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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다

관이 고개를 넘나들었다는 너릿재를 아시나요?

 

 

관이 고개를 넘나들었다는 너릿재를 아시나요?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

 

서늘한 공기에 선잠을 깼다. 세수를 하고 택시를 불렀다.

“걸어가도 멀지는 않은데... 인도가 없어요. 게다가 터널을 지나야 되니 걷는 것은 불가능할 게요.”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모텔 주인이 애써 말리지 않았다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걸었을 것이다.

 

택시는 쏜살같이 도로를 달리더니 어느새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터널, 뻥 뚫린 4차선 도로에선 그 옛날 험했다는 재를 볼 수 없었다.

 

▲ 2013년 5월 18일 이른 아침, 너릿재를 가다.

 

“저기 보이지요. 터널 옆 산허리로 예전 재를 넘나들던 길이 있지요. 지금이야 길이 뚫려 고개를 넘기 쉽지만 예전엔 험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큰 눈이 오면 한 달 넘게 길이 끊기기가 예사였고, 대낮에도 도적이 많았다 그래요. 오죽했으면 행실이 안 좋으면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이라고 했겠어요.”

 

너릿재에서 5․18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만 터널 옆 산기슭에 조성된 공원의 몇몇 시비에서 당시 광주의 흔적을 애써 읽을 수 있었다.(뒤에 안 사실이지만 2013년 5월 19일자 화순의 지역신문에는 5월 16일에 너릿재공원에서 5․18민주화운동 기념조형물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가졌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 너릿재공원

 

관이 고개를 넘나들었다는 너릿재

 

“그때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요. 여기 화순에서 목포까지 걸어간 부모님들이 있었지요. 혹시나 자식들이 데모에 나갈까 봐 걱정이 돼서 가봐야겠는데 계엄군에 의해 차가 모두 끊겨 버렸으니 걸어갈 수밖에요. 친구들 중 몇 명은 부모에게 끌려 이곳 화순 집까지 다시 먼 길을 걸어서 왔다가 5․18이 지나고 한참 후에나 학교에 다시 나왔었지요.”

 

5․18 당시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택시기사 황태근(51) 씨는 당시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듣기로는 저 아래 마을에서 그 당시에 많이 죽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황 씨는 끝내 말끝을 흐렸다.

 

▲ 너릿재는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길목이다.

 

광주로 넘나드는 길목인 너릿재. 5․18민주화운동 당시 화순 군민들이 도청사수를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광주로 넘어가기 전 집결했던 장소였다. 예부터 광주에서 화순으로 오거나 화순에서 광주를 가려면 너릿재를 넘어야 했다. ‘너릿재’라는 이름은, 고개로 오르는 길은 구불구불하고 가파르지만 고갯마루는 제법 널찍하고 평평해서 ‘너른 재’라는 뜻에서 왔다. 한자로는 ‘판치(板峙)’라 했다.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처형된 곳으로 '널재'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동학농민전쟁부터 한국전쟁까지 수많은 널, 즉 관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이름이 죽음과 결부되는 너릿재였을까.

 

조선시대인 1519년(중종 14) 11월에 정암 조광조도 능주 유배길에 이곳을 지나갔는데 결국 12월에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된다. 1895년에는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무더기로 처형되었고, 1907년 능주 출신의 의병장 양회일이 이끄는 부대가 화순을 점령하고 광주를 공략하려 너릿재를 넘으려 했으나 매복한 관군에게 많은 희생자를 냈고 양회일은 체포됐다.

 

어디 이뿐이랴! 1946년 8월 15일 화순탄광의 광부들이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가 미군과 경찰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곳이기도 했다. 1950년 7월에는 국민보도연맹에 얽힌 이들이 너릿재 인근에서 학살됐고, 9월에는 광주형무소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나와 너릿재를 넘어 화순읍 교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의 학살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우연의 비극이 아님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2012년 너릿재 옛길이 ‘아름다운 숲’에 선정됐다는 것이다. 아름답고도 슬픈 일이다. 아니 슬퍼서 아름다운 것인가?

 

▲ 화순터미널 뒤 대한석탄공사 주차장 한 구석에 있는 5․18 기념비 

 

10일 동안 시위를 벌인 화순 경찰서 사거리

 

이쯤에서 그칠 수는 없었다. 5․18의 흔적을 더 찾아야 했다. 화순경찰서 앞 터미널에 작은 표지석이 하나 있다는 기사의 말에 다시 택시를 돌렸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에는 새벽부터 길을 나서서 그런지 아직 아침 8시가 되지도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5․18 당시 10여 일 동안 시위를 벌였던 화순 경찰서 사거리

 

경찰서 앞 사거리는 시골의 소읍치곤 제법 번잡했다. 광주로 오가는 버스가 쉴 새 없이 터미널 앞을 지나갔다. 터미널 뒤 대한석탄공사 통근버스가 여러 대 서 있는 주차장 한 구석에서 비석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여기 화순 경찰서 사거리는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에 계엄군의 폭압과 학살에 맞서 항쟁 10일 동안 줄곧 시위를 벌인 곳으로 특히 화순탄광에서 획득한 대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트럭에 싣고 전남도청을 향해 달려갔던 현장이다.”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