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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박물관

우리나라 최초로 마을에서 세운 조랑말박물관

 

 

 

 

리나라 최초로 마을에서 세웠다는 제주 조랑말박물관

 

따라비오름을 찾아 녹산로를 달리던 중 너르디너른 초지 위에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처럼 우뚝 솟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랑말 박물관이었다. 다행히도 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호기심에 곧장 들르기로 했다.

 

조랑말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마을에서 세운 리립박물관이라고 한다.

 

박물관 초입에는 ‘행기머체’라는 돌무더기가 있었다. 평지에 솟은 거대한 용암덩어리였다. 돌무더기를 뜻하는 ‘머체’ 위에 행기물(놋그릇에 담긴 물)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원래 지하에 있었는데 수많은 시간이 흘러 덮고 있는 주변의 흙 등이 떨어져 나가면서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 제주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엿볼 수 있는 암석이란다.

 

행기머체

 

박물관이 있는 이곳은 옛날 조선시대 으뜸말(갑마)을 길러냈던 국영목장이 있던 곳이다. 그 유서 깊은 목장이 있던 자리에 ‘조랑말체험공원’과 ‘조랑말박물관’이 들어섰다. 말을 직접 탈 수 있는 승마장도 생기고 캠핑장도 있어 제주 조랑말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셈이다.

 

 

입구에 세운 말 입상에는 벌써 다녀간 방문객들의 글귀가 가득하다.

 

 

모자이크로 말을 조각조각 붙인 출입구 벽면의 원색 타일이 인상적이다.

 

 

박물관은 지난 9월에 문을 열었다고 하니 여행자가 방문한 지난 10월 20일에는 개장한 지 한 달이 겨우 지난 시점이었다. 그래서일까. 아직 완전히 정비가 되지 않았고 안내책자도 딱히 없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긴 조랑말박물관이라고 하니 대견스럽다. 게다가 말의 본산지 제주에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박물관을 가시리 마을에서 지어 운영한다는 것이다. 국립, 도립, 시립, 하다못해 군립 박물관은 들어봤지만 리립(里立) 박물관은 처음이다. 이 사실을 안 건 박물관 내의 카페테리아 창가 선반에 비치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7-제주 편>을 보고서였다.

 

박물관 한쪽에서 전시되어 있는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에 조랑말박물관을 소개하고 있었다.

 

박물관 한쪽에선 마을사람들과 박물관 관계자로 보이는 대여섯 명이 진지하게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들의 진지함을 도저히 깨뜨릴 수 없었다. 몇 번 주위를 서성이다 끝내 발길을 돌렸다.

 

전시관 내부

 

노출콘크리트로 둥글게 지어진 건물에 들어서자 백마와 흑마의 두상이 돌하르방 마냥 길손을 맞이한다. 건물의 생김새대로 전시 패널도 시대별로 둥글게 쭉 돌아가면서 관람하게 되어 있었다. 제주마의 역사를 그림과 글이 있는 패널 그리고 설치물을 통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 보기만 해도 눈에 쏙쏙 들어왔다.

 

 각종 낙인들

 

견월악 마방목지의 제주마 엉덩이에 찍힌 낙인(2008년 사진)

 

제일 먼저 ‘낙인’이 보인다. 흔히 ‘낙인찍다’에 많이 쓰이는 그 ‘낙인’이다. 원래 쇠로 만든 자형이나 도형을 불에 달구어 물건․동물․사람에게 찍는 것을 말한다. 가축의 경우 소유주를 식별하기 위해 사용했다. 제주에서 처음 낙인을 사용한 것은 고려 충렬왕 2년 몽골이 수산평에 160필의 말을 방목하던 시기로 추정된다. 당시 몽골이 소유했던 14개 목장의 말에는 ‘대인자마(大印子馬)’라는 낙인을 했다고 한다. 낙인은 마을 공동의 낙인이 있었고, 마을 내의 친족집단에서 고유의 글자를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곳 가시리에선 집집마다 낙인이 달라 말과 소의 소유주를 확인하는데 사용됐다.

 

'약질이'와 '부구리글겡이'

 

‘약질이’와 ‘부구리글겡이’는 말의 건강을 돌보는 도구였다. 대나무로 만든 ‘약질이’는 말에게 약을 먹일 때 쓰는 도구다. ‘부구리글겡이’는 쇠로 만들었는데 말과 소를 긁어줄 때 썼다.

