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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경전선 800리] 벌건 순대에 뭐가 들었길래... 먹는 기분 묘하네

 

 

 

벌건 순대에 뭐가 들었길래... 먹는 기분 묘하네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사람냄새 폴폴 나는 완사

 

경전선 완사역은 지금은 폐역이 된 유수역과 다솔사역 사이에 있다.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에 위치한 경전선의 철도역으로 1968년 2월 8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1996년 1월 1일 역무원이 있는 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었고, 1999년에 남강댐 보수공사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2010년 7월 1일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어 명예역장을 임명하였다.
ⓒ 김종길

 


경전선을 달리던 기차가 완사역에 섰다.

'옛날 옥녀라는 아름답고 단정한 아가씨가 있었다. 베 짜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 매일같이 베를 짜서 덕천강에 씻어 옷감을 팔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근을 지나던 민 도령이라는 자가 옥녀에게 반해 청혼을 하게 됐고, 옥녀는 과거에 급제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민 도령은 열심히 공부해 과거 길에 올랐고, 옥녀 또한 민 도령의 과거 급제를 예견하고 옷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고을 사또가 행차하던 중 옥녀를 탐해 민 도령을 위한 옷감을 모두 잘라버렸다. 이에 낙담한 옥녀는 덕천강에 몸을 던졌고 사또는 급사했다. 과거에 급제해 금의환향하던 민 도령도 이 사실을 알고 강물에 투신해 죽었다. 이후 이곳을 지나는 혼인행차는 어김없이 화를 당했고 이를 위로하기 위해 옥녀봉과 완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얼핏 보면 성춘향과 이몽룡의 <춘향전>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말이 슬픈 이 이야기는 경남 사천시 곤명면에 있는 완사와 옥녀봉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완사(浣紗)'는 원래 '빨래를 한다'는 뜻으로 옥녀봉 전설에 따라 비단을 짜서 씻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완사는 조선시대에 완사역이 있어 '역마'라고도 흔히 불렸다.

시장이 있는 정곡리는 예전 그릇점이 있어 '점골'로 불리던 것이 변하여 정곡이 됐다. 1914년 사창·신기·곡내를 합해 정곡리라 하고 곤명면에 편입됐다. 시장이 있는 지금의 마을은 진양호 확장공사를 하면서 주민들이 이주한 곳으로, 요즈음으로 치면 신도시다.

완사 오일장의 명물은 바로 '피순대'

완사시장은 인근의 곤양과 서포의 갯벌과 바다에서 오는 해산물이 풍부하다.
ⓒ 김종길

 


완사역에서 내려 시장으로 향했다. 완사시장은 1일과 6일에 열리는 오일장이다. 시장 입구에 '100년의 전통 완사시장'이라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100년이라... 읍 소재지도 면 소재지도 아닌 이런 작은 마을 시장이 100년이 넘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시장은 작지만 옹골차다. 입구에 들어서면 끝이 훤히 보일 정도로 손바닥만 한 시골장이지만 시쳇말로 없는 거 빼고 모두 다 있다. 태풍이 오고 난 뒤지만 과일전에는 토마토·참외·복숭아 따위도 보이고 햇배와 햇사과도 보인다. 잘 말린 고추가 비닐 부대에 그득 담겨 있고 채소는 태풍에 피해가 컸는지 파리한 얼굴로 드문드문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사는 바다가 지척이다. 곤양과 서포의 갯벌과 바다에서 오는 게와 각종 해산물이 시장의 한구석을 채운다. 펄떡이는 게를 검은 봉지에 담아 오천 원씩, 만 원씩 사간다. 게 이름을 물어봐도 사가는 손님도, 파는 상인도 그저 게라고만 한다. 완사는 바다에 닿아 있으면서도 주위에 산지가 적지 않다 보니 수십 가지의 약재가 시장바닥에 즐비하다. 한쪽에선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완사시장에서 빠뜨릴 수 없는 명소, 순대집을 찾았다. 시장에는 순대집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 여행자가 찾은 곳은 곤양 식당. 장터에 있는 이 순대집은 지역에서는 꽤나 알려진 집이다.

