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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비경

기차와 매화, 낙동강이 빚어내는 절정의 풍경, 순매원(원동매화축제)

 

 

 

 

 

 

차와 매화, 낙동강이 빚어내는 절정의 풍경, 순매원

 

 

역을 코앞에 두고 버스는 더 이상 달리지 못했다. 순매원으로 가는 도로는 이미 마비가 되어 있었다. 이럴 때 도보여행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 마련이다. 이젠 영포마을까지 8km 남짓을 걸어간 것도 아내와 딸에겐 추억으로 자리 잡았고 꼼짝달싹하지 않는 도로를 보며 아이는 기차 타고 오길 정말 잘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모처럼 여행자를 따라 나선 길에 가족들은 서서히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대체 순매원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이다지도 붙잡는단 말인가. 붐비는 걸 워낙 싫어하는 성미라 여태 이곳을 찾지 않았지만 경전선을 연재하면서 꼭 들를 수밖에 없는 곳이 되었다. 다음에 가야할 진해도 사실 처음이다. 본격 여행을 다닌 지 15년이 다 되어감에도 나의 여행의 조금은 고집스럽다.

 

 

언덕으로 난 길가로 노점들이 하나둘 보이는 것으로 보아 순매원에 다다른 모양이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고 제법 번듯한 전망데크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발 아래로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과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선 두 갈래의 철길이 강기슭으로 사라지고 하얀 매화가 철로 변에 피어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막 연둣빛을 품기 시작한 버들과 터질 듯 끝내 터뜨리고 만 벚꽃이 강변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순매원. 매화는 이미 지기 시작했는지 중간 중간 하얀빛을 잃어 불그스름했다. 희붉은 매화 밭 가운데 파란 지붕을 한 민가 한 채가 유독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강렬한 원색은 마치 꽃술처럼 다소 흐릿한 매화 밭 풍경을 일순에 전환시켰다.

 

 

매화 밭으로 뛰어들었다. 꽃이 있다면 응당 관조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꽃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그 아름다움에 흠뻑, 진창에 빠져들어야만 봄을, 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졸졸졸 흐르는 개울가 매화가 퍽이나 고요하다.

 

 

내려다보면 듬성듬성 했던 꽃들이 아래선 꽃 대궐을 이뤘다.

 

 

이곳엔 유독 젊은 커플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이 꽃의 시절임을 시위라도 하는 듯 저마다 매화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풍성한 봄을 담고 있었다.

 

 

꽃 속에 파묻히기도 하고, 알록달록 자리에 드러누워 봄날의 오후를 느긋하게 즐기기도 하고, 갖은 먹을거리에 입을 쉬지 않고 놀리기도 하고, 매화나무에 기대어 그저 멍하니 꽃잎을 보고만 있는 이들도 있다. 아이들과 강아지들은 부모의 잔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매화나무 아래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헤집으며 뛰어다닌다.

 

 

지는 매화일지언정 사진에 담으려는 사진가의 노력은 그 자체로 풍경에 녹아들고 이따금 벌이라도 날아올라치면 작은 환호를 지르기도 한다.

 

 

철조망 너머 기찻길 옆 양지바른 곳에는 봄꽃이 소리 없이 피었다. 피었다 지기를 수어 번 반복해도 누구 하나 오래도록 눈길 주는 이 없으니 외롭고 쓸쓸하다. 그리고 높다.

 

 

흰 무리의 꽃밭에 간혹 선홍의 매화가 피어 눈길을 끈다. 절정의 미를 뽐내는 홍매화는 겨우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매화 밭에선 몇 그루 안 되는 귀한 몸이지만 사람들의 온 신경을 불러 모으는 매력을 사정없이 발산한다.

 

 

매화꽃 그늘 아래 제법 너른 공터에 화가가 자리를 잡았다. 모델이 된 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그럴수록 화가의 눈은 매섭기만 하다. 

 

 

뒤쪽 언덕에는 장독대가 있다. 순매원에서도 한갓진 이곳은 찾는 이가 없어 장독들이 봄볕을 마음껏 쬐고 있었다. 늘 봐도 장독대와 매화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풍경들이다.

 

 

온통 하얗거나 붉은 매화 밭 사이의 여백을 채우는 건 젊은 커플들이다. 마치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 듯 자연스럽다.

 

 

영포마을에서 차로는 10여 분 남짓, 걸어서는 두 시간 남짓의 거리지만 이곳의 수려한 강변 풍경은 꽃이 진다고 한들 수그려들겠는가. 절정을 향해 치닫다가 멈춘 매화도 며칠 뒤면 소리 없이 지고 말겠지만 그 풍경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2004년부터 시작된 축제는 관사마을 순매원에서 매년 3월에 열리고 있다. 올해는 이미 매화가 지고 있었지만 그 명성은 그대로였다. 관사마을은 옛날 원동역 관사 터에 조성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동역을 지나 토곡산 끝자락에 낙동강을 굽어보는 마을이 관사마을이다. 도로 아래 유장한 낙동강과 철로변 사이로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 밭을 보고 있자면 그 그윽한 풍경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인근 영포마을의 원동 매화축제가 광양 매화축제에 비해 뭔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려한 풍광이 없다는 것인데 이곳 순매원에서 그 부족한 점이 메꾸어지는 듯했다. 영포마을의 산비탈 층층 매화 밭과 이곳 순매원의 수려한 경관을 합치면 섬진강변의 매화축제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절정의 풍경이다.

 

 

낙동강 변을 온통 새하얗게 물들이는 광양과 흡사한 이 풍경과 S자로 굽이치며 달리는 철길로 최근엔 한국관광공사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맘때면 전국의 사진가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산자락 끄트머리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S자 철길, 하얀 매화 밭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 땅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절정의 풍경이다. 삼랑진에서 이곳 원동역을 지나 물금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철길은 우리나라 기찻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이곳을 오가는 기차만 해도 하루에 수백 대가 넘는다. S자 철길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몸뚱어리가 긴 KTX인데, 지금은 이곳을 지나는 KTX가 크게 줄어들어 그 굽이치며 내달리는 찰나의 풍경을 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부지런히 오가는 무궁화호나 새마을호가 아쉬운 대로 강변 정취를 대신하고 있다. 

 

 

순매원에는 약 1만3058㎡(1만 평)에 조성된 100년 생 매화나무 50여 그루를 비롯해 총 8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다. 오래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심은 매화나무들이라고 한다. 순매원은 10여 년 전에 김용구, 박미정 부부가 강변에 조성한 농원이다.

 

 

유유히 흐르던 낙동강 건너편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기차도 점점 뜸해지고 KTX는 한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는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떠나야만 했다. 막 자리를 떠나려 할 즈음 KTX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급히 카메라를 꺼냈으나 이미 늦었다. 산모롱이로 기차는 이미 꼬리를 감추고 말았다. 강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저녁 순매원에 흩날린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 오른쪽 '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