 

안장

 

안장은 사람이 말 등에 편안히 앉는데 필요한 말갖춤이다. 나무로 만든 것이 먼저 나왔고 가죽으로 만든 것은 훨씬 후라고 한다.

 

재갈(위), 편자(좌), 등자(우)

 

‘등자’와 ‘편자’, ‘재갈’도 보인다.

 

바령 치기 장면

 

이쯤에서 제주 말의 쓰임새가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제주의 밭은 대부분 농작물을 한 번 수확하고 나면 ‘쉬돌림’이라 해서 밭을 쉬게 했단다. 이 쉬돌림 동안 밭 안으로 말이나 소를 몰아넣고 똥오줌을 밭게 했는데 그 일을 두고 ‘바령’이라 하고 그 밭을 ‘바령밧’이라 했다. 바령밧을 만드는 일은 테우리의 몫이었다. 보통 두세 명의 테우리가 함께 바령 치는 일을 했는데 바령밧이 정해지면 저마다 빌려온 말들을 한곳에 모았는데 보통 150~170마리가 모였다고 한다. 그 무리를 ‘바령테’라 했다.

 

그렇게 두세 명의 테우리가 교대로 바령을 치는데 바령밧에 닷새 정도 바령테를 몰아넣고 똥오줌을 받는데, 이런 일을 ‘바령 들인다’고 했다. 바령을 치는 일은 방목을 하지 않는 겨울은 빼고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졌다. 테우리들은 남의 밭을 빌려 한 해 동안 바령을 치고 3년 동안 경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도 했다. 한 해 동안 바령을 했던 밭은 거름 기운이 10여 년 지속되는 수도 있어 밭 임자들이 테우리들에게 밭을 빌려주려 했기 때문이란다.

 

밧발리기 장면(밧발리기에서 '발'은 '아래 아'이나 여기서는 '아'로 표기함을 양해 바란다.)

 

또 하나 말을 이용하는 중요한 농사일이 있는데 ‘밧발리기’라는 것이 있다. 화산토로 이뤄진 제주의 밭이 푸석하여 씨앗을 뿌린 뒤 마소의 떼를 몰아넣어 흙을 단단하게 밭을 밟게 했다. 특히 제주의 주요 작물이었던 조는 씨앗이 작고 가벼워 바람에 날리거나 빗물에 쓸려가는 등 조 농사에 있어 ‘밧발리기’는 중요했다고 한다.

 

'어려려 돌돌돌돌 걸어가면서/노픈디만(높은 데만) 발로 푹푹 찍으면서 /요마쉬(마소)들아 걸어보라/ 그리호여야(그리해야) 산이 멜라져(납작해져) 펭지(평지)가 되지 않겠느냐. 어려려~엉 어려려~어려 어러러엉 어려가 하량'

 

테우리들이 밭 밟기를 하며 불렀다는 ‘밧발리는 소리’의 일부다. 글자만 봐도 우렁차고 구성진 소리가 나오는 듯하다. 말들이 무리지어 밭을 밟는 것을 ‘말테’, 말의 수가 적거나 작은 밭의 경우에는 나무로 수십 마리의 말발굽 모양을 만들었는데 이를 ‘남테’, 돌로 만든 것은 ‘돌테’라고 했다.

 

조 농사가 한창이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밭 밟기를 직업으로 하는 테우리들도 있었고,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테우리들에게 시간과 금액을 정해 밭 밟기를 맡겼다고 한다.

 

말총과 탕건

 

말총과 탕건도 보인다.

 

총배

 

채찍인 줄 알았던 '총배'는 말총으로 만들었단다. 질기고 비에 젖어도 썩지 않아 말뚝에 말을 매어 두거나 우마를 이용하여 짐을 나를 때, 상여를 상여 틀에 고정시키는 등 큰 힘을 견디어 내는 일에 주로 쓰였다고 한다.

 

 

제주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헌마공신’ 김만일이다. 제주 출신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을 지낸 김만일은 1550년 남원읍 의귀리에서 태어나 중년 무렵에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말 목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말 목장은 지금의 남원읍 의귀리, 한남리, 그리고 수망리의 중산간 일대를 아우를 정도로 광활했으며 기르던 말이 1만여 필에 달했다고 한다.

