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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기행

벌교 구석구석, 소설 태백산맥을 따라 걷는 시간여행

 

 

 

 

벌교 구석구석, 소설 태백산맥을 따라 걷는 시간여행

 

너른 중도 벌판의 갈대밭을 지난 진한 갯내음이 벌교역까지 불어왔다. 광장 한편에 벌교역장이 세운 비석에는 '벌교'라는 이름이 '뗏목을 엮어 만든 다리'에서 유래되었다고 적혀 있다. 역 앞 광장을 나오자마자 여자만의 보물이라 일컫는 꼬막이 길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다.

 

 

▲ 벌교역

 

4일과 9일에 열리는 벌교오일장(겨울의 진미 참꼬막이 왔어요, 벌교 오일장)을 구경하고 '소설태백산맥문학거리'로 향했다. 굳이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한때 번성했던 이 소읍에선 옛 영화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거리에 서면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의 부산했던 벌교 읍내거리를 자연 떠올리게 된다. 벌교역에서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의 집까지 걷기로 했다. 그냥 쉬엄쉬엄 걷는 데에만 30여 분은 족히 걸리니 구경이라도 제대로 할 요량이면 발걸음을 재게 놀려야 한다. 그럼에도 걸음은 옛 시간의 흐름에 맞추느라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벌교역에서 출발하여 차부 터(현 벌교우체국), 솥공장 터(현 대창기계), 보성여관(남도여관), 삼화목공소, 벌교초등학교, 벌교금융조합(현 농민상담소), 청년단 건물 터, 채동선 기념관, 채동선 생가, 자애병원(현 벌교어린이집), 송광사벌교포교당, 벌교홍교를 건너 김범우의 집까지 갔다. 다시 소화다리와 중도방죽을 지나 태백산맥문학관과 현부잣집과 소화의 집을 보면 얼추 문학기행은 끝이 나는 셈이다.

 

 

 

소화 16년인 1941년에 지었다는 삼화목공소는 2대째 50년 동안 목수 일을 해온 왕봉민(65) 씨가 사장이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뵈는 그는 남도 사내답게 구수한 노래솜씨가 일품이다.

 

▲ 삼화목공소

 

목공소 바로 옆의 보성여관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등장해 익히 알려져 있다. 소화 10년인 1935년에 지어져 현재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 복원공사를 마쳐 숙박을 할 수 있게 되어 벌교를 대표하는 명소가 될 성싶다.

 

▲ 보성여관(남도여관, 등록문화재 제132호)

 

보성여관을 지나면 '소설태백산맥문학거리'를 알리는 커다란 비가 있다. 제법 널찍한 골목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태백산맥의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소설태백산맥문학거리

 

▲ 농민상담소(옛 벌교금융조합, 등록문화재 제226호)

 

등록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된 보성 벌교 농민상담소(옛 벌교금융조합)는 얼핏 봐도 아주 견고해 보인다. 1919년에 지은 붉은 벽돌의 이 건물은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소설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서 근무해온 조합장 송기묵이 치부에도 능하고 고리대금업까지 해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 이화여대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만다. 일제강점기에 기득권을 행사했던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척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 소설 속 자애병원 자리

 

소설 속 자애병원은 현재 어린이집이다. 병원장 전명환에게는 김범우도, 안창민도, 염상구도, 최서학도, 좌익도 우익도 아닌 그저 치료해야 할 한 사람의 환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참된 의사의 모습도 끝내 해방정국은 그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가게 된다.

 

▲ 채동선 음악당

 

갑자기 골목 왼쪽이 탁 트이는가 싶더니 웅장한 건물이 나타난다. 채동선 음악당이다. 채동선 선생은 이곳 벌교에서 태어난 음악가이다.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는 가곡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는> 외에 현악 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 채동선 생가

 

그의 생가를 찾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분명 음악당 인근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길가는 이에게 물었더니 따라 오란다. 자신을 통장이라고 한 사내는 대뜸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단 세 줄, 연락처와 제석수석원 정만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안 사실이지만 생가는 골목 안쪽에 있었고 길가에는 아무런 안내문이 없었다. 우진각 지붕을 한 기다란 건물 한 채와 마당 한 편에 휑하니 놓인 우물이 전부였다.

 

▲ 벌교 홍교(보물 제304호)

 

거리의 끝에서 만난 벌교 홍교, 벌교라는 이름도 예전 이곳에 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하였다. 지금도 사용하는 이 다리는 보물 제304호로 무지개 모양의 홍교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썰물 때에는 다리의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버릴 정도로 이곳에는 바닷물이 쉼 없이 드나든다. 처음에는 뗏목다리를 놓았다가 1729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석교를 세워 1734년에 완공되었으며, 그 뒤 1737년에 다리를 다시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홍교를 건너 부용산을 되돌아보았다. 이곳에는 <부용산> 노래비가 있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라는 서정적 가사로 돼 있는 노래 ‘부용산’은 이곳 출신 박기동 시인이 1947년 24세에 요절한 누이 박영애를 추모해 지은 시다. 근데 이 노래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고 동요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안성현 작곡자가 월북하자 금지곡이 되어 버렸다.

  

▲ 소설 속 김범우의 집

 

다리를 건너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김범우의 집은 마치 성채 같았다. 어른 키 몇 곱절은 될 것 같은 훌쩍 높은 담장하며, 담장 주위로 해자처럼 도랑이 둘러쳐 있어 개미 한 마리 얼씬하기도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 소설 속 김범우의 집

 

소설 <태백산맥>에서 품격 있고 양심적인 김범우의 집으로 나오는 이곳은 원래 대지주였던 김 씨 집안 소유였다. 조정래 작가가 초등학생일 때에 이 집 대문 옆에 딸린 아래채에서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다고 한다.

 

▲ 소설 속 김범우의 집

 

지금은 비록 쇠락하여 성한 곳이 없지만 사랑채, 안채, 겹안채, 아래채, 장독대. 창고 터 등을 보면 당시의 대단했던 대지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돼지우리의 흔적은 음식 찌꺼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은 대지주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이네. 눈 볽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 어련허겄는가. 맘 쓰지 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 허허허허..."

 

 

소화다리는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다. 다리가 만들어진 것이 1931년, 그러니까 그때가 소화 6년인가 그래서 누군가 소화다리로 부르면서 다리 이름이 되어 버렸다. 이 다리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의 대격랑을 피해 가진 못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하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그 처참한 상황을 떠올리니 콘크리트 다리가 핏빛을 머금은 붉은 회색빛으로 보인다.

 

▲ 소화다리

 

중도방죽으로 나왔다. 경전선이 지나는 철길을 보니 소설 속 염상구가 떠오른다. 철다리 가운데 서서 끝까지 버티던 염상구, 결국 깡패두목 땅벌은 옛 부하의 전송 아닌 감시 속에서 고리짝만 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들고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해가 뉘엿뉘엿 철다리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여행자도 무언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서둘러 방죽을 떠났다.

 

▲ 중도방죽 철다리

 

 


 

 ▲ 현부잣집

 

▲ 태백산맥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