오랜만에 찾았더니 문덕희 할머니가 아는 척을 한다. 순대 1인분만 주문했다. 할머니는 예전 장날이면 이곳에서 국밥을 말아 장꾼들에게 팔다, 18여 년 전부터 피순대를 만들어 식당을 꾸려왔다. 이 집 순대의 특징은 그 흔한 당면을 넣지 않고 방아·파·마늘·김치 등 각종 야채와 양념을 버무린 선지를 넣어서 만든다는 데 있다.

완사시장의 명물 '피순대'
ⓒ 김종길

 


여행자가 어릴 적, 시골에서 돼지를 잡을 때 칼로 목을 찔러 피를 양동이에 받아내곤 했다. 고기의 핏기를 제거하고 신선한 선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 선지로 피순대를 만들었다. 돼지 창자를 분비물 없이 깨끗이 씻어내고, 소금으로 주물러 잡내를 제거한 후 선지와 약간의 채소 등으로 소를 넣어 순대를 만들었다. 탑탑하면서 단맛이 나는 피와 쫄깃한 내장 맛이 유년시절의 맛과 일치되는 듯. 갖은 야채와 당면이 들어간 요즘의 순대와 비교하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맛에 대한 추억은 아련하다.

허름한 선술집 같은 식당에서 그야말로 옛날식 순대를 먹는 기분은 묘하다. 등뼈와 순대가 들어간 국밥도 시골 맛이다. 조금은 탑탑하지만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순대 맛은 호불호가 명확할 것 같다. 도시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보기에도 먹기에도 마뜩잖을 수도 있겠고, 어린 시절 시골의 추억 한자락 가지고 있는 이라면 투박하고 거칠지만 맛이 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챌 수도 있겠다.

이곳의 피순대가 아름아름 입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외지인들도 부러 찾아오기도 한다. 장날이면 장꾼들은 순대 한 접시에 간단한 요기를 해결하고 고된 일상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한다. 돼지국밥·내장국밥·순댓국밥·추어탕은 6000원, 수육은 12000원, 순대는 작은 게 6000원, 큰 게 1만2000원이다.

비녀 꽂은 할머니, 입담 한번 걸쭉하시네

완사5일장이 설 때마다 시장에 나오는 김정년 할머니(82)는 아직도 비녀를 꽂은 쪽머리를 하고 있다
ⓒ 김종길

 


순대를 사서 나오는데 할머니 한 분에게 자꾸 눈이 간다. 완사장이 비록 손바닥만 하다고 하지만 할머니가 유독 여행자의 눈길을 끈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바로 머리에 꽂은 '비녀' 때문이었다. 시골 할머니들이 대개 하고 있는 파마 머리가 아니라 곱게 빗어 넘긴 머리 모양새 끝에 비녀가 꽂혀 있었다.

순간 고향의 팔순 노모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10여 년 전만 해도 비녀를 꽂고 있었다. 옛날 쪽머리를 고집하던 어머니도 칠순을 넘기자 더 이상 머리 관리가 힘들어 어느 날 읍내 미용실에서 50년 이상 길러 허리까지 치렁했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파마를 하고 왔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쪽머리를 하고 있는 시장 할머니의 뒷머리에도 분명 비녀가 있겠구나,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비녀를 꽂은 김점년(82)할머니는 완사에 사신단다.

"와 자꾸 찍어샀노. 나 인자 그라모 티비(텔레비전)에 나오나? 혹시 나를 아무도 모르는 데로 살째기 데꼬 갈라꼬?"

사진을 좀 찍자는 말에 할머니는 싫지 않은 듯 웃으면서도 말은 걸쭉하니 날이 서 있다.

"할매 오늘 그 뭐라쿠네. 스타 됐네, 스타!"

