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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기행

마산골목길탐방. 걷는 재미가 쏠쏠하네!

 

 

 

마산골목길탐방, 걷는 재미가 쏠쏠하네!

-3.15의거와 부마항쟁의 산실, 창동 오동동 일대를 걷다

 

이튿날 불종거리를 다시 찾았다. 예전 이곳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야말로 집촌이어서 불이 났을 때 종을 쳐 대비했다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은 거리 가운데에 종 조형물을 만들어 옛날을 기억하고 있다. 이날 마산골목길 탐방은 지역사학자인 박영주 씨의 안내로 더욱 알찬 탐방이 되었다.

 

▲ 불종거리에서 마산 골목길 탐방은 시작되었다.

 

처음 들른 곳은 옛 시민극장 건물이다. 지금도 외관은 극장의 흔적이 남아 있고 뒤쪽으로는 옛 적산 건물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1907년에 마산민의소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마산구락부에서 1935년 일본인이 인수하여 해방 전까지 공락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됐다가 1995년 시민극장이 됐다. 한때 마산 출신의 유명한 시인 이선관 씨의 부친이 지배인으로 있었다고 한다.

 

▲ 옛 시민극장(공락관, 민의소 터)

 

시민극장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15일경 이곳도 학살의 피비린내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마산, 함안, 고성, 창원 등지의 보도연맹원들을 시국강연을 한다고 속여 이곳 시민극장과 국제극장(구 강남극장)에 모이게 한 후 마산형무소로 사람들을 옮겼다. 그 후 1681명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 마산에서 제일 오래된 서점 학문당의 2대 사장 강임석 씨

 

마산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서점 학문당은 1955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지금은 2대 사장인 강임석 씨가 운영하고 있다. 요즘처럼 출판계와 서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버텨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서점 안에는 지하까지 있는데 그 언저리는 뒤에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

 

▲ 창동예술촌 벽에 걸린 옛 학문당 사진

 

창동 네거리는 마산 현대사의 현장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와 1979년 부마항쟁의 현장이다. 당시 가장 번화했던 창동 네거리는 땅값이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곳에 자연 사람이 모이고 그것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창동 네거리는 4.19의거와 부마항쟁 등 마산 현대사의 현장이다.

 

▲ 소담 노현섭 선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박영주 씨

 

고(故) 소담 노현섭 선생은 외지인들에겐 낯선 인물이다. 여행자도 그랬다. 소담 선생은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4.19혁명 이후 보도연맹 등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에 뛰어들어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를 결성한 데 이어 전국유족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노동운동가이자 진보정치인이었다.

 

▲ 마산 최조의 레코드 가게 명곡사

 

마산 최초의 레코드 가게였던 명곡사는 지금도 LP판 등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아쉽게도 이날은 가게 문을 열지 않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  부마항쟁 기념비가 들어설 예정지인데 최근 마산합포구에서 허가 취소를 통보해 논란이 되고 있다.

 

창동, 오동동 일대를 돌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근대유산과 3.15의거, 부마항쟁 등 마산의 역사를 드러낼 수 있는 조형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표지석 정도인데 그것도 바닥에 조그맣게 새겨져 있거나 한쪽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와 더불어 부마항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근데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그 현장엔 변변한 기념비조차 없다는 것... 다행히 박영주 씨가 안내한 곳은 부마항쟁 기념비를 세울 예정지였다. 옛 남성파출소 맞은편인 이곳은 부마항쟁 당시 치열했던 현장이다. 신마산청소년공원에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다고 했다. 그나마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 다행이다. 근데 최근 이 부분에 대한 잡음이 들려온다. 안타까운 일이다.

 

▲  조창 터(제일은행 자리)는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마저도 주차를 한 차에 가려 있다. 마산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마산창의 흔적이 이렇게 외면 받고 있는 게 안타깝다.

 

창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조창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마산창은 1760년 전국 조창이 설 때 설치되었으며 모두 8동 53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박영주 씨가 안내를 하지 않았다면 조창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창 터를 알리는 기념비 앞에 누군가 차를 세워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주차선이 있으니 차를 세운 사람은 문제가 없다. 다만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면밀히 살피지 못하는 행정이 아쉽다.

 

 

                                  ▲  인간도서관 책사랑 자리, 김용택 선생님이 일행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골목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함께했던 김용택 선생님이 기억하고 있는 인간도서관 책사랑이 있었던 자리였다. 87년도에 처음 생긴 이 도서관은 당시 도서관 진보 운동의 일환으로 김용택 선생, 이선관 시인 등이 주도했다고 한다.

 

 

▲ 남성동성당

 

남성동파출소를 지나 성당과 우체국을 둘러보았다. 1951년 7월에 마산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는 남성동 성당의 건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 원동무역주식회사 터

 

원동무역은 1928년에 준공한 건물로 원래는 2층이었는데 현재는 증축하여 3층이 되었다. 외관은 변화되었으나 그 골조는 옛 식 그대로여서 그나마 마산의 근대건물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원동무역은 초대 마산부윤(시장)을 지낸 옥기환 선생과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명도석 선생이 마산 최초로 설립한 회사다. 이 회사에서 남긴 수익의 일부가 백산 안희제 선생과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한다.

