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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다

발아래로 '벚꽃장' 진해 시가지가 다 보이는 이곳, 제황산공원

 

 

 

 

발아래로 ‘벚꽃장’ 진해 시가지가 다 보이는 이곳, 제황산공원

 

진해 사람들은 벚꽃 축제인 '군항제'를 '벚꽃장'이라 한다고 했던가. 참 멋들어진 말이다. 벚꽃 철이 되면 진해 시가지는 그야말로 벚꽃 천지다. 붐비는 시장만큼 붐비는 벚꽃 잔치다. 진해 시민이 18만여 명인데 벚나무가 35만 그루 정도라고 하니 시장치곤 아주 번성한 시장인 셈이다.

 

 

이런 '벚꽃장' 진해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진해 어디서도 잘 보이는 제황산공원이다. 제황산은 원래 산세가 부엉이가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부엉산'으로 불리다 해방 후 풍수지리설에 따라 '임금이 날 명당' 이라 하여 '제왕산'으로 불리다 ‘제황산’으로 잘못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높이 107m밖에 되지 않는 언덕 같은 산이지만 이곳에 오르면 진해 시가지를 사방으로 조망할 수 있다.

 

▲ 북원로터리 가는 길에서 본 중원로터리, 제황산과 진해탑, 모노레일이 보인다.

 

제황산 정상에는 러일전쟁 승전기념을 기념하여 일제가 1929년 5월 27일에 세운 탑이 있었다.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이긴 러일전쟁의 전승기념탑으로 전함을 본떠 세운 높이 34.85m의 ‘러일전쟁기념탑’이다. 당시 축하기념행사 사진을 보면 기념탑 앞에서 스모 경기를 하는 등 성대하게 행사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이를 헐고 1967년에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탑을 건립했다.

 

                        ▲ 1929년 러일전쟁기념탑 행사 사진(사진,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스모를 하는 등 행사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진해군항마을역사관에서 만난 서원보(68) 씨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당시 기념탑 공사를 시작하자, 인근 묘법사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 공사를 중지하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계속 공사를 강행했는데, 공사 현장 케이블카 사고로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멀쩡한데 유독 일본인들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진해 현동부두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실은 배가 전복돼 2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진해만 요새사령부(구 해군교육사 부지)의 영화 상영장에서 불이 나 107명의 어린이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진해의 지맥을 눌러 산신령(백발노인)이 노해서 일어난 변사로 당시 사람들은 믿었단다.

 

 

제황산공원에 세워진 진해탑은 높이 28m의 9층으로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중원로터리에서 탑이 있는 산까지는 모두 365개의 계단이 되어 있어 ‘1년 계단’으로 불린다.

 

▲ 제황산공원에 오르려면 365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에 숫자가 적혀 있다. 뒤로 보이는 진해탑

 

계단이 꽤 높아 보이지만 하나하나 수를 헤아리며 중간 중간 계단에 적힌 숫자와 확인하며 오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리가 아픈 이나 노약자는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된다. 2009년에 만들어졌다는 모노레일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20인 2량으로 40명이 탈 수 있는 겨우 1대로 운행하다 보니 평소에는 이용자가 없다가 벚꽃 시즌을 맞아 30~40분이나 대기할 정도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요금은 왕복 3000원, 편도 2000원이다.

 

▲ 진해탑의 1층과 2층은 각종 유물이 전시된 시립박물관이다.

 

‘1년 계단’을 오르고 나면 해군사관학교 1기 졸업생인 현시학 소장의 흉상이 있다. 우뚝 솟은 기념탐 정문에는 박정희의 친필이 남아 있다. 탑의 내부 1층과 2층은 진해에서 나온 각종 유물을 전시한 시립박물관이다.

 

▲ 진해탑 전망대에서 봉 중원로터리 일대

 

전망대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바깥 공원까지 이어진 긴 줄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선형 계단을 빙빙 돌아 올랐다. 철문이 굳게 닫힌 마지막 층에서 밖으로 나오자 발 아래로 진해 시가지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 진해탑 전망대에서 봉 중원로터리 일대(위)와 1920년대의 진해 시가지 사진(아래 사진,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지금과 예전의 모습이 별반 차이가 없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건 중원로터리다. 1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의 진해 시가지 사진과 너무나 흡사했다. 로터리 가운데에 수령 12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팽나무가 당시에 있었다는 것 빼고는 말이다.

 

▲ 진해항과 대죽도 풍경

 

일제는 당시 진해를 개발하면서 중원로터리와 남원로터리, 북원로터리 중심으로 도시를 계획했다. 지금도 진해 시가지의 모습은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 중원로터리가 일제의 욱일승천기를 나타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과장된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냥 도로 설계상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욱일승천기가 2차 세계대전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중원로터리가 건설된 것은 그보다 훨씬 빠른 시기며, 중원로터리가 8곳 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면 욱일승천기는 16개의 햇살을 도안한 것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일제의 흔적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력한 의지의 서로 다른 표현일 수도 있겠다.

 

 

▲ 진해역과 여좌천, 내수면환경생태공원이 보인다.

 

▲ 중원로터리와 오른쪽 위로 북원로터리가 어렴풋이 보인다.

 

전망대를 시계방향으로 돌며 진해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진해항부터 대죽도, 중원로터리, 남원로터리, 북원로터리, 저도, 관출산, 진해역, 여좌천, 장복산, 안민고개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야트막한 산이 주는 풍광에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 관출산과 저도 일대

 

▲ 진해항과 대죽도 일대

 

▲ 장복산과 왼쪽으로 마진터널, 오른쪽으로 안민고개가 멀리 보인다.

 

▲ 이 망주석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조선석 명치 43년 8월 29일"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걸로 보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날인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일'을 기념하는 기념물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망주석은 일본에 있다가 2009년에 기증 형식으로 환수하여 이곳 제황산 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 중원로터리에서 본 제황산과 진해탑

 

한참을 넋을 빼고 있다 이 천혜의 땅을 기지로 삼아 시가지를 닦은 일제와 그 땅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의 아픔을 곱씹어본다. 발아래론 온통 벚꽃이다. 벚꽃뿐만 아니라 개나리와 진달래도 아직 만발이다. 이래저래 봄은 화려하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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