앞에서 채소를 팔던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매번 장이 설 때면 김 할머니와 동업을 하다시피 해 채소 따위를 손질해 파는 아주머니는 사진을 찍는 내내 부산스러웠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시장 한쪽의 화장실 벽면에 '시장 점포 안내'라는 글귀가 보였다. 제법 정성을 들인 듯한 안내문에는 그 흔한 지도 하나 그려져 있지 않아도 순서대로 점포 이름이 적혀 있어 단박에 점포를 찾을 수 있었다.

장 구경을 마친 할아버지들이 느긋하게 시장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 김종길

 


장 구경을 마친 할아버지들은 평상에 앉아 시장의 시간을 지긋이 즐겼고,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는 풀빵을 주고받는 할머니들이 대중없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고뱅이 마을 둘레길을 아시나요?

서봉암에 올랐다. 구불구불 산허리를 힘겹게 감아 오르던 택시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암자에 섰다. 완사에 딱 두 대 있는 택시 중 한 대를 타고 온 것이다.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은 대중없는 버스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어 돌아가는 길에 버스를 타기로 하고 택시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 산꼭대기 암자에는 차들이 빼곡했다. "오늘요. 백중 아니요. 백중." 아뿔싸! 그러고 보니 불단 앞에 하얀 백설기가 높이 쌓여 있었다. 암자 뜰까지 자리를 깔고 앉아있던 한 참배객은 소리 낮춰 답을 하면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조심조심 인파를 헤치고 한쪽 구석에 섰다. 암자 앞으로 멀찌감치 산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봉황이 깃들었다는 서봉암의 기운을 한층 북돋아 주는 듯했다.

서봉암과 산중에서 마주친 어느 외딴집
ⓒ 김종길

 


암자에서 길을 물으니 의견이 둘로 나뉜다. 암자 아래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외딴집 한 채가 나올 터이니 능선으로 갈 건지 아니면 계곡을 가로질러 갈 것인지를 결정하란다. 예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외딴 집은 대문 대신 정낭처럼 대나무를 입구에 걸어뒀다.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해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이 산중에 사는 이는 대체 누굴까. 한참을 서성이다 차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산중의 외딴집도 그러하거니와 이 깊은 곳에 제법 너른 차밭이 있다는 게 의아하다. 인근의 다솔사를 흔히 '다사(茶寺)'라고도 부르지만 이곳의 차밭도 제법 넓다. 다솔사의 차밭은 최범술이 인근에 자생하던 차나무 씨를 받아 절 뒤쪽 비탈에 일구어 반야로차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밭을 가로질러 약수터로 방향을 잡으면 금방 다솔사에 이르겠지만 에둘러 가는 능선 길을 택했다. 숲의 호젓함을 좀 더 오래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소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하늘빛을 따라 능선에 올랐다. 부부로 보이는 등산객이 길을 물어 아는 대로 가르쳐줬다. 보안암과 약수터 갈림길까지는 2km 정도인데 이날 산행 중에 마주친 사람은 손꼽아 봐도 기껏해야 대여섯 명 정도였다.

봉명산 숲길에 누군가 쌓은 돌탑. 서봉암에서 다솔사 가는 숲길은 평탄한 산길이어서 누구나 걷기 좋은 길이다.
ⓒ 김종길

 


길은 내내 평탄했다. 전에 두어 번 이 길을 걸었는데 발에 감기는 길의 촉감도 여전했다. 산행이 아니라 산책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확할 것 같다. 혼자 걸으니 숲길이 적요하다. 새소리라도 들릴 법하지만 오늘따라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나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정성들여 쌓은 돌탑 무더기에 이르러서야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맞은편에서 오던 등산객이 '물고뱅이마을 둘레길'을 물었다. '물고뱅이라...' 처음 들어본다. 한참을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봉명산에서 1005번 지방도를 건너 물고뱅이마을에서 다시 봉명산으로 돌아오는 둘레길이었다. 근래에 생긴 모양이다.

