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화의 땅, 제주도

가을색이 유난히 아름다운 한라산 둘레길의 매력에 빠지다

 

 

 

 

 

가을색이 유난히 아름다운 한라산 둘레길의 매력에 빠지다

 

 

숲으로 갔다. 스물 번 넘게 제주를 왔음에도 아직 한라산을 등반한 적이 없다. 해안을 어슬렁거리거나 그도 아니라면 중산간을 정처 없이 떠도는 게 늘 버릇처럼 몸에 배어 있어서다. 이번에도 역시 한라산을 오르지 않았다. 굳이 오를 이유도 없었다. 윗세오름까지는 한번 올라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금세 마음을 접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 한라산을 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좀 더 그럴싸한 변명을 하자면 제주도가 곧 한라산인데 기를 쓰고 오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시쳇말로 '한라산을 오르지 않으면 제주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한들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냥 때가 되면 오르겠지...

 

 

한라산에 둘레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호텔에서 우연히 잡지를 보다 둘레길 사진이 보였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음날 배낭을 둘러메고 서귀포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한라산 둘레길은 서귀포에서 제주 방면으로 서귀포자연휴양림 조금 못 미친 곳에 있었다.

 

 

한라산 둘레길은 현재 1구간과 2구간만 뚫려 있다. 1구간은 무오법정사에서 시오름까지 5.5km, 2구간은 거린사슴오름에서 돌오름 아래까지 5.6km다. 한라산의 허리께인 해발 600~800m의 둘레를 따라 걷는 길이다.

 

 

여행자가 택한 것은 2구간이다. 이 둘레길은 임도를 활용한 숲길이다. 일제강점기 '머리 둘레를 감은 천'이라는 뜻의 하치마키도로(병참로)라고 불렸던 길이다. 마치 머리띠처럼 한라산 둘레를 한 바퀴 빙 돌려 일본군들이 울창한 산림과 표고버섯 등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병참로란다.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50m쯤 아래 오른쪽으로 둘레길 표지판이 보였다.

 

 

차 한 대는 족히 지날 임도를 따라 숲에 들어서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은 농장 가는 길이고 '한라산 둘레길 이용 안내'라고 적힌 나무 표지판이 있는 오른쪽이 둘레길의 시작이었다. 거리는 5.6km 였다. 이때만 해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안내문에는 비가 올 때나 비 온 뒤 이틀 동안 출입이 통제되고 14시 이전에 이용을 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14시’를 ‘4시’로 착각하여 오후 3시가 다 된 시각에 둘레길에 접어들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아직 덜 알려진 이유도 있었지만 의외로 둘레길을 걷는 이가 없었다. 이날 여행자가 숲에서 만난 이는 겨우 7명이었다. 부부인지 부녀인지 헛갈리는 어느 남녀, 자매인 듯한 여자 둘, 온 얼굴을 무장한 채 눈만 빠끔 내놓은 혼자 온 아가씨, 계곡에서 신선인 양 휴식을 취하던 중년부부가 전부였다.

 

 

근데 한결같이 이들은 출발지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여행자와 같은 방향으로 둘레길을 걷기 시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표고버섯장이 있는 4.2km 지점까지는 숲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시간을 보니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때부터 걸음은 자연 빨라지기 시작했다. 숲의 어둠은 산 아래보다 훨씬 빨리 오기 때문이다. 처음의 느긋했던 발걸음은 시간이 늦었다는 걸 직감하고 잰걸음으로 바뀌었다.

 

 

숲은 점점 깊어갔다. 처음엔 삼나무 숲이 빽빽이 들어서 있더니 이내 하늘을 온통 가린 활엽수림이 쭉쭉 뻗어 있었다. 단풍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숲 아래 평평한 땅에 낮은 자세로 우산처럼 생긴 굴거리나무와 잎이 빼곡한 꽝꽝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 숲길에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조릿대였다. 처음 안내문에 제주조릿대라는 말이 나왔을 때만 해도 좀 많겠거니 여겼는데 숲길이 깊어갈수록 어마어마한 조릿대군락이 나타났다. 예전 말을 방목했을 때에는 제주조릿대가 이렇게 많이 퍼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라산 숲에 넘쳐날 지경이다.

 

 

제주조릿대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한라산 생물권 보전지역에 서식하는 제주특산 식물이다. 혹독한 추위와 적설을 견디는 강한 생명력으로 60~100여 년 간 생존한단다. 일생에 딱 한 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제주도에서 큰 가뭄과 역병이 돌면 이 제주조릿대가 열매를 맺어 사람들의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구황식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잎은 엽록소, 미네랄, 비타민, 아미노산, 폴리페놀 등이 풍부하여 예부터 다양한 질병의 약재로 사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건강에 도움을 주는 식품 및 화장품 원료로 활용되고 있단다.

 

 

숲길에서 사람을 만날 일은 없었다. 호젓하게 걷는 맛이 쏠쏠했다. 고요한 숲이 저 혼자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바람이 지나며 혼잣말을 하는 정도였다. 간혹 새가 울기도 하고 덤불에서 나와 퍼드덕 날갯짓을 하며 잽싸게 숲을 날아오르기도 했다. 이따금 큰 발걸음 소리에 바짝 긴장을 하고 걸음을 멈추면 어느새 숲 저쪽에서 노루가 노려보고 있다.

