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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박물관

놀랍군! 감귤창고 같은 이곳이 유명한 추사관이라니...

 

 

놀랍군! 감귤창고 같은 이곳이 유명한 추사관이라니...

누구나 가는 제주, 꼭 들러야 하는 추사관

 

이건 아무래도 영락없는 감귤창고다. 제주의 가을은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황금빛 감귤이다. 이런 흔하디흔한 감귤 밭 어디서든 어김없이 볼 수 있는 게 감귤창고다. 제주 추사관을 보며 그 감귤창고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비록 추사관이 세한도에 나오는 그 초가를 모델로 삼았다고 해도 말이다.

 

추사관은 세한도에 나오는 집을 본떴다고 하지만 실상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귤창고(아래 사진)를 쏙 빼닮았다.

 

감귤창고를 닮았다고 해서 추사관이 격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박물관하면 무슨 근사한 건물이 들어설 것으로 생각했다지만 오히려 늘 보던 감귤창고를 닮았으니 그 친근감이야 딱히 말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다. 박물관이 주민들과 동떨어지지 않은 생활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추사도 유배되어 있는 동안 귤밭의 집이라는 뜻의 ‘귤중옥’을 당호로 삼았으니 추사관을 감귤창고로 보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닌 듯하다.

 

남원면에서 본 감귤창고

 

추사관을 설계한 사람은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이다. 그는 세한도에 나오는 단아하고 아무런 치장 없는 집의 이미지를 추사관에 적용시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세한도에 나오는 집을 쏙 빼닮았다. 추사관은 김정희 유배지와 주변의 작은 집들을 압도하지 않도록 전시실을 지하에 배치하고 형태가 드러나지 않게 설계돼 있다. 즉 은거와 유배를 기념하는 건축으로서의 설득력을 갖기 위한 설계였다고 한다.

 

제주 추사관(좌)과 감귤창고(우)

 

건물은 지상에선 단층으로 보이는데 지하에 2층을 둔 것도 배려의 흔적이 보인다. 대정읍성에 있는 마을의 스카이라인이 1층이니 거기에 맞추어 특별히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게 두리뭉수리하게 어울리도록 지었다.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추사관의 첫 인상은 이러했다. 특이한 것은 이뿐만 아니었다. 땅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곧장 전시실이 나타난다. 계단도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하도록 지그재그로 설계됐다.

 

 

전시실은 깊어 경건한 기운마저 감돈다. 높은 지붕 아래 둥근 광창을 통해 햇빛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그 아래 ‘판전(板殿)’이라는 글씨가 선연하다. 서울 봉은사의 현판으로 추사가 71세였던 1856년에 썼다고 한다. 이 글씨를 쓰고 삼일 후에 추사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낙관부에 ‘칠십일과병죽작(七十一果病中作)’이란 글에서 노숙한 경지에 이른 그의 말년작임을 알 수 있다.

 

 

추사의 연표가 있는 긴 복도를 따라가면 그 끝에 세한도가 있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1844년 그의 나이 59세 때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이 되던 해에 그린 그림이다. 1840년(55세) 제주도에 유배를 온 추사는 1843년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서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를, 이듬해인 1844년에는 하우경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을 받게 된다. 절해고도의 가시 울타리에 위리안치 된 추사는 방대한 책을 준 이상적의 정성에 감격하고 또 감격하여 그에게 세한도를 그려주고 발문을 적었다.

 

 

초가 한 채와 소나무 한그루, 잣나무 세 그루를 간략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극도로 생략 절제된 작품으로 문인화가 지향하는 사의와 문기를 남김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한도는 논어에 나오는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는 글귀를 화제로 삼았다. 작품이 완성된 지 70년이 지난 1914년에 표구된 세한도는 한 폭의 두루마리 형태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한도는 그림과 발문까지 너비 23cm, 길이 108cm 정도인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한도의 전체 규모는 너비 23cm, 길이 14m에 달한다. 앞부분에는 작품의 제목(완당세한도)과 작품 소장내력이, 이어서 본 작품인 <세한도>와 발문, 그 뒤로 수많은 글들이 이어진다. 세한도를 감상한 사람들이 쓴 감상문인 제찬이다. 세한도를 보고 글을 남긴 당대의 지식인은 모두 17명, 그들은 당시 청나라의 지식인들이었다.

 

김정희의 이상과 혼이 담긴 국보 제180호 <세한도>, 간결하고 소산한 그림도 그림이지만 정중하고도 단정한 글씨로 쓴 발문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진다.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 그리고 집 한 채,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그림은 당시 김정희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쓸쓸한 마음에 거친 붓 하나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종이 위에 먹물조차 메말라 있어 그의 처연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며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했던 추사는 그 제자가 받아온 청나라 학자의 글에 힘입어 혼자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으리라.