고대 신전을 산중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기분... 보안암 석굴

갈림길이 나왔다. 곧장 가면 다솔사로, 왼쪽으로 빠지면 약수터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굽어 들면 보안암 가는 길이다. 생각 끝에, 500m 거리에 있는 보안암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와 약수터를 거쳐 정상에 오른 후 다솔사로 내려가는 걸로 작정했다.

보안암 가는 오솔길도 퍽이나 운치가 있다. 하늘을 향해 적당히 솟은 소나무 아래로 그만그만한 풀과 나무들이 섞여 있는 조붓한 길이다. 걷는 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무념이 찾아온다. 그 적요함을 깨는 건 눈앞을 가로막는 높다랗게 걸린 돌 층계와 그 위로 고대의 신전 같은 돌 축대다. 마치 고대의 신전을 산중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누가 쌓았는지 산중의 돌담 치고는 제법 규모가 있고 옹골진 것이 묘하다.

푸르다 못해 검은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돌담 아래서 잠시 마음을 여민다. 암자로 오르기 위해서는 이 돌담 아래를 에둘러 가야 한다. 백중날을 맞아 찾아온 객들의 도란도란 말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한낮의 암자 뜰에는 아직은 강한 햇살이 부딪혔다. 비구니 스님이 계신 모양이다. 정갈하다.

보안암 석굴은 뒷산의 경사면을 'ㄴ'자 모양으로 파낸 자리에 널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다.
ⓒ 김종길

 


석굴은 뒷산의 경사면을 'ㄴ'자 모양으로 파낸 자리에 널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다. 이 널돌은 점판암으로 결 따라 깨진 조각이어서 별도로 다듬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다. 암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다. 석굴의 크기는 정면 9.4m, 측면 6.6m, 높이 3.5m 정도다. 고려 말에 승려들이 수행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석굴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16나한상이 좌우에 안치돼 있다. 나한상은 제각기 다른 모습인데, 오른쪽의 한 구가 보이지 않는다.

흔히 '군위삼존석굴'을 제2의 석굴암이라 한다. 실제 안내판에도 그렇게 돼 있다. 그러나 군위석굴은 천연절벽의 자연동굴을 약간 확장한 것으로 이곳 보안암처럼 건축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경주 석굴암도 인공석굴임을 감안한다면 규모도 작고 다소 투박하지만 돌을 쌓아 만든 보안암이야말로 제2의 석굴암으로 불릴 만하다.

보안암석굴은 다소 투박하지만 돌을 쌓아 만든 '제2의 석굴암'이다.
ⓒ 김종길

 


경주 석굴암이 귀족적이라면 보안암석굴은 민중적이다. 세련된 미의 극치인 석굴암의 불상에 비해 보안암의 그것은 질박하다. 세련되고 미끈한 석굴암의 불상과는 달리 동네 아저씨 같은 보안암의 불상은 친근하기 그지없다. 얼굴도 파손되어 군데군데 시멘트로 보수를 했다. 그래서일까. 우리네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이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약수터로 발길을 돌렸다. 사방 숲에 둘러싸인 이 약수터는 인적조차 드물다. 여름 땡볕이 울창한 수림에 가리고 자는 바람도 여기선 깨어난다. 하늘이 샘에 잠겼는가 싶더니 샘 바닥에 깔린 자갈돌마저 푸른빛이다. 물이 맑다 못해 보는 눈이 시릴 정도다. 졸졸졸 물소리와 흘러내리는 물줄기만 아니었다면 그 존재조차 몰랐을 테다. 새벽 토끼도 세수하러 왔다가 물빛이 너무 맑아 손을 담그지 못하고 물만 먹고 갔으리라.

이 산중 숲속 옹달샘에 거대한 지붕이 생겼다. 예전에는 돌담으로 정성스레 쌓은 샘과 한쪽 구석에 삿갓만 한 앙증맞은 나무지붕만 있었다. 빗물이나 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을 씌웠겠지만 주변을 압도해버리는 구조물에 씁쓸하고 애통하다. 숲속 옹달샘이라는 낭만과 호젓함이 사라지고 그저 물 마시는 흔하디흔한 약수터로 된 것이다.