 

▲ 1928년에 준공한 원동무역 건물은 외관은 변했지만 그 기본 형태는 아직까지 남아 있다. 원래는 2층 이었는데 뒤에 3층으로 증축되었다.

 

눈에 보이는 마산의 근대유산으로는 원동무역과 삼광청주 등을 겨우 꼽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삼광청주 건물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결국 헐어졌다. 인천, 군산, 목포 등에 남아 있는 근대유산들이 이 도시들의 유산과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되는 반면 도시 변화가 급격했던 마산에선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애통한 일이다.

 

▲ 옛 삼성병원(한국투자증권) 자리와 옛 마산시외버스터미널(경남은행) 자리

 

1918년에 세운 옛 삼성병원은 대광예식장을 거쳐 지금은 한국투자증권이 자리하고 있다. 마산 최초의 한국인 의사였던 김형철 씨가 처음 병원을 연 곳이라고 한다. 그 옆 경남은행 건물은 1965년까지 마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던 자리다. 함께한 이춘모 선생은 예전 이곳에서 버스를 탔던 기억을 되살렸다.

 

 

마산에선 적산 등 옛 유산들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한번 흔적이라도 보이는 것도 많이 변형되거나 원형이 훼손되어 있었다.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 오동동 3.15의거 발원지

 

오동동 바닥에는 3.15의거 발원지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 옆 건물이 1960년 3.15의거 당시 민주당 마산당부가 있던 곳이다. 이승만 정권이 대통령선거에서 온갖 부정선거를 일삼자 민주당원들이 이에 항거하여 거리로 뛰쳐나감으로써 3.15의거의 도화선이 된 역사의 현장이다. 그날의 발원지를 기념하여 이곳에 조형물을 새겼다.

 

▲ 3.15 당시 민주당 마산당부가 있었던 건물

 

▲ 국민애창곡이었던 '오동동 타령'의 무대가 바로 이곳 오동동이라고 한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야' 간판이 이채롭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야~.” 국민애창곡이었던 '오동동 타령'의 무대가 바로 이곳 마산 오동동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엔 가라오케 등 유흥시설이 많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간판 하나, ‘오동추야 달이 밝아’가 보인다.

 

▲ 통술거리

 

이 뿐만 아니라 마산 오동동은 '아구찜'과 통술거리가 유명하다. 예전에는 이곳에 요정이 많았었는데, 문신도 요정을 드나들었다고 하니 당시 요정은 문인과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던 모양이다. 일종의 살롱인 셈이다.

오동동 일대는 예전 룸싸롱이 즐비했다고 한다.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하다 보니 주변의 옷가게들도 밤늦도록 가게 문을 닫지 않았다. 술집여자들이 새벽에 일을 끝내고 그제야 옷을 사는 등 쇼핑을 했기 때문이란다. 90년대 까지만 해도 밤에 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의 거리였던 것이다.

 

▲ 통술문화골목에선 화려하고 예쁜, 그래서 지저분한 곳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과 지역민들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공공미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통술은 진주의 실비, 통영의 다찌와 더불어 경남의 3대 술 문화로 특징짓는다. 술만 시키면 갖은 안주가 무한정 나오는 경남 특유의 술집이다. 물론 술값만 내고 안주 값은 따로 계산하지 않는다. 오동동에는 통술 문화골목이 있다. 거기에선 화려하고 예쁜 벽화가 아닌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공공미술을 엿볼 수 있다.

 

▲ 옛 마산형무소 터

 

골목길 탐방은 옛 마산형무소 터에서 끝이 났다. 1909년 지금의 터에 부산감옥 마산분감이 들어서 현재의 회성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있었다.

 

▲ 이 간판 재미있다. 소 팔아서 어디로 가나... 이 간판만으로도 재밌는 글 한 편 쓰겠다.

 

최근 창원시 마산합포구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로 일제강점기 군국가요 가사를 쓴 반야월을 기념하기 위해 '산장의 여인 노래비 건립과 공원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무리가 따르고 있다. 예전 친일파로 분류된 이원수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다 시민반대로 포기한 바 있는데 다시금 이러니 참 모를 일이다.

 

▲ 마산골목길탐방은 마산의 역사와 지역민들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창동예술촌과 함께 문화해설사를 두어 골목길 탐방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좋겠다. 물론 많은 점이 보완되어야겠지만...

 

마산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원은 바로 3.15의거와 부마항쟁이다. 외따로 떨어진 곳의 기념관보다 시민들과 외지인들이 자주 찾는 이 창동, 오동동 일대에 각종 조형물과 기념관을 짓는다면 통합 창원시의 또 다른 경쟁력이 될 게 분명하다. 이제 민주주의의 역사도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열린 사고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 예술인들의 아지트 만초집이 있는 골목길

 

 ※ 창동, 오동동 일대는 행정구역상 창원시 마산합포구이나 이 글에서는 '마산'으로 표현했음을 일러둡니다

 

                       추천은 새로우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