 

여행자는 10여 년 전에 이곳 김정희 유배지 앞 허름한 가게에서 조악한 영인본을 만 원에 구입해서 표구에만 오만 원을 썼다. 지금도 여행자의 빈한한 서재 한 벽면에 맑고 엄정하게 걸려 있다.

 

 

‘해천일립상’은 추사의 제자였던 소치 허유(허련)가 스승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시절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중국 송나라 소동파가 하이난으로 귀양살이 갔을 때 갓 쓰고 나막신 신은 도롱이 차림의 처연한 모습을 그린 <동차입극도>를 본떠 그린 것이라고 한다.

 

 

해천일립상을 시작으로 추사의 작품들이 쭉 전시되어 있다. 특히 추사관을 짓는데 일조한 유홍준 교수와 부국문화재단의 기증 작품이 전시실 곳곳에서 눈에 띈다.

 

 

제주에서 쓴 김정희의 편지인 간찰도 보이는데, 예산 김정희 종가 유물 일괄로 묶여 2006년 보물 제547-2호로 일괄 지정됐다. 행서체로 써진 이글은 얼굴빛과 말로 드러내지 않고 순리에 따라 절해고도에서의 생활을 극복해 나가겠다고 자신의 심회를 밝히고 있다.

 

 

추사의 현판 글씨를 탁본한 ‘작은 창가에 빛이 밝으니(小窓多明)/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使我久坐)’라는 글씨가 선명히 들어온다.

 

 

‘시례고가(詩禮古家)’는 ‘시와 예의 고풍이 있는 집’으로 ‘대대로 유학의 경서를 읽는 집안’, 혹은 ‘유가의 경서와 전통 규범을 대대로 전해오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매한 기운이 뻗친다.

 

 

‘괴근수경(槐根水廎)’은 ‘홰나무 뿌리, 물가의 작은 툇마루’라는 서정적인 문구다. 낙관부의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린 후 서울 한강변에서 살 때 사용했던 당호이다.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잘 알려진 대로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 걸려 있는 현판이다. 본래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이학래에게 써준 것이다. 보정산방은 ‘다산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옹방강이 소동파를 존경하여 자신의 서재를 ‘보소재’라 이름 짓고, 추사 김정희가 옹방강을 사모하여 ‘보담재’라고 했듯이, 세상 사람들이 다산의 유배처를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라면서 추사가 적은 것이다.

 

 

김정희 유배지에는 지금도 봄이면 수선화를 볼 수 있다. 추사는 수선화를 무척 아꼈고 여러 편의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한다. “연못에 얼음 얼고 뜨락에 눈 쌓일 무렵 모든 화초가 말라도 선화(仙花)처럼 향기를 발산하여 옥반의 정결을 펼치고, 금옥의 아리따움을 간직한다. 꽃망울 노랗게 터지고 조밀한 잎 파릇이 피어나면 고운 바탕은 황금이 어리네...” 라고 찬시했다.

 

 

‘의문당(疑問當)’은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 이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대정향교에 써준 현판이다. 제주 지역 유생들과 추사와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현판으로 의문당은 추사의 스승인 완원의 호이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추사가 제주로 유배오던 중 들렀던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써준 예서체 현판이다. 추사는 이 글씨를 써준 뒤 초의에게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떼어내게 했는데 그 후 9년이 지나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이 글씨를 보고는 자신의 현판을 떼고 이광사의 현판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전시실을 둘러보니 대강 이러했다. 짧은 식견이 한계가 있어 이쯤에서 전시실 구경을 마치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처음에 보았던 ‘판전(板殿)’이라는 글씨가 이곳에서 보니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입구에서 보든, 안에서 정면으로 보든, 이층을 오르면서 보든 그 완숙한 필치는 엄정하고 엄숙하다.

 

 

2층 전시실의 추사 흉상

 

이층에는 텅 빈 공간이다. 이 휑한 공간이 외려 긴장감을 주는데 그 끝에 추사의 흉상이 있다. 추사를 추모하는 공간인 이곳은 어두운데 작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신비롭고 묘한 경건함을 준다. 미술인 임옥상의 작품으로 무쇠를 소재로 제작했다고 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빛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긴 어둠의 공간 끝에 밝은 빛의 김정희 유배지가 보였다. 이제 추사의 체온을 느낄 차례다.

 

 

☞ 제주 추사관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번지에 있다. (☏064-760-3406) 조선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을 기리고자 2010년 5월에 건립됐다. 원래 1984년에 세운 추사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낡은 데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가 2007년 10월 국가 사적 제487호로 승격되면서 다시 건립됐다. 현재 추사관에는 100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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