2008년 7월의 약수터 모습과 현재의 모습
ⓒ 김종길

 


봉명산 408m. 여태까지의 부드러운 육산이 정상에 다다르자 단단한 암산으로 바뀌었다. 마치 봉황이 짝 펼친 부드러운 날개 위를 그동안 걸어온 것이라면 이제는 단단한 머리 위를 오르는 듯하다. 길도 몇 갑절이나 힘들어진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에고' 숨을 고르게 된다.

이곳에는 유독 봉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봉황이 울었다는 봉명산, 봉황이 알을 낳았다는 봉알자리, 봉황이 깃들었다는 서봉암... 그래서일까. 절의 이름도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다솔사이고 인근 은사리에는 세종과 단종 태실지가 있었다.

정상에는 높다란 정자가 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니 다도해의 풍경이 펼쳐진다. 남으로 금오산, 서쪽으로 백운산, 서북으로 지리산 웅석봉이 보이다고 하나 소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점점 다도해의 풍경만 해도 넘치고 넘친다.

봉명산 정상(408m)에 서면 다도해의 풍경이 펼쳐진다.
ⓒ 김종길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정상에서 다솔사로 가는 길은 제법 경사가 심하다. 행여 미끄러질 세라 소나무가 제 뿌리를 엮어 자연 층계를 만들어놨다. 강진의 다산초당 오르는 길에 봤던 그 '뿌리의 길'이다.

저 아래로 다솔사가 보였다. 고색창연한 사찰은 아니지만 그윽한 자연 속에 자리한 산사는 고요했다.

소나무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오르는 절집, 다솔사

'다솔.' 참 예쁘다. 이름만 들어도 괜히 설렌다.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소나무가 많아서일까. 차나무가 많아서일까. 많이 거느려서일까. '솔(松)'과 '솔(窣)'의 음과 '다(多)'와 '다(茶)'가 주는 음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주가 다솔사가 아닌가 싶다. 절의 내력이야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의미라고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제대로 뜻만 안다면 자신의 느낌대로 이 산사를 기억하는 것도 좋으리라.

다솔사로 가는 길은 솔숲이 울창하다. 마치 소나무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산사로 오르는 기분이다.
ⓒ 김종길

 


다솔사는 지금이야 차로 휑하니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예전에는 길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인 고은은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에서 하동을 찾아 장바닥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다솔사로 걸음을 놓았다. 고은은 "정작 다솔사는 다솔사역에서 멀다. 그 먼 산길을 터벅터벅 올라가면 퇴락할 대로 퇴락한 고찰이 있는데 그것이 다솔사다"라고 말했다.

시인의 말대로 버스도 자주 없던 그 시절, 다솔사에 가려면 다솔사역에 내려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야 했을 것이다. 산사가 그대로 역 이름이 된 다솔사역도 2007년 6월부터 기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 됐다. 이젠 다솔사에 가려면 자가용을 이용하거나 버스로 곤양터미널로 가거나 기차로 완사역에서 내려 하루 몇 대 오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2007년 6월부터 기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 된 다솔사역
ⓒ 김종길

 


다솔사는 얼핏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솔숲이 장관이다. 절을 지키는 소나무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르는 길은 든든하고 눈맛이 시원하다. 중간 중간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있어 숲을 한층 풍요롭게 한다. 주말이면 오가는 차들로 숲의 고요는 쉽사리 깨지지만 평일에는 그럭저럭 숲길만의 한가함을 느낄 수 있다. 울울창창한 숲길을 따라 절집을 오르다보면 '어금혈봉표(御禁穴封標)'라 적힌 바위가 나온다. 1890년 고종 때 어명으로 경상도 진주관아 곤양읍성에서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 혈(묘자리)을 금지한 표석이다.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이라는 내력만큼 산중의 그윽한 산사다. 절이 창건됐던 지증왕 때는 영악사로 불리다 의상대사가 영봉사라 했다가 도선국사가 지금의 다솔사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숲길이 끝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지만 매번 이 주차장에 이르러 산사로 오르는 호젓함은 여지없이 끊겨버린다. 고요가 싹둑 잘려나간 생채기에 허연 생살이 아프다. 아래 휴게소의 주차 공간만 해도 충분한데...

