당 건물은 이름 그대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절로 풍겼다. 마치 사천왕상처럼 족히 수백 년은 됐을 커다란 나무는 왼쪽에서, 거대한 바위는 오른쪽에서 법당을 지키고 있었다.

"스님 뵈러 왔지요."

활짝 웃으며 합장을 하자….

"허, 참…" 하며 스님이 마주 합장을 한다. 요사채 축담에 배낭을 내려놓고 몇 마디 주고받자 잠시 경계하던 스님이 암자 안내를 자청한다. 상선암은 구들을 새로 놓고 수리 중이었다. 암자치고는 제법 큰 건물이었다. 기둥과 서까래, 주춧돌 등의 건물 부재들을 보니 건물을 지을 때 상당히 공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부엌의 아궁이에는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부엌으로 난 방문을 스님이 열었다. 갑자기 앞이 환해지더니 초록빛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산의 능선들이 물결치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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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佛佛佛...
ⓒ 김종길

 


"佛佛佛佛"

문짝 창호에 스님이 썼다는 글씨다. '불불불불' 방문 아래위로 총 여덟 글자다.

"한때는 대중들이 수십 명이 됐던 모양입니다."

진명 스님은 얼마 전 이곳 상선암에 왔다고 했다. 상선암에는 진명 스님과 한 분의 스님이 더 머무르고 있다. 여름 세 번을 나고 나면 또 어디론가 가지 않겠느냐는 스님의 말은 담담했다. 허기야 붓다 당시에는 승려가 한 곳에 3일을 머물지 않았다고 했다.

토굴에서의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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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선암
ⓒ 김종길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저쪽 토굴로 갑시다. 모처럼 제가 차 한잔 대접하지요. 사람들을 토굴로 모신 적은 처음입니다."

스님이 보여준 호의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절에서 외따로 떨어진 산중암자, 그 암자에서도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 수행자만의 공간인 토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순간 머릿속이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토굴에는 물이 따로 나오지 않아 차를 마시려면 암자에서 물을 떠가야 했다. 스님이 앞서고 강 기자가 물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줄레줄레 뒤따랐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토굴로 간다. 선들선들 바람은 산들거렸고 햇빛은 초록의 잎에 강하게 부딪혔다.

"이제부터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앞서가던 스님이 주의를 줬으나 제일 뒤에 따르던 내가 그 말을 놓치는 바람에 강 기자가 중간에서 말을 한 번 더 전달해야 했다. 카메라 렌즈에 캡을 씌웠다. 토굴은 말 그대로 흙으로 쌓은 소박한 집이었다. 아니, 집이라기보다는 조금 고급스럽게(?) 지은 움막에 불과했다.

토굴 바깥을 빙 둘러 뼈대를 세운 나무틀에는 겨울 동안 삭풍을 막았을 비닐 조각이 여기저기서 바람에 나부꼈다. 벽이 유독 두꺼워서인지 토굴 안은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다 낡은 책상 하나와 그 위에 놓인 불경 한 권, 목탁, 초, 가사를 벗어놓은 횃대가 살림의 전부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 허물어져도 아무런 원망이 없을 무소유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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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선암
ⓒ 김종길

 


토굴의 좁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스님은 차를 달이고, 나는 햇빛에 번득거리는 나뭇잎을 응시했다.

"이런 토굴에서 공부를 하면 어떤 느낌일까요?"

내 말에 스님은 기쁜 얼굴빛으로 말씀을 이어갔다.

"공부에 대한 질문, 참으로 오랜만인 듯합니다. (…) 요즘은 사유가 없는 시대인 것 같아요…."

진명 스님은 서구에서는 불교와 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는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있는 현실을 염려했다.

벽안의 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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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굴 가는 길
ⓒ 김종길

 


"아 참, 현각 스님이라는 분 아시죠. 그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을 나온 푸른 눈의 스님 말이에요. 이곳 토굴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더군요."

