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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하동역에서 내려 버스로 간 만추의 지리산 쌍계사

 

 

 

 

 

거참, 신기하네! 법당 안에 석탑이 있다니...

하동역에서 내려 버스로 간 만추의 지리산 쌍계사

 

 

하동역에서 내렸다. 하동역은 1968년 진주 순천 간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영업이 시작됐다. 진주 순천 간의 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밀양 삼랑진에서 광주 송정까지의 총길이 300.6km의 경전선 전 구간이 개통된 셈이다. 역사 앞에는 이를 기념하여 ‘경전선전통(慶全線全通)’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1968년 2월 7일 개통식에서 박정희의 친필이라는 ‘경전선전통’ 기념비 제막이 있었다. 옆 비문에는 시인 이은상이 짓고 서예가 이철상이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도롯가를 걸어 읍내로 향했다. 뻥 뚫린 4차선 대로와는 달리 골목에는 옛 풍경이 미루적거리는 곳도 더러 있다.

 

 

쌍계사 가는 버스는 자주 있었다. 마침 악양 대봉감 축제가 열려 버스는 만원이었다. 섬진강을 달리던 버스가 악양 들판으로 들어서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텅 빈 버스는 다시 시골을 달렸고 멀리 남도대교가 보이더니 화개장터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조영남 노래가 들릴 듯한 화개장터를 지난 버스는 장렬한 벚꽃대신 쓸쓸한 낙엽만 날리는 십리벚꽃길을 역마살 난 나그네처럼 덜커덩 덜커덩 달렸다. 텅 빈 공터에 작은 버스정류장이 휑했다. ‘구례 차는 차표 없이 타세요. 화개, 하동 차는 목화식당에서 차표 사세요.’ 누군가 붙여 놓은 버스 시간표가 어설프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처음 심었다는 시배지와 가장 오래되었다는 차나무는 예전에 보았으니 석문 옆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느긋하게 배를 채웠다.‘쌍계’, ‘석문’이 최치원의 글씨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몇 해 전 보았던 나무장승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되어 박물관으로 보내진 이곳 나무장승은 벽송사, 선암사 장승과 더불어 유명했지만 말이다.

 

 

예전 쌍계사를 입장료 없이 드나들었던 유일한 길이 쌍계초등학교였다. 화개동천의 바위를 위태롭게 건너 산비탈을 오르면 초등학교였다. 이곳에서 산길로 돌아가면 이내 쌍계사요 불일폭포 가는 길이었다.

 

 

쌍계사는 그 이름처럼 절의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줄기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23년(724) 의상대사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 머리)을 묻고 처음에는 절 이름을 옥천사라 했다가 문성왕 2년(840)에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고,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쌍계사의 전각들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 대웅전까지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액이 걸린 일부문의 화려한 다포집이다.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썼다.

 

 

계곡 건너 담장에 특이한 문이 있어 사진기에 담는다. 앙증맞게 적당히 솟은 지붕에 대로 엮은 문은 소담하기 그지없다.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모신 금강문은 단아한 맞배집이다.

 

 

역시나 맞배지붕인 사천왕문을 지나면 팔영루 앞에 이른다.

 

 

진감선사 혜소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곳 팔영루에서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 음률로써 범패를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90년 오대산 월정사 구층석탑을 본 떠 지었다는 구층석탑은 조형미도 의문이거니와 터를 더욱 비좁게 하여 도무지 정이 안 간다. 산사의 예의 고즈넉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

 

 

팔영루를 돌아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건물임에도 그 탁월한 위치로 위엄과 당당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앞뜰에는 최치원이 직접 짓고 친필로 쓴 ‘진감선사 대공탑비(국보 제47호)’가 있다. 최치원이 쓴 사산비명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모두 2417자의 해서체가 음각되어 있는데 글자가 매우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고 자의 운과 율에도 고저장단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신품으로 평을 받고 있다.

 

 

비신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파괴되어 금이 가 있으며, 한국전쟁 때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글자의 마멸도 심한 편인데 다행히 영조 때의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는 보조 철틀로 겨우 손상을 막고 있다.

 

 

대웅전 옆 명부전 앞에는 마애불이 하나 있다. 쌍계사에 갈 때마다 꼭 찾게 되는 마애불이다. 조각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뭐 대단한 유물도 아닌데 쌍계사에 가면 잘 있나 싶어 꼭 안부를 묻곤 하는 마애불이다.

 

 

자칫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법당 한구석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부처라기보다는 승려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깊은 산중의 어디에라도 있을 법한 큰 바위에 두툼하게 불상을 조각했다.

 

 

바위의 한 면에 두터운 돋을새김으로 불상을 새기고 그 주위를 깊이 파내었다. 마치 감실 안에 모셔진 부처의 느낌을 주고 있다. 머리가 크고 잔뜩 살이 오른 얼굴에 약간 웅크린 듯한 어깨와 두툼한 귀는 자비로움을 넘어 천진난만하고 소박하기까지 하다. 걱정 없이 잘 자란 부잣집 막내아들 같기도 하고 세상엔 초연한 무심한 승려 같기도 하다.

 

 

법의도 두툼한데, 두 손은 소맷부리에 넣고 단전 앞으로 다소곳이 끌어 모아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듯하다. 이 마애불을 보고 있자니 절로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이 쌍계사 마애불은 높이 1.35m 정도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이다.

 

 

팔영루 왼쪽 계곡을 건너면 금당과 팔상전이 있다. 이곳은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일직선상에서 비켜서 있는데 한때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옛 쌍계사 터이기도 하다.

 

 

오래된 은행나무와 층층 층계는 이곳을 더욱 신성하게 느끼도록 한다. 불일폭포로 가는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 왼쪽의 작은 문을 지나면 청학루로 열리는 금당 영역이다.

 

 

거대한 자연석 주춧돌 위에 둥글고 굵은 기둥을 세워 마루를 얹은 청학루는 쌍계사에서 처음 스님이 되는 분들의 수도 장소로 사용되었다 한다. 청학루 앞은 비좁아 누각을 올려다 볼 여유조차 없으나 누각에 올라서면 쌍계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올 듯하다.

 

 

비좁은 청학루를 지나면 앞마당이 제법 넓은 팔상전이 나온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8개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을 모셔두는 전각을 이른다. 이 전각에는 17세기 작품으로 보물 제925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가 있다.

 

 

팔상전 옆으로는 하늘로 오르는 듯한 층계가 높다. 청학루부터 점점 건물들이 상승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육조정상탑을 모신 금당이 존귀하다.

 

 

쌍계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 있는 금당은 중국 불교 선종의 6대조인 혜능선사의 정상을 모셨다고 전하는 ‘육조정상탑’이 있다. 처음 신라 민애왕 연간에 진감선사가 건물을 세워 ‘육조영당’이라 했다. 전각 안에 있는 육조정상탑은 1800년대에 인근 목암사라는 절에서 옮겨와 세운 뒤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기단이 없는 대신 툇마루를 두어 지면과 구분을 두었다는 점이다. 금당의 ‘육조정상탑’, ‘세계일화조종육업’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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