 

 

저도 놀라고 나도 놀라 서로 꼼짝을 하지 않으며 묘한 신경전을 벌이다 여행자가 먼저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자 노루도 재빨리 숲으로 몸을 감췄다. 이 날 한라산 둘레길에서 만난 노루만 해도 10여 마리, 숲에서 만난 일곱 명의 사람보다 더 많았으니 숲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 셈이다.

 

 

안내문은 친절했다. 혼자 걷다 보니 숲이 깊어갈수록 약간의 조바심과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독사, 들개'와 같은 섬뜩한 경고문은 절로 몸을 움츠려들게 했고 혹시나 멧돼지나 표범 같은 게 갑자기 덤비지나 않을까 저어했다. 현 위치 1.2km, 현 위치 2.8km... 잊을 만하면 나오는 안내도는 숲길에서 두려움을 잊게 만드는 유일한 친구였다.

 

 

물이 바짝 마른 계곡을 몇 번이나 건너고 조릿대 숲과 집채만 한 화산암이 장군처럼 버틴 숲속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서너 번의 갈림길만 주의 깊게 보면 원시의 숲, 대자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이 숲길에서 주저할 일은 없다. 숲에 깊이 침잠하면 어느덧 무념무상을 경험하게 된다.

 

 

한참을 걸으니 드문드문 붉은 단풍들이 보인다. 처음엔 노랗게 물든 잎들이 점점 붉어진 잎들로 대신했다. 만산홍엽보다, 푸른 숲에 노랗게 물들고 혹은 빨갛게 물든 이런 단풍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법이다. 온통 붉은 단풍이라면 처음의 강렬함으로 끝나겠지만 이런 아련하고 은은한 단풍은 두고두고 감탄과 감동을 주게 마련이다.

 

 

이곳의 단풍은 이번 주말께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없는 숲길에서 혼자 단풍의 매력에 푹 빠져 한참이나 헤어나지를 못했다. 제 아무리 만산홍엽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인파가 함께 보았다면 내가 본 건 만산홍엽의 일부밖에 되지 않는다는 역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런 호젓한 숲의 드문드문 단풍은 오로지 나 혼자 완상함으로써 이 절정의 풍광을 독차지한 셈이 된다.

 

 

숲길 중간 중간에는 예전 제주의 아픔이 깊이 배인 곳이 더러 보인다. 4.3 당시 주민들이 숨어 살았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들과 숯 가마터, 지금도 넓게 펼쳐진 표고버섯재배장이 그것이다.

 

 

 

표고버섯재배장을 지나니 제법 너른 임도가 나왔다. 이런 산중에 너른 길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표고버섯장임을 알리는 경고문에 발길을 돌리니 다시 조붓한 오솔길이다. 둘레길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하천은 메말라 있었다. 바위웅덩이가 깊은 곳엔 간혹 물이 고여 있었지만 메말라 있긴 마찬가지였다. 화산섬인 제주는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이틀만 지나면 물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토양이 물을 확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계곡에는 중년의 부부가 다리쉼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5분만 가면 둘레길이 끝나고, 거기서 10분 정도 가면 돌오름이 있습니다.”

“10분은 심하다. 20분은 더 걸릴 걸...”

 

산에서 만나는 남자들이 대개 그렇듯 호기롭게 말하는 남편의 말에 여자는 딴죽을 걸었다.

 

 

 

“여기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여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여행자는 감탄을 하고 있었다. 나불 나불거리는 비단천처럼 용암이 흘러내린 계곡은 신비로웠고 그 위로 울긋불긋 단풍이 장막을 치고 있었다. 숲의 묵직한 아름다움이 유난히 돋보였다.

 

 

 

드디어 5.6km 둘레길이 끝났음을 알리는 안내도가 보였다. 왼쪽으로 길을 잡아 돌오름까지 걷기로 했다. 돌오름으로 가는 안내는 나무에 누군가 새긴 ‘100m'라는 표시와 그 100m가 끝나는 지점 오른쪽에 누운 통나무에 새겨진 ‘돌오름’ 화살표가 전부였다.

 

 

 

돌오름은 이름 그대로 돌이 많아서 한자로는 석악(石岳)이라고도 한다. 해발 1270m에 있는데 오름 주위는 온통 울창한 숲이라 그 형체를 잘 볼 수 없단다. 내친 김에 돌오름 정상을 밟으려 걸음을 떼다 이내 발길을 돌렸다. 시간이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5.6km를 걸어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오는데 계곡에서 만난 중년의 부부가 맞은편에서 걸어온다. 귤 2개를 건네며 곧 어두워질 거라며 서둘러 가라고 했다. 그 마음이 고마워 귤 두 개를 계곡 바위에 올려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화가 울렸다. ‘민 기자’였다. 숲에선 잊고 있었던 자잘한 일상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내 전화가 끊겼다. 숲이 아직은 작은 일상에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산을 다 내려와서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입구와 가까운 삼나무 숲 사이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가슴 깊숙이 들어오는 숲내음을 마지막으로 깊이 들이켰다. 시작점으로 돌아오니 이미 어두워졌다. 계곡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 다가가보니 노루였다. 둘레길 내내 여행자와 동행한 이는 바로 한라산 노루였다.

 

 

 

☞ 한라산 둘레길은 제주시에서 서귀포 방면으로 가는 1100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서귀포 자연휴양림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둘레길 2구간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왼쪽에 둘레길 1구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2구간은 거린사슴 입구부터 돌오름까지 5.6km정도로 사려니숲길처럼 산책삼아 걸을 수 있는 숲길이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