현각 스님이 상선암에서 수행을 한 것은 1998년 겨울이었다. '벽안의 구도자'로 불리던 현각 스님은 예일대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하버드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던 수재였으나 달라이 라마, 틱낫한과 더불어 '4대 생불'로 불리던 숭산(1927~2004) 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지금은 한국 불교를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푸른 눈의 현각 스님은 1998년 11월 말부터 100일 동안 상선암 옆 이곳 토굴에서 수행했다. 미국의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를 하느라고 수행을 게을리 해서 다시 한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안거에 맞춰 혼자 토굴생활을 한 것이다. 토굴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고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해야 했다. 100일 동안 솔잎가루와 약간의 과일만 먹으면서 묵언수행을 했다. 하루 세 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매일 1300 배를 하며 '신묘장구대다라니' 염불수행을 했다고 한다. 이때 현각 스님은 신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토굴에서 기도한 지 이틀가량 지났을 때, 마음은 점점 맑아졌다. 그런데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할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환청이라 여겼는데, 차츰 이상한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면 지나가는 바람밖에 없더란다. 사나흘이 지나자 이 소리는 점차 울음소리, 비명소리로 분명해졌다. 그는 무서웠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쭈뼛쭈뼛 곤두섰다. 그렇게 3주일이 지나고 기도한 지 22일째 되던 날, 한순간에 그 소리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내 마음도 평화로워졌다.

수행이 끝나고 당시 상선암 주지였던 지인 스님으로부터 지리산의 빨치산 이야기를 듣게 됐을 때 지리산과 빨치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현각 스님은 피로 얼룩진 지리산의 역사를 듣고 너무나 놀라게 된다. 마침 옆에 있던 화엄사 스님 한 분이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누군가 열심히 염불을 해주면 그들의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는 말을 하게 된다. 현각 스님은 자신의 염불기도가 빨치산 영혼들의 한을 풀어주는 신비로운 일을 체험한 것이다.

상선암에서의 그의 철저한 수행생활은 천은사 스님들에게도 자극이 됐다고 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인 스님이 한국에 와서, 그것도 지리산 깊숙한 천은사에서도 한참 떨어진 암자의 토굴에서 용맹정진한 사실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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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굴에서
ⓒ 김종길

 


스님의 법문이 하염없다. 햇빛이 토굴 앞 뜰을 비춘다. 연둣빛 잎들이 햇살에 번들거린다. 바람이 잠시 멈춘다. 시간의 오고 감도 없다. 찻잔은 비우니 채워졌고, 채우니 비워졌다.

"지리 10대 중 무착대, 서산대는 이미 사라지고 터만 남았지요. 우리나라에도 3000m가 넘는 산들이 있어야 수행하기에 좋을 것 같아요. 예전이야 지리산만 해도 충분히 깊은 수도처였지만 차가 오지 구석구석까지 들어오는 요즈음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상선암과 수월 스님
상선암은 지리산의 서쪽 종석대 아래 해발 780미터 고지에 있다. 천은사의 산내암자로 나옹 스님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세운 것이다. 상선암은 그 옛날 우번조사뿐만 아니라 경허, 수월, 진응, 용성, 용하, 호음 등 수많은 선승들이 수행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진명 스님과 다른 한 분의 스님이 있다. 수월 스님이 조실로 있을 때 입승(절에서 기강을 맡은 승려)으로 있었던 용성 스님 당시(1896년)에만 해도 대중이 서른 명쯤 되었다고 하니 지금과는 달리 그 규모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뛰어난 수행력과 방광불사로 세상을 뒤흔든 수월 스님은 마흔둘이 되던 1896년에 지리산 천은사와 상선암, 그리고 우번대에서 봄, 여름, 가을 한철을 보냈다. 수월 스님은 염불을 한번 듣고 암기 한 뒤 염송(念頌)에 몰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문자를 몰라 경전을 읽거나 쓰지는 못했지만 어떤 물음에도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수월 스님은 천수삼매를 얻은 후 평생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한 도인으로 알려졌다.

수월 스님은 젊어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1884년에 충남 서산군 천장암으로 출가하여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경허(1846~1912) 스님의 제자가 됐다. 경허 스님의 제자로는 '삼월(三月)'이라 불리는 수월(1855~1928), 혜월(1862~1937), 만공(1871~1946) 스님이 있었다. 그의 세 제자 또한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수월 스님은 금강산에서도, 지리산에서도, 두만강을 건너 생을 마친 간도에서도, 일하는 수행자로 일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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