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집 기행

인터뷰하러 가서 머리를 깎았어요

 

 

 

 

 

여행 중 시골이발소에서 머리 깎은 사연

 

 

강골마을(보성군 득량면)을 나와 이발소를 찾았다. 전날 여수에 문상을 가서 만날 수 없었던 이발사 할아버지와 미리 연락을 해둬서인지 이발소는 일찌감치 문이 열려 있었다. 선선한 오전의 봄바람이 햇빛을 따라 이발소 깊숙이 넘나들었다. 이발사 공병학 할아버지는 이발소에 없었다. 이리저리 안을 살피고 있는데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의 60대 사내가 들어왔다. 공병학(66) 씨였다.

 

 

 

인터뷰하러 와서 이발을 하다니...

 

미리 이발을 할 거라고 말한 뒤여서 그런지 공병학 할아버지는 그다지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터뷰하러 온 사람이 이발한 건 처음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이발소가 매일 문을 열지 않아 이발하는 장면을 찍기가 어려울 것 같아 부득이하게 여행자가 직접 이발을 하게 된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동네에서 이발할 사람을 섭외할 수도 있겠으나 요즈음 워낙 이발 손님이 뜸해 쉽지는 않을 거라며 공 씨는 덧붙였다.

 

 

촬영을 하기로 했다. 아내에게 간단히 조작법을 설명해주고 묵직한 카메라를 넘겼더니 열 살 난 딸애가 찍겠단다. 여행자는 이발하며 인터뷰하고 열 살 딸애가 사진사가 되어 이발사 공병학 할아버지와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아내에게 메모를 당부했더니 한마디로 거절,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녹음을 하기로 했다. 나중에 집에 와서 확인했더니 녹음상태가 엉망, 기억에 의존해서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49년 전 1965년에 이용사로 시작, 77년도에 역전이발관 인수

 

역전이발관을 운영하는 공병학 할아버지는 올해 66세, 예당중학교를 나와서 서당을 1년 정도 다니다가 49년 전인 1965년에 처음 이발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예당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득량보다는 훨씬 큰 마을이었다. 예당에서 이발 기술을 배워 이용사 자격을 땄다. 당시에는 이발사라 안 하고 이용사라 했다. 군대에서도 이발병을 했고 72년도에 제대해서 예당에서 이발소를 친구와 얼마간 같이하다 혼자 서울로 가서 종업원 생활을 하게 된다. 뒤이어 친구를 서울로 불러올린다. 그렇게 6, 7년 정도 서울생활을 하다 득량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이곳에서 이발을 하고 있다. 77년도에 지금의 이발소를 인수하고 78년에 면허증을 따서 신고를 했다.

 

 

“내 마음대로 깎아주겠소이. 얼굴 생긴 대로 이발을 하지 뭐. 예전에는 손님이 들어오면 얼굴만 딱 보고 어떤 식으로 잘라야겠다, 바로 알았지. 요즈음은 남자들도 전부 미용실에 가는데 사람 얼굴 모양과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깎는 것 같아.”

 

공병학 할아버지는 하얀 가운을 입었다. 제일 먼저 어른 주먹만 한 비누통을 부지런히 젓기 시작했다. 거품을 내는 작업이었다. 거품이 잔뜩 묻은 붓으로 머리에 비누칠을 시작했다. 지켜보던 아내가 이유를 물었더니 스프레이를 뿌렸거나 무스를 바른 머리를 부드럽게 적셔주기 위해서란다.

 

 

손님 한 명이 와도 대여섯 명의 종업원이 붙어...

 

지금은 혼자지만 예전엔 이발소에 일하는 사람만 해도 대여섯 명이 있었다. 머리 깎는 사람 이발사부터 면도하는 사람, 세발하는(머리감기는) 사람, 안마사, 시아기(드라이)하는 사람까지 대여섯 명의 종업원들이 각자의 일을 분업해서 했다. 손님 한 명이 와도 대여섯 명의 종업원이 붙어 서비스를 했으니 손님이 왕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왕 대접을 받는다는 것쯤은 이발소를 들락거리다보면 자연 알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150원 했다던 이발료가 지금은 11000원이다. 물가를 따지면 거의 변동이 없다고 봐야겠다.

“곱슬머리구먼. 아주 좋은 머릿결을 가졌어. 옛날 아이롱 파마처럼 자연스럽구먼. 60, 70년대에는 연탄불로 데워서 곱슬머리를 만들었지.”

 

 

세면장에 있는 물뿌리개도 당시의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고 당시에는 물뿌리개 없이 수건에 적셔서 세발(머리감기)을 대신했단다. 다만 면도날을 닦는 피대(혁대)는 이발소를 인수할 때인 77년부터 있었다고 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이다. 옷을 넣는 벽장도 그렇고 전기를 바꾸는 도란스(변압기)도 여태까지 써온 예전 물건이었다.

