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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로 가는 길

피안의 땅, 연기암 가는 길

 

 

 

 

굽이치는 섬진강, 피안의 땅

[김천령의 지리산 오지암자 기행㉓〕연기암 가는 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쿳다가 니카야>”

 

 

연기緣起.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변의 보리수 아래에서 가부좌를 한 채, 7일 동안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 7일이 지난 후, 붓다는 삼매에서 깨어나 밤이 끝나갈 무렵 연기의 법을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했다.

 

 

연기암 가는 길

지리산 연기암 가는 길. 온통 꽃밭이다. 꽃의 장엄, 화엄이다. 계곡 가에는 어김없이 진달래가 피어나고 바위틈에도 어김없이 진달래가 피어 있다. 올벚나무와 산벚나무는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아직은 회색의 산 빛 여기저기서 하얀 자국을 터뜨린다. 납작 엎드리면 땅에는 제비꽃 천지이다. 봄은 허공에 걸린 듯싶은가 하면, 어느새 땅바닥 나지막한 곳으로 스멀스멀 찾아들고 있었다. 낮고 낮아도 봄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높고 높아도 더 넘치는 곳도 없다.

 

 

막 꽃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산수유는 봄을 붙잡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연산홍은 붉은 발길로 암자마당 끝으로 진즉 봄 마중을 나왔다. 벚꽃과 개나리는 이미 봄의 가운데를 차지한 채 제 몸을 한껏 치장한다. 늘 변함없을 것 같던 푸른 소나무도 새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남모르게 하고 있다. 오직 봄을 서러워하는 건 붉은 목덜미를 떨군 동백꽃뿐이다.

 

 

맑은 물줄기는 여울에 부딪히며 봄소식을 계곡 너머로 전했다. 숲에서 사각거리는 푸른 대나무 잎사귀는 이곳이 늘 청정한 곳임을 넌지시 말하는 듯하다. 계곡 물소리와 댓잎 소리는 이미 법음이요 법문이다.

   

 

연기암 가는 길로 들어섰다. 암자로 가는 길은 늘 마음 한자락을 남겨두고 떠나는 길이다. 작년에는 연기암까지 부러 에둘러가는 먼 길을 택했었다. 자동차로 쌩하고 달려 금방 이를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긴장도 설렘도 없을 것 같았다. 나 스스로 암자로 가는 길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길에는 애초 주인이 없다고 했다. 비록 표지판이 생기고 그 길을 아는 이가 있더라도 길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붓다 또한 옛길을 발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길을 정비해서 사람들을 가게 했을 뿐 길 자체를 소유하지는 않았다.

 

 

세상의 이곳과 저곳을 잇는 길은 또한 내면의 이곳과 저곳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자연 떠올리게 된다. 암자로 가는 길은 더욱 그러하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 양하여 암자로 길을 가게 된다. 이 길은 세상과 등지는 길이 아니다. 세상과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세상 밖에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여 세상을 바꾸는 길인 것이다.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바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과 다름없다. 사리불이 좌선하고 있을 때에 유마거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세속적인 일상생활을 보내는 것이 바로 좌선이다.”

 

 

 

지난해 여름, <지리산 오지암자 순례>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리산 주능선 산행을 했었다. 지리산을 오른 지 3일 만에 도착한 노고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섰다. 길고 긴 화엄사 계곡을 한참이나 내려가서야 만난 연기암은 산 아래에서 차로 곧장 찾아갔던 예전의 연기암과 분명 달랐다. 예의 그 편안함도, 그 한적함도 아니었다. 적요와 깊은 침묵에 쌓인 암자는 피안의 세계 그 자체였다. 어떤 길로 갔는가에 따라 예전의 장소가 전혀 다른 장소로 다가왔던 것이다.

 

 

연기암으로 가는 길은 크게 셋이다. 지리산 능선 종주를 해서 도착하든 아니면 성삼재에서 곧장 이르든, 노고단에서 긴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서는 산길이 하나 있고, 화엄사에서 계곡 길을 따라 오르는 방법이 또 있다. 혹은 화엄사에서 숲으로 난 차도로 가는 길이 있다. 어느 길을 택하는가는 각자의 자유이겠지만 대개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면 암자를 가기 위해 노고단에서 화엄사까지의 긴 산길을 선택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연기암을 순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엄사에서 계곡을 따라 암자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는 숲길로 다시 화엄사로 돌아오는 길이다.