<독립선언서> 초안과 <등신불>이 탄생한 이곳

층계를 밟아 오르면 육중하면서 고졸한 멋이 있는 대양루가 눈길을 끈다. '큰 볕이 내리는 누각'인 만큼 언제나 햇볕 넘치는 루(樓)다. 대양루 옆에는 샘이 졸졸졸 솟아나고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퍽이나 아름답다. 아마 이 공간이 다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일 게다. 나지막이 층층 쌓아 올린 돌층계가 앙증맞고 기왓장으로 문양을 낸 흙담으로 향한 시선을 따라가면 짙은 숲 사이의 적멸보궁에 이르게 된다.

대양루 옆에는 샘이 졸졸졸 솟아나고 단풍나무가 어우러져 퍽이나 아름답다. 여행자가 다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는 곳이다.
ⓒ 김종길

 


살짝 층계를 디뎌 대양루 안을 들여다본다. 2층인 대양루는 아래쪽 기둥들은 휘어진 대로 그대로 쓰고, 대신 위쪽 기둥은 잘 다듬은 목재를 사용했다.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다. 대양루 법고에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해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다솔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대양루는 지금은 퇴락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민족정신 함양의 도장이었다.

대양루 맞은편이 적멸보궁이다. 원래는 대웅전이었는데, 1979년 응진전을 수리하다가 탱화 뒤 벽에서 사리가 발견돼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증개축한 뒤 불사리를 모시게 됐다고 한다. 적멸보궁 옆에는 파괴돼 형체를 알 수 없는 탑 한 기가 있다. 처음 불사리 108과가 이곳 탑에 모셔졌던 것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응진전 탱화 뒤 벽으로 옮겼다고 한다.

적멸보궁 안에는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의 모습인 와불상이 있다. 법당에서 보면 뚫린 벽면으로 사리탑이 보인다. 소원을 빌며 탑 주위를 빙빙 도는 사람들이 정성스럽다.

다솔사 적멸보궁은 원래 대웅전이었다가 불사리를 모시면서 적멸보궁이 되었다.
ⓒ 김종길

 


법당 옆 응진전은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1930년대에 만해 한용운이 수도하면서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다솔사를 거쳐 간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만해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때 12년간 이곳을 왕래하면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고 항일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했다. 그가 머문 곳이 요사채 '안심료(安心寮)'이다.

안심료는 또한 소설가 김동리가 1960~1961년 동안 머물면서 <등신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김동리는 효당 스님이 '광명학원'이라는 야학을 세우자 야학교사로 부임하여 다솔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때 대양루가 수업장소였다고 한다. 그 후 만해로부터 중국의 한 살인자가 속죄를 위해 분신 공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뒷날 '등신불'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등신불'의 배경이 다솔사이다.

이외에도 불교철학을 연구하는데 힘쓴 김범부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효당 최범술, 김법린 등이 이곳을 거쳐 갔다. 특히 다솔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난 최범술은 60년 가까이 이곳에 머물면서 절 뒤쪽 비탈에 차밭을 일구었다. 지금도 차밭이 적멸보궁 뒤로 넓게 펼쳐져 있다. 흔히 다솔사는 '다사(茶寺)'로 불리며 차로 유명한데, 이는 독립 운동가로 나중에 출가를 해 스님이 된 효당 최범술이 만들어낸 '반야로차' 때문이다. 효당의 부도는 다솔사 입구 휴게소 언덕배기에 있다.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어서 초안을 작성하고 김동리가 '등신불'을 집필했다는 안심료
ⓒ 김종길

