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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기행

조광조 유배지, 화장실 안내문부터 달랐다?

 

 

조광조 유배지, 화장실 안내문부터 달랐다?

 

종점인 쌍봉사를 출발한 218-1번 광주행 버스는 넓은 4차선 도로를 질주했다. 이양을 지나자마자 지석천이 차창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풍광이 제법이다. 이런 풍경에 당연히 정자 하나쯤 있을 법하다. 송석정, 침수정, 부춘정, 죽수서원, 영벽정... 수려한 정자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벽정을 마지막으로 버스는 능주로 들어섰다. 불과 수십 분 만에 이양을 지나 능주에 도착한 것. 오늘은 능주에서 1박을 할 참이다.

 

종점인 쌍봉사를 출발해 광주로 가는 218-1번 버스를 타고 능주로 가다.

 

입구부터 마을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 고을이 유서 깊은 고장임을 알리듯 마을 입구에는 기와지붕을 인 거대한 일주문 같은 구조물이 떡하니 서 있었다. 삼거리에 택시회사가 있었다. 마침 기사 한 분이 휴식을 취하고 있어 조광조적려유허비를 물었더니 주유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마을길로 들어가라고 했다. 마트에서 마실 거리를 산 후에 포장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동북아지석묘연구소를 지나니 주유소가 나왔다. 조광조 선생 유배지라고 적힌 붉은 안내문이 보인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마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장대하게 뻗은 정자나무 아래로 나지막한 흙담장이 둘러쳐 있고 그 옆으로 마을 사람들의 쉼터 구실을 했을 평상 하나가 놓여 있다. 나무 아래서 잠시 다리쉼을 하며 갈 길을 가늠하느라 고개를 돌렸더니 조광조 선생 유적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적막한 유배지, 사림의 영수 조광조를 만나다

이곳에는 조광조(1482~1519) 선생이 기묘사화로 인해 유배 와서 사사당한 것을 기록한 비인 적려유허비(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가 있다. 정암 조광조는 17세에 어천(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희천에 유배와 있던 한훤당 김굉필에게서 글을 배워 사람파의 학통을 이어받게 된다.

 

 

1515년(중종 10)에 알성시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선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제학 등을 거쳐 1518년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부제학을 하면서 왕 앞에서 학문을 강의하는 등 신임을 얻은 그는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사류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기존 훈구세력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했다.

 

정암조광조선생유배지 

 

소격서 철폐, 향약 실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개혁정치에 가속을 더한 그는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을 단행하다 결국 1519년(중종 14) 11월에 훈구파의 모함을 받아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 만인 12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 후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당시 능주 목사였던 민영로가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새겼다.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록해 두고 있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다. 비신에는 앞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선생의 유배 내력을 적었다. 머릿돌은 반달 모양으로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강당 애우당

 

유배지는 적막했다. 늦은 봄날의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에 모든 것이 그늘로 숨어든 듯 텅 빈 유적지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마루에 걸터앉아 누각 안의 현판을 읽어 본다.

 

 

“누가 이 몸을 활 맞은 새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 내 스스로 말 잃은 늙은이 같은 마음으로 웃고만 있네 / 원숭이와 학이 울어대지만 난 돌아가지 못하리 / 엎어진 독 안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1519년 11월 18일 유배길을 떠난 정암은 25일 유배지인 능주에 도착했다. 유배생활 중 정암을 매일같이 찾아온 학포 양팽손에게 쓴 이 시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에는 그의 당시 심정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화장실 고장을 알리는 정성스런 글씨.

 

화장실 고장을 알리는 정성스런 글씨의 주인공, 명예관리인 오정섭 할아버지

“상수도관(上水道管) 고장(故障)으로 폐색(閉塞)하였사오니 보조화장실(輔助化粧室)을 이용(利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관리인(管理人) 백” 한자로 적은 화장실 안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참, 안내문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정성들여 쓴, 그것도 한자를 섞어 쓴 글씨는 처음이다. 조선시대 유배지로서의 문향을 드러내고 싶어서였을까.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굴까. 마루에 걸터앉아 빈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어험’하며 인기척이 났다. 모자를 눌러쓴 약간은 마른 노인 한 분이 다가왔다.

 

강당 애우당

 

“어디서 오셨습니까? 열심히 사진을 찍고 무얼 적는 걸 제가 보았습니다. 괜찮으면 책 몇 권을 주겠소.”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꼿꼿한 자세와 흐트러지지 않은 말씀에 선비의 어떤 결기가 느껴졌다.

 

화순군 문화재 명예관리인 오정섭(88) 할아버지는 매일 이곳에 들러 청소를 하거나 사람들에게 그가 직접 만든 소책자를 나눠 준다.

 

그는 애우당 뒤 한쪽 구석에 있는 광을 자물쇠로 열더니 작은 책자 두 권을 꺼내왔다. 책자 표지에는 ‘미완성의 이상주의 조광조’, ‘정암 조광조 선생과 이 고장의 문화유적’이라고 적혀 있었다. 각기 14쪽과 16쪽 정도의 요약문이었지만 조광조와 이 유적지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그대로 담긴 정성들인 소책자였다. 표지에는 ‘화순군 지정문화유적 명예관리인 오정섭’이라고 투박한 글씨로 지은이를 밝히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오정섭(88) 씨는 할아버지였다.

 

▲ 조광조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초가와 사당

 

오정섭 할아버지는 1944년부터 철도청에 근무하다 1985년 능주역장을 마지막으로 41년간의 철도원 생활을 끝내고 이곳 고향에서 향토문화에 관심을 가지며 살아왔다. 특히 이곳 정암 선생 유적지는 매일같이 들러 한번 둘러보고 간다고 했다. 문화유적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다른데 조광조 선생에 대한 흠모가 매우 깊었다. 그러다보니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곳에 들러 잡초를 뽑거나 소책자를 만들어 찾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아무런 대가 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를 보고 화순군은 지난 2003년 6월 적려유허비와 죽수서원 등 ‘화순군 문화재 명예관리인’으로 위촉했다.

 

▲ 조광조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초가

 

“일단 이곳을 찾는 분들은 남달라요. 조광조 선생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없다면 오겠어요. 큰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의 개혁정치가 성공했다면 우리나라 역사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참 안타깝지요. 그냥 휙 둘러보고 갈 곳은 아닌데... 이곳에 왔으면 적어도 선생의 삶과 사상에 대한 조금의 이해라도 하고 가야 안 되겠어요.”

 

                                    ▲ 조광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그의 눈빛은 구순을 앞두고 있는 노인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형했고 말은 꼿꼿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오정섭 할아버지의 열정은 2011년에 빛을 보게 된다. 한국문화원연합회 전남도지회 주관의 향토문화공모전에서 ‘능주목(牧)의 향토문화 변천사’를 출품해 전남향토문화상 본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앞면)

 

                                     ▲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뒷면)

 

정암 선생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현판을 읽고 건물을 다시 둘러보는데 유허비 양쪽에 서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이상하게도 은행나무에는 무성해야 할 잎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다. 은행나무는 죽어 있었다. 3년 전 농약을 잘못 쳐서 고사했다며 오정섭 할아버지는 안타까워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선비가 사약을 마시고 생을 달리하더니 오늘에는 선비의 나무가 농약을 먹고 생명을 다했다. 참으로 우연치고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 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비각

 

 

흔히 조광조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지만 너무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진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역사는 기득권 세력이 스스로 물러서는 법은 결코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에 이르러 문묘에 배향되었다.

 

 

뒷날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며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의 한 사람으로 그를 꼽았다.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을까”

 

 

 

서원을 나와 지석천 물줄기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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