 

김만일의 헌마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때인 1594년 500필을 전마로 내놓으면서부터였다. 그 후 1627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기록상에 남은 것만 해도 1240마리가 넘는 말을 나라에 기꺼이 내놓았다. 잇따른 전란으로 말이 가뜩이나 필요했던 조정은 김만일의 공로에 종1품 벼슬까지 내리게 된다.

 

 

김만일은 1632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 김대길과 손자 또한 연이어 헌마를 했다고 한다. 아들 김대길이 1658년 산마감독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897년 그 직책이 없어질 때까지 218년 동안 김만일 가계에서 모두 83명이 산마감독관을 역임했다. 산마감독관은 현감과 같은 종6품이었지만 제주도에서는 최고 지위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제주도에서 김만일 집안처럼 벼슬을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일가는 없었다고 한다.

 

탐라순력도

 

박물관 내에는 조선 숙종 때 이형상 목사가 제주 재임 당시 거행했던 순력 및 행사장면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그리게 한 '탐라순력도'가 보인다. ‘공마봉진(貢馬封進)’은 관덕정에서 숙종 28년(1702) 6월 7일에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제주목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산장구마(山場駒馬)’는 산장에서 말을 일정한 장소로 몰아다가 마필 수를 확인하는 그림으로 동원된 인원만 해도 수천 명에 달한다.

 

 

제주에 대규모 목마가 시작된 것은 원나라가 침입하여 원의 직할령이 되면서 부터였다. 원은 천혜의 방목여건을 지닌 제주도를 말 사육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고 해안가 평야지대에 목장을 설치했다. 제주에 원나라 14대 목장의 하나가 생긴 것이다.

 

이후 조선 초 말들이 농작물에 입히는 피해가 극심해지자 세종 7년(1425)에 고득종이라는 인물이 세종에게 ‘목장을 한라산 중턱으로 옮기고 경계에 돌담을 쌓을 것’을 건의하게 된다. 그의 건의로 세종 11년(1429) 8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중산간 지대에 국마장이 설치됐다. 이때 경작지대와 목장지대의 경계를 나타내는 돌담인 ‘잣성’이 축조된다.

 

 

이 무렵 목장을 열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10소장(십소장) 체제가 운영된다. 그중에서 가장 크고 좋은 말을 키우는 갑마장을 가시리에 두었다. 목장을 관리하는 총 책임자는 제주목사였을 정도로 말에 대한 관리는 철저했다. 그러나 말을 직접 사육하는 테우리들은 고된 노역에 시달렸고 우수한 종자의 말이 대부분 반출되는 등 문제가 야기되어 광무 4년(1899)에 결국 국마장은 폐지된다.

 

박물관을 반 바퀴 돌았을 뿐인데도 꼼꼼히 마사(馬史)를 읽어 보니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제주조랑말은 편자가 없어도 돌밭을 잘 돌아다녀요. 거센 바람과 추위에도 강하죠. 다리는 짧고 얼굴은 또 크잖아요. 어디서든 살아남는 한국 사람들의 강인한 모습을 조랑말에서 발견합니다.’

 

<흙으로 빚어낸 조각>으로 명명되는 작품을 만든 유종옥 예인의 제주 말에 대한 찬사다. 제주조랑말의 그의 작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제주마는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했다.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마는 어깨높이 113㎝, 몸길이 122㎝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으로 다른 말들보다 뚜렷하게 작다고 한다.

 

견월악 마방목지의 제주마(2008년 사진)

 

성질이 지극히 온순해 사람을 잘 따르며 명령에도 잘 순종한다. 제주에서 사육되고 있는 제주마의 사육 수는 한때 2만여 마리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1000여 마리로 감소했다. 1986년 2월 8일 혈통 및 종 보존을 위해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옥상정원으로 올라갔다. 아래로 원형의 극장처럼 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 박물관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그 텅빈 공간을 느릅나무 한 그루가 채우고 있었다. 멀리 따라비오름이 보였다. 잣성도 보인다. 풍차가 쉬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울타리 안의 말 한 마리가 초원의 말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비오름으로 향했다.

 

따라비오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밧발리기' '달달달달' '요마쉬' '그리하여야' 중 'ㅏ'는 '아래 ㅏ'(ㆍ)로 표기하는 게 맞으나 여기서는 'ㅏ'로 표기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