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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이 풍경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전날 송광사와 불일암을 둘러보고 낙안읍성 가까운 휴양림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부터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마지막 붉음을 태우는 단풍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동문인 낙풍루로 낙안읍성을 들어갔다. 이곳을 찾는 이가 대개 그렇듯, 동문에서 출발하여 임경업장군 비각, 객사, 낙민루, 동헌, 내아, 자료관, 서문, 성벽, 남문, 옥사, 대장간을 거쳐 다시 동문으로 관람 동선은 돌아오게 된다. 그 동선에 조금이라도 비켜서고 싶었는지 읍성 안 중앙 대로를 버리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두 갈래의 길은 오태석 명창의 생가로 이어졌다. 인기척을 내고 마당에 들어서자 안주인인 듯한 이가 나왔다. 이영애 선생의 제자인 김재희 씨였다. 주말에는 객사에서 공연을 하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공연이 취소되었단다.

 

 

아이를 마루에 오르라 하더니 냉큼 방에 들어가서 가야금을 내어온다. 가야금 앞에 아이를 앉히고 사랑스런 제자를 가르치듯 아리랑 한 곡조를 함께 연주한다. 아이는 신기한 듯 어색한 듯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데 선생님은 진지하다. 마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당에 들어서서 이 광경을 보고 박수를 보낸다. 아이는 여전히 쑥스럽고 선생님은 여전히 자애롭다.

 

 

오수관, 오태석 부자에서 시작되는 낙안읍성 가야금 병창은 박귀희, 정달영, 장월중선을 거쳐 오갑순, 안숙선, 강정숙, 이영애, 주영희에 이르는 계보다.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 선생으로부터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워 대성한 명인 오수관의 장남인 오태석은 유명한 국창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사사 받고 오수관과 박덕기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운 당대 가야금 병창의 최고봉이며 중시조이다.

 

 

정해진 길에서 비켜났음에도 다시 길은 중앙대로로 연결된다. 낙안군수를 지낸 임경업 장군의 선정 비각이 은행나무 아래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낙안읍성은 처음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았다가 조선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객사도 비에 젖고 있었다. 비 내리는 객사는 한층 운치가 있었다. 우산을 벗어던지고 마당에 깔린 박석에 튀기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낙안객사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다. 객사는 지방에 출장 온 관리가 흔히 머물기도 했고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두었기 때문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낙안객사는 1900년대 초까지 잘 보존되었다가 1909년 이후에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모양이 많이 변조되었으나 198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쪽 날개를 단 객사 건물은 단아한 듯 엄중하다.

 

 

객사 뒤를 돌아가니 소담한 풍경이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앙증맞은 굴뚝도 그러하거니와 담장 너머로 오랜 노거수들의 옅은 단풍이 설렌다. 붉디붉어 사람을 쉬이 지치게 만드는 그런 단풍이 아니라 은은하고 또 은은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색색 단풍이 곱기만 하다.

 

 

낙민루 옆 고목은 제법 기운차다. 나뭇잎이 생이 다해 잎이 떨어진 게 아니라 나뭇가지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떠난 듯하다. 밑동부터 튼실한 노거수의 기운은 하늘을 이고 있는 듯 장하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흔한 잔디밭에 검은 비석 하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3.1독립운동기념비다. 기단은 비를 맞아 반질반질한데 비신은 글자마저 감추고 싶은지 어둡기만 하다.

 

 

비도 바람도 거세진다. 잠시 피할 겸 자료관에 들렀다. 낙안읍성의 이모저모를 어떻게 살필 건지 이곳에서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여태까지의 이동이 시작에 불과했다면 이곳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읍성을 샅샅이 훑을 일이다.

 

 

읍성 안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오랜 가옥들이 많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건 아무래도 초가다. 기와집이야 굳이 이런 민속마을이 아니더라도 종종 볼 수 있지만 초가는 원체 보기 힘든 옛집이 되어버렸다. 초가 끝에 매달린 굴뚝과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가 옛 풍경을 넌지시 불러온다.

