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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어쩜 이리도 제멋대로일까? 구연서원 관수루

 

 

 

어쩜 이리도 제멋대로일까? 천연덕스러움의 극치 구연서원 관수루

 

경남 거창 수승대 거북바위 옆에는 구연서원이 있다. 옛날 요수 신권 선생이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라 하고 그 주위의 흐르는 물길을 막아 보를 쌓고는 '구연'이라 했다. 구연서원은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구연재’라는 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694년(숙종 20)에 구연서원으로 개칭하여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선생을 제향하고 후에 황고 신수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구연서원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건 관수루이다. 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맹자>의 진심장구편에 '물을 보는(관수, 觀水)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비의 학문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근데 이 2층의 누각은 들어앉은 모양새부터 예사롭지 않다. 누각 옆으로 크고 펑퍼짐한 집채만 한 바위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 굳이 문이 없더라도 그 자체로 자연이 만든 문이 될 터인데 거기에 누각을 올린 것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문루는 얼핏 보면 무슨 성채의 문루 같이 위용이 대단해 보인다. 하늘로 뻗쳐올라간 처마선이 시원스러운 데다 건물 자체는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나 듬직하니 커다란 바위와 어우러진 모습이 퍽이나 자연스럽다. 게다가 바위 옆으로 이어진 돌담은 견고한 성벽을 연상케 한다.

 

 

관수루에서 또 눈길을 끄는 건 출입문이다. 태극문양을 한 출입문의 위는 평평한 데 비해 아래 문지방은 휘어진 목재를 썼다. 자연스런 멋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문지방에서 머물던 시선은 자연스레 출입문으로 쓰이는 아래층 기둥으로 향한다.

 

 

 

아래층 기둥을 보면 이 누각의 천연덕스러움에 놀라게 된다. 제멋대로 휘어져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진 구불구불한 기둥은 껍질만 대충 벗겨 그대로 썼다. 서원이라는 엄격성에 비추면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어찌하여 목수는 이 엄숙한 서원에 저렇게 제멋대로 생긴 기둥을 쓸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기둥을 쓰도록 한 서원의 주인은 또한 얼마나 대범하고도 유연한 사고의 인물인가.

 

 

특히 제일 오른쪽의 기둥은 휘어지다 못해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일 정도로 그 굽은 모양새가 심하다. 그럼에도 여느 기둥과 더불어 서원의 정문을 떠받치는 훌륭한 재목으로 당당히 함께하고 있으니 감탄이 절로 인다.

 

 

이뿐만 아니다. 관수루 아래를 지나 서원 마당으로 들어와서 다시 관수루를 돌아보면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조화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인데도 네 귀퉁이의 추녀를 떠받치는 활주가 서 있는 모습 때문이다.

 

 

왼편의 활주는 외벌대 기단 위에 기다란 돌기둥을 올린 다음 나머지를 나무 기둥으로 이었다. 이에 비해 다른 한쪽의 활주는 천연바위 위에 맞춤한 구멍을 뚫어 짧은 돌기둥을 박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원래 있는 그대로의 생김새에 약간의 변형만 주어 건물을 올렸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관수루의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관수루를 오르는 층계가 별도로 없다는 것이다. 대개 2층의 누각일 경우 아래층의 바깥이나 건물의 중간쯤에 2층으로 오르는 층계를 두게 마련인데 이곳은 아무리 둘러봐도 층계를 찾을 수 없다. 주위를 한참을 살피고 나서야 무릎을 탁 치게 되는데, 관수루를 오르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오른쪽의 너럭바위이다. 이 거대한 바위는 바깥에선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높이지만 안에서는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경사면을 따라 쉽게 오를 수 있게 되어 있다.

 

 

서원 마당에서 정강이쯤 오는 높이의 바위 끝에 발을 올리면 너럭바위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바위와 누각 사이의 틈에 팔 길이만큼 놓인 돌판을 딛뎌 관수루로 오를 수 있다. 요즘이라면 바로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거나 바위를 깎아 계단을 만들었겠지만 옛 선조들은 자연의 생김 그대로를 최대한 활용하고 인간의 힘을 최소화해서 그 자연스런 멋과 미를 유지하면서 실용적인 면까지 고려한 것이다. 이 얼마나 감탄할 일인가? 이왕이면 최근에 만든 듯한 바위에서 누각으로 이어지는 돌판을 화강암 대신 자연석이나 나무로 했으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관수루의 외양은 대충 이러하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 있다. 바로 관아재 조영석이다. 공재 윤두서와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화가 중의 한 명인 관아재는 영조가 그의 그림 솜씨를 높이 사 광해군과 세조, 숙조의 어진을 그리기를 명했으나 하찮은 기예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며 끝내 붓을 들기를 거절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관수루는 관아재가 안음 현감으로 있던 1740년에 지은 누각이다. ‘관수루’라는 누각의 이름을 그가 명명하고 <관수루기>를 지어 그 내력을 밝혔다. 지금도 그의 글과 시를 볼 수 있다.

 

 

 

서원 터에는 사적비와 요수 신권 선생을 위한 산고수장비가 남아 있다.

 

 

근래에 세운 듯한 과장된 비석들이 거북스럽다.

 

 

 

서원 마당을 거닐다 마당 구석에 있는 앙증맞은 굴뚝과 불을 밝히던 석등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구연서원 현판이 있는 건물을 돌아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갔다.

 

 

 

‘덕망이 높은 사람을 우러러 보라’는 뜻이 담긴 경앙문 좌우의 담장이 퍽이나 아름다웠다.

 

 

 

꽃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