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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경

거창의 명승, 만추의 수승대를 걷다

 

 

 

 

거창의 명승, 만추의 수승대를 걷다

 

예부터 '안의삼동'이라 하여 손꼽혀온 경승지가 있다. 화림동, 원학동, 심진동이 그것인데, 지금은 행정구역이 바뀌어 화림동은 함양 땅에, 용추계곡의 심진동과 원학동은 거창 땅에 속하게 되었다. 그중 명승 제53호로 지정된 수승대는 원학동이라는 이름보다 더 알려져 있다.

 

 

지난 2일 수승대를 찾았다. 가을이 깊지 않아서일까.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연동 마을 골목을 벗어나자 위천 강가로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황금빛을 머금고 있었다. 유학의 고장답게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있다.

 

 

수승대 일원은 거창을 대표하는 관광지라서 그런지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많은 이들이 즐기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겠으나 답사객의 입장에선 이 어수선한 풍경이 달갑지만은 않다. 위천을 가로지르는 현수교하며, 하천을 인위적으로 막아 만든 물놀이장하며 산기슭에 만든 썰매장이 생경스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년 전에 무지막지한 시멘트 길이었던 산책로를 새로이 단장했다는 점이다. 흙길에 비하면 인공적인 면은 여전하지만 돌의 표면과 제멋대로 이어진 조각들의 짜임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그래도 계곡과 바위, 노송이 어우러지는 이곳의 풍경은 이곳의 명성을 허투루 보이게는 하지 않는다. 중간 중간에 포토 존이 있어 계곡 풍광을 내려다보기에도 좋다. 원각사와 함양재를 지나면 요수정에 이른다. 함양재 담장을 따라 도는 이 길은 언제라도 조붓한 길이다. 색색 물든 나무들과 그 아래 낙엽을 밟으며 흐르는 물소리를 음악 삼아 담장 아래를 걷는 맛은 소박하지만 깊다.

 

 

벤치에 잠시 앉아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다 이내 가을에 빠져 머뭇거린다. 이곳에 서니 수승대가 가을에도 무척이나 걷기 좋은 길이라는 걸 절로 느껴진다. 지금은 이 일대를 에둘러 산기슭으로 산책로가 나 있어 가을을 만끽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겠다.

 

 

요수정에 올랐다. 계곡 건너 구연서원의 관수루와 마주하고 있는 요수정은 이 일대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곳에 서면 남실남실 흘러내리는 위천의 아름다움이 앞면 3칸의 넓은 HD급 화면으로 들어온다.

 

 

오랜 소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정자 앞을 지키고 있는데다 수승대의 명물 거북바위가 호위하듯 앞에 버티고 있다. 계곡가로는 온갖 나무들이 가을에 먼저 물들기를 뽐내고 있다.

 

 

요수정은 요수 신권 선생이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 물가에 처음 지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 뒤 수해를 입어 1805년 후손들이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요수는 신권 선생의 호이기도 하지만 《논어》<옹야>의 '요산요수'에서 그 뜻을 가져왔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하고 이곳에 은거한 요수 선생은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라 이름 지어 그 위에 단을 쌓아 나무를 심고,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만들어 ‘구연’이라 했다. ‘구연재’라는 정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동네 이름은 ‘구연동’이 되었다.

 

 

정자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너럭바위를 그대로 주춧돌로 삼았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사방에 닭다리 모양의 계자난간을 둘렀다. 추운 산간지방임을 고려하여 정자 내부에 방을 놓은 것이 특징이다.

 

 

거북바위는 계곡 중간에 떠 있다. 현수교를 건너 포토 존에서 보면 그 이름처럼 생김새가 거북과 꼭 닮았다. 바위 둘레에는 옛 시인묵객들의 글이 가득한데 그중 퇴계 이황이 수승대로 개명할 것을 제안한 오언율시가 눈에 띈다. 이 바위에는 그야말로 옛 이야기들이 주절주절 매달려 있다.

 

 

원래 이곳은 ‘수송대’라 불렸다 한다. 거창 땅이 백제의 땅이었을 때 국력이 기울대로 기운 백제의 사신이 신라에 가서 수모를 당하는 건 예사였고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냈다 하여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불리던 이름이 바뀐 것은 조선시대. 유람 차 안의삼동을 왔던 퇴계 이황이 마침 처가가 있는 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에 머물고 있다가 이곳을 찾겠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요수 신권 선생은 요수정을 정갈히 치우고 조촐한 술상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급한 왕명으로 퇴계는 발길을 돌리게 되고 대신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라(搜勝名新換 逢春景益佳)>로 시작하는 퇴계의 시에 의해 이곳은 이후 ‘수승대(搜勝臺)’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거북바위 위에는 소나무들이 곳곳에 자라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바위 위가 평평하다. 선비들이 시회를 열던 곳이기도 했다. 암구대라고도 불리는 거북바위는 예부터 이곳을 지키던 거북이가 죽어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서원 옆 효열각에는 세월의 더께가 쌓여 있다.

 

 

 

 

 

 

 

수승대는 각종 촬영지로도 이름나 있다. 근래에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이곳에서 촬영되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 바 있다. 듬직한 바위와 조촐한 정자, 맑은 물과 늙은 소나무가 그려내는 이곳의 경치는 맑고도 아름답다.

 

 

구연서원에 이르렀다. 관수루 앞에 서자 기막힌 기둥이 시선을 확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