 

 

김대자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95호다. 건물의 앞 중앙에 마루를 둔 한 일자 모양의 4칸 전퇴집이다. 특이한 것은 중부지방의 오래된 민가에서 보이는 앞 처마 밑에 토담을 둘러쳐서 한 칸 반의 부엌을 만들었다. 반 칸은 후대에 넓혔다고 한다. 부엌 중간쯤에 조왕신을 모시던 자리와 관솔불을 켜던 선반이 있다고 하나 분주히 움직이며 주인이 불을 때고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서문에서 성벽을 올랐다. 성벽을 오른다는 건 묘한 쾌감을 몰고 온다. 마치 전쟁의 승리자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성위를 걷는다. 울창한 대숲이 성벽에 갈리고 하늘로 점점 오르던 성벽이 크게 휘어지는 곳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열 지어 있었다. 저마다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 모두 한 방향만 뚫어지라 내려다보고 있다.

 

 

 

“이 풍경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를 뻔했다. 낙안읍성이야 한때 제집 드나들듯 자주 온 곳이지만 늘 이곳에 서면 타임 슬립을 경험한 듯 깊은 감동에 빠지게 된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는 말이 이곳에선 얼마나 진부한 표현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서성이다 손가락으로 액자를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우산으로 풍경을 가렸다. 우산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다. 눈으로 본 풍경을 귀로 다시 새기니 제법 근사한 영화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된다.

 

 

성벽 아래는 유자가 황금빛이다. 절로 침이 고인다. 바람이 분다. 비에 젖은 흙내가 풍겨온다. 이로 인해 이곳에선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의 오감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정의 감정을 모두 맛보았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옹성의 모습이 제법 잘 갖춰진 쌍청루는 멋들어진 남문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도 들녘의 풍광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눈 맛이 좋으니 고개를 돌려도 산세가 빼어나다. 비를 머금은 산세가 시간마저 잡고 있다.

 

 

예전 몇 번인가 찾았던 우물을 찾느라 몇 번 허탕을 쳤다. 비가 그치자 바람이 심해지고 갑자기 추워졌다. 고샅길을 몇 번이고 헤매었지만 우물을 찾을 수 없었다. 인근 민가에 들러 길을 물어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이 우물을 꼭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물에 가보면 자연 알게 된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우물이 있을까. 마치 바닥에 도형을 그린 것 같은 이 우물의 조형미에 흠뻑 빠져 매번 찾게 된다. 누군가 명령했다. 우물을 디자인하라!

 

풍수지리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배가 떠다니는 행주행(行舟形)으로 우물을 깊이 파는 걸 금하였다. 대신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러 쓰도록 했는데 이는 우물을 깊게 파면 배 밑이 뚫리어 배가 가라앉아 고을이 쇠하고 낮은 우물을 길러 쓰도록 한 것은 배안에 고인 물을 퍼낸다는 의미가 있다. 옛날 고을 수령이 이 물을 먹었다 하여 ‘큰샘’으로 불리는 이 우물물을 마시면 마음이 착해지고 미인이 된다고 한다.

 

 

다시 골목길, 토담과 시멘트길이 공존하는 이 읍성은 아무래도 좋다. 무슨 세트같이 을씨년스런 다른 읍성보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 읍성이 아무래도 좋다.

 

 

지금 사람이 산다는 건 묻지 않아도 되고 예전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걸 말해주는 건 성 안에서 보이는 노거수들이다. 낙안읍성에는 오래된 나무가 성안에 심겨 있다. 수령이 300년 이상 된 푸조나무와 팽나무가 각 1그루씩, 은행나무가 2그루이고 나머지 11그루는 2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인다. 인조 4년(1626)에 낙안읍성이 석성으로 축성될 때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 노거수들은 모두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시간 남짓한 관람은 다시 동문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성을 빠져 나와 <뿌리깊은나무박물관>으로 향했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고 한창기 선생이 생전에 수집했던 유물을 기탁 받아 순천시에서 건립한 박물관이다. 읍성 동문으로 나와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얼마간 가면 나온다.

 

 

소설가 조정래는 한창기 선생을 일러 ‘멋쟁이 지식인’이라 했다

 

그이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얽매임 없이 살았던 자유인이었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여러 가지 개성으로

스스로의 삶을 다양하게 가꾸며

한평생을 흐드러진 멋으로 살고 간

우리 시대의 최고의 멋쟁이였고,

모범적 지성인이었다.

 

한창기 선생은 한글사랑으로 유명한데, 한글전용체의 가로쓰기를 뿌리깊은나무의 출간을 통해 실천했다. 이곳에는 그가 모은 한글소설, 역사서, 한글목판 등 한글류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람이 거세졌고 온몸이 얼 정도로 추워졌다. 이날 감기에 걸려 2주일을 고생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심한 감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제야 글을 쓴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