 


 

시계방향으로 어금혈봉표, 황금공작편백, 효당 최범술 부도, 대양루 내부
ⓒ 김종길

 


안심료는 그럭저럭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만해와 김동리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들의 이곳에서의 행적을 소개하는 푯말만 툇마루에 이리저리 있을 뿐이다. 안심료 앞에는 만해가 자신의 회갑을 맞은 1939년 김범부·김법린·최범술·허백련 등과 함께 심었다는 황금 편백나무 세 그루가 있다. 황금빛 잎사귀를 가지고 있어 '황금공작편백'으로 불리는 이 세 그루는 훤칠하니 잘도 생겼다.

절 아랫마을까지 걸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숲을 나와 아스팔트길을 걷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따금 차들이 쌩쌩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면 노랗게 꽃을 피우는 모감주나무에 꽈리모양의 열매가 열렸다. 버스 도착 예정 시각은 오후 3시, 곤양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시각이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겨우 알아낸 버스 시각. 터미널에서 다솔사까지는 10여 분 걸릴 거라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마을에 다다르자 다리 힘이 스르르 풀렸다. '노량 23.6km, 합천 (율곡) 97.3km. 이순신 백의종군로'라고 적힌 표지석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렌즈로 버스가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카메라에서 얼른 눈을 뗐다. 버스가 온 시각은 오후 3시 4분. 10여 분 걸릴 것이라 예상하고 늑장을 부렸다면 버스를 놓쳤을 것이다.

곤양터미널에서 다솔사를 거쳐 완사로 가는 시내버스는 하루에 대여섯 번 다닌다.
ⓒ 김종길

 


승객은 단 한 명, 아주머니 한 분. 기사에게 하마터면 놓칠 뻔한 버스에 대해 얘기했더니, 기사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버스는 원전을 지났다. 이때가 오후 3시 10분쯤이었다(곤양과 완사의 중간쯤에 있는 원전은 완사에서 15리의 거리에 있어 십오리원이라고도 불렸다. 이순신이 합천 삼가에서 노량으로 백의종군할 때 수군의 패보를 들은 십오리원이 바로 지금의 원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지난 9월 1일의 기록입니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코레일에도 실렸습니다.

☞ 완사 오일장은 1일과 6일에 열리며 피순대와 소고기(국밥)가 유명하다. 완사시장은 완사역에서 500m 정도로 도보로 5분 거리다. 사천시 곤명면 정곡리 842에 있다. 특산품으로는 녹차인데, 시장에서 1.7km 떨어진 곳에 대규모 녹차밭인 사천녹차원 다자연이 있고 다솔사와 서봉암에도 녹차밭이 있다.

기차를 타고 완사역에서 내렸다면 서봉암까지는 완사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완사에는 택시가 단 두 대밖에 없다. 요금은 11000원 정도다.

서봉암에서 다솔사까지는 약 3.7km정도이나 산길이 아주 평탄해 누구나 걷기 좋은 숲길이다. 약수터로 질러가면 2.2km다. 아니면 시내버스로 다솔사까지 가면 된다. 다솔사에서 보안암을 지나 서봉암까지 갔다가 약수터 지름길로 다시 다솔사로 돌아오는 산행을 택해도 좋다.

곤양-다솔사-완사 시내버스 시간표

곤양(출발)

다솔사(경유)

완사(출발)

8시 40분

8시 43분

9시

11시 40분

11시 43분

12시

-

-

13시 10분

14시 20분

14시 23분

-

15시

15시 3분

15시 20분

19시 10분

19시 13분

19시 30분

 

 

※ 곤양에서 출발한 버스는 다솔사를 거쳐 완사에 도착한 후 위 시간에 다시 완사를 출발하여 다솔사를 거쳐 곤양으로 되돌아간다.(적어도 버스시간 10분 전에 나가서 기다리는 게 좋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