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

깊은 산속에서 만난 장승, 정말 신기해요!

 

 


 

 

깊은 숲속, 죽은 나무 살린 장인

- 경남 합천 황매산 모산재에서

 

아차, 싶었습니다. 처음엔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와 합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근데,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길은 더 가팔라졌습니다. 분명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으슥한 길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 걷던 산길이라 지형은 알고 있어 능선을 오르는 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경사가 심한 된비알이라서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아내만 죽도록 고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영암사지 서금당 옆 오솔길로 접어들 때만 해도 잠시 후에 만날 등산로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청량한 숲길에 흠뻑 젖어 걷다 보니 어느 새 왼쪽 등산로를 까마득히 잊고 말았습니다. 모산재는 악산이라 아래서 솔숲 길을 조금 지나면 곧장 바위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어쩐 일인지 숲길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다른 길임을 직감하고 서둘러 반대쪽 등산로를 찾았으나 허사였습니다. 산길은 낭떠러지로 이어졌습니다. 혹시나 해서 절벽 쪽으로 나아갔지만 길은 없었습니다. 다시 되돌아 나와 골짜기 깊숙한 산길을 무작정 올랐습니다.

 

 

그렇게 한참이나 올랐을 때 눈앞에 제단 터가 나타났습니다. 예전에 무속인들이 기도를 올리던 곳입니다. 황포돛대바위에서 보면 이곳은 마치 거대한 마애불이 있을 법한 곳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바위능선 아래에 지붕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언가 신비로운 것을 감추고 있는 듯합니다.

 

 

사실 이곳은 예전에 산성이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도 산성의 흔적이 제대로 남아 있습니다. 모산재 정상 인근에는 옛 황매산성 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지만 그곳에는 여염집 담장보다도 더 낮은 성의 흔적이라 대개 '애게!' 하며 반응이 시원찮습니다. 이곳은 그나마 제법 성벽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곳의 오랜 역사를 말해 줍니다. 사실 인근에 있는 악견산, 봉화산에도 옛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숨이 턱에 찰 무렵 가파른 바윗길을 겨우 빠져 나왔습니다. 땀이 분수처럼 솟기 시작했지요. 비로소 여느 등산객들이 다니는 능선 길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천하의 명당이라는 무지개 터까지 내려가서 천황재를 둘러보고 발길을 돌려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정상 가는 숲길 한쪽에는 걸음을 멈추게 하는 조각이 있습니다. 나무에 그대로 새겨진 장승 조각입니다. 물론 산 나무는 아닙니다. 죽은 소나무에 장인이 새긴 것입니다. 예전에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렸더니 이 조각을 새긴 분이 자신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강명규 씨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방송된 적도 있었답니다. 이 산 저 산 다니며 죽은 나무에 웃는 얼굴을 조각한 지 십수 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와서 보니 자신들의 사진과 작업 과정을 찍은 사진을 매달아 두었습니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부부였습니다.

 

 

깊은 산중에서 이렇게 느닷없이 조각을 보는 건 산행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죽은 나무를 살린 장인의 손길이 고맙기만 합니다.

 

 

해발 767m. 드디어 모산재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도 장승 조각은 있습니다. 벼랑 끝 죽은 소나무 두 그루에 새겨져 있습니다.

 

 

방실방실 웃는 모습에 절로 웃음을 머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도 잠시, 황포돛대의 멋진 장관을 보기 위해 벼랑 끝 바위에 섰을 때 당혹스러웠습니다. 담배꽁초 때문이었습니다.

 

 

정상부에서 조금 벗어난 후미진 곳이어서 그런지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습니다. 산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이렇게 마구 버리는 건 몰염치의 극치입니다. 모산재가 알려지면서 찾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위와 나무 틈에선 먹다 버린 쓰레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잠시 찡그리다 모산재의 수려한 풍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황포돛대바위의 멋진 풍광입니다.

 

 

날씨가 흐려서 아쉽지만 가을이면 산 아래 푸른 호수와 황금빛으로 물든 다랑이논의 풍경이 멋진 곳입니다.

 

 

여인 하나가 황포돛대바위를 밀고 있습니다. 흔들바위라고 여긴 게지요.

 

 

바위 능선을 따라 하산하면서 건너편으로 바라보는 모산재의 풍경은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합니다.

 

 

능선 곳곳에서 가지가 잘린 소나무를 목격합니다. 몇 해 전에 합천군 관계자와 산행을 한 적이 있는데, 모산재의 소나무를 손질해서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겠다고 했습니다. 마치 정원수 손질하듯 말이죠. 하도 어이가 없어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바위산에 자라는 나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되거늘 굳이 인간의 손이 미쳐야 된다는 발상 자체가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과 사물을 보는 안목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세상에 도움이 됩니다.

 

 

하여튼, 이날 세 시간 정도의 산행을 마쳤습니다. 고향 산이라 그런지 어느 산보다 애정이 많은 황매산과 모산재입니다. 모든 곳에서 그러하지만 아니 온 듯 다녀가는 것, 우리가 죽은 후에 후손들이 잘 물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산을 올라야 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