 

 

화엄사 입구에서 연기암까지의 계곡 길은 2km 정도이고, 숲길은 3.9km 정도이다. 계곡길이 중간 중간 폭포와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자연의 길이라면, 숲길은 청계암, 미타암, 보덕암, 내원암, 금정암, 지장암 등의 암자를 돌아볼 수 있는 순례의 길이다. 계곡의 법음과 암자의 법문을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보석 같은 길들이다. 자연석을 쌓아 잘 정비된 계곡 길은 연기암을 거쳐 노고단까지 이어지고, 구불구불 한없이 깊은 숲길은 포장길도 있지만 이따금씩 나타나는 비포장 흙길로 인해 걷는 즐거움이 배가 되는 길이다. 물론 이따금 마주치는 차량이 그 한적함을 깨뜨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매혹적인 길임에는 틀림없다.

 

 

멀리 굽이치는 섬진강, 피안의 땅

연기암이 자리한 곳은 해발 530고지. 지리산 암자치고는 그다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세상으로부터 한참이나 들어온 깊숙한 곳이다. 이곳에 서면 멀리 산자락 끝으로 구례 들판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의 굽이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아득한 정토, 피안의 세계가 강 건너 저 멀리 있는 것이다.

 

 

연기암의 건물은 마치 저 멀리 있는 섬진강을 염두에 둔 듯 전망대처럼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서 있다.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큰 암자 건물이 다소 생경스럽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아득히 먼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피안의 세계가 있다면 아마 저런 모습일 거라고 누구든 말할 것이다.

 

 

 

이렇다 할 건물이 없는 연기암에서 유독 나그네의 시선을 끄는 건물이 있다. 관음전이다. 문수전을 돌아 모퉁이 오솔길로 접어들면 한적한 산길이다. 그곳에서 바로 계곡 건너편에 검박한 관음전이 있다. 그 호젓한 분위기도 좋거니와 관음전에 서서 내려다보는 연기암 풍경이 그만이다. 부드러운 산세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몇 겹 겹쳐 암자를 둘러싸고 그 가운데에 고즈넉이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행여나 밋밋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는 미리 거두시라. 단순할 수 있는 풍경을 하늘로 장하게 뻗은 기름한 소나무 몇 그루가 일시에 바꿔버린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득함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저 멀리 정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 정토임을 넌지시 말해주는 듯하다.

 

 

 

이번에는 다시 승방 일맥당으로 가보자.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승방은 거대한 문수보살상 뒤에 살짝 숨어 있다. 이곳에선 짙푸른 소나무 가지 사이로 섬진강 물줄기를 볼 수 있다. 연기암에서 보는 섬진강 풍경 중 이곳이 으뜸이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운 듯 멀리 있는 강의 풍경은 굽이치는 산자락 물결 속에 그 근원을 깊이깊이 감추고 있다.

 

 

암자를 나와 숲길로 접어들었다. 비를 머금은 숲길은 고요로 충만하다. 이따금 지저귀는 산새소리가 아니라면 세상 따위야 쉬이 잊어버리겠다. 두 팔을 벌려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깊다. 고요를 걷는다는 건 침묵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도 잠시… 차들이 흙길을 달려 부르릉 힘겹게 올라온다. 적막과 고요는 일순 깨져버린다. 행여 연기암에 오시거들랑 제발 차는 두고 오시라.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 자신을 찾을 일이다. 연기암 가는 길은 그 자체로 연기암이다.

 

 

 

 연기암

전하는 말로는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세우기 전에 이곳에서 토굴을 짓고 가람을 세워 화엄법문을 설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암자를 복원할 때 암수막새와 청자 편, 백자 편 등이 출토되어 그 연대를 통일신라 말 이전으로 추정할 뿐이다.

 

연기암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잿더미만 남아 4백년 넘게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89년 종원 스님이 각종 전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각으로는 법성원, 지석당, 적멸당, 원응당, 일맥당, 적광전, 문수전, 관음전이 있다. 연기암에는 높이 13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문수보살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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