 

 

중간 중간 딸애를 불러 사진을 확인하고 지도를 했다. 열 살 딸이 고생이다. “할아버지 얼굴이 나와야 한다. 멀리서 찍고, 렌즈 당기고. 이번에는 렌즈를 밀어봐. 할아버지 얼굴이 잘 나와야 해. 어, 잘했어. 찍은 사진 좀 보여줄래.” “오, 좋은데. 아주 좋아.” 무슨 70, 80년대 구호처럼 “아빠를 찍지 말고,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찍어”라고 외쳤다.

 

 

다시 대화는 이어졌다. 당시에 이발사를 하고 아내가 다방을 했으면 지역에서 유지 아니냐고 했더니 그냥 허허 웃기만 한다. 한창 잘 나갔던 전에는 설날이나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하루에 손님이 30명이 넘었고 새벽부터 이발을 시작해서 다음날 밤을 새는 것도 다반사였다. 지금은 손님이 일주일에 네댓 명 될까 말까 한다. 대개 마을 분들이고 전화로 연락 오면 이발을 한다.

 

 

“이발소는 참 느리게 자르는 것 같네요. 정성스럽기도 하고요.”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시계를 보더니 벌써 30분이 지났다고 했다.

 

“미용실은 손님들이 많으니까 빨리 하고 이발소는 느릿느릿 머리카락 한 올까지 신경 쓰지요. 미용실이라면 벌써 다 깎았겠지. 몇 해 전인가. 광주에 갔었는데 제법 머리를 잘 깎더라고. 몇 년을 했냐고 물었더니 13년이라고 하더구먼. 나도 머리하는 사람인데 잘 깎는다고 칭찬해줬지요.”

 

 

머리 자르기가 끝이 났다. 이번에는 혁대에 칼을 몇 번 쓱싹 문지르더니 면도를 시작한다.

“자, 끝났어요. 세발해야지."

머리를 감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등받이 없는 둥근 의자에 앉아 세면대 양쪽을 손으로 꽉 잡았다. 아내와 아이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예전이면 연탄을 사용했겠지만 지금은 1회용 가스버너로 물을 데우고 있었다. 양동이에 가득한 뜨거운 물과 세면대 수도의 차가운 물을 바가지로 섞더니 물뿌리개에 담아 머리에 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누를 칠하고 헹구기를 몇 번, 세숫대야에 물을 부어준다.

“세수하시오.”

 

 

거동이 힘든 노인 분들은 머리뿐만 아니라 세수까지 시켜준다고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그의 말대로 시아기(드라이)가 시작됐다.

“지금 50대 여자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단발머리를 모두 이곳 이발소에서 잘랐어. 다방 아가씨들의 간단한 머리카락 정도는 직접 잘라 주었지. 근데 사위들은 아무리 말해도 나한테 머리를 안 깎아. 부담스러운 게지. 대신 손자들은 가끔 오면 머리를 깎곤 해. 허허.”

 

 

일본 NHK에서도 촬영해간 역전이발관

 

아내 최수라 씨가 운영하던 다방은 우회도로가 나고 나서 사양길이 되었고, 이발소는 아이들과 학생들이 줄어들자 자연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 붙어있는 사진은 일본 NHK에서 촬영 왔을 때 우리 딸이 찍은 거라. 지난 2월 6일 문화역 행사 때였지.”

공병학 이발사가 의자에 누운 손님을 면도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물론 방송을 위해 연출된 장면이었는데 딸이 기념으로 사진에 담았던 것이다.

 

 

 

“혹시 몰라서 미용실에서 자른 모양 그대로 깎았어요. 너무 다르면 어색할 수도 있으니... 자, 다 됐어요.”

얼버무리는 그의 말에 오랜 연륜이 묻어 있었다. 미용실에서 머리 깎는 것이 마치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일률적인 구두 같다면 이발소에서 이발하는 건 일일이 손으로 작업하여 만든 수제화처럼 정성이 돋보였다.

 

 

 

옷을 입자 어제 미처 보지 못한 장난감 가게와 옛 득량역을 보러 주겠다며 이발사 할아버지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이발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그가 열어주는 장난감 가게에 들어섰다.

 

 

득량역 문화역거리는 공병학 이발사의 아들 공주빈 씨가 주도적으로 했다. 지난 2월 6일 개장식에는 일본 NHK에서 촬영을 해갔을 정도로 시골마을에선 제법 왁자지껄하게 진행됐었다. 이곳 빈 점포는 모두 이발사 할아버지의 소유로 되어 있다. 처음에 이발소, 다방에서 시작해서 하나하나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단다. 앞으로 2차, 3차 사업이 진행되면 문화역거리는 더욱 알차게 꾸며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들 공주빈 씨가 각종 술과 온갖 잡동사니도 사두었는데 앞으로 전시공간을 더 늘리면 진열할 것이란다. 아들이 모아 놓은 술병과 전시물들을 보러 가겠냐며 여행자에게 물으면서 이발사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내가 보기엔 쓰레긴데 가 볼라우.”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