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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영암사지! 전국을 다녀도 이만한 절터 없더라

 

 

 

영암사지, 전국을 다녀도 이만한 절터 없더라!

- 영암사지,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넋을 잃다

 

절은 망하고 터만 남은 곳. 흔히 폐사지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영화롭던 옛 역사는 몇몇 석조물 따위에만 겨우 흔적을 드러내고 너르고 허허로운 절터만 남겼다. 그 헛헛함과 허무함에 때론 깊은 무상에 침잠해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보기도 한다. 사라진 것과의 대화. 자신을 응시하는 곳.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역설을 옛 절터에서 읽을 수 있다.

 

▲ 석축을 사진에 담고 있는 보라미랑님

 

무던히도 다녔다. 강원도 양양 진전산지와 선림원지, 강릉 굴산사지,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여주 고달사지. 충청도 서산 보원사지,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 경상도 경주 황룡사지와 분황사지... 이 많은 곳을 둘러보아도 영암사지만큼 강한 끌림을 주는 폐사지는 없었다.

 

▲ 영암사지는 그 절터도 보배롭지만 하얀 빛을 내는 모산재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더욱 황홀하다

 

대체 어떤 폐사지이기에 이토록 여행자의 마음을 잡을까? 여느 절터처럼 영암사지도 몇몇 흔적들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남아 있는 유물들이 워낙 탄탄하고 보배로워 잠시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절터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산재의 하얀 빛 화강암 바위산은 그 이름처럼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 영암사지의 석축은 불국사의 그것처럼 장대하다. 석축을 사진에 담고 있는 보라미랑님

 

황매산 철쪽제가 열리면서 영암사지도 이젠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이 끝나고 예전에 있었던 두 채의 민가도 철거되어 지금은 옛 영암사의 영화를 읽어낼 수 있다. 영암사지는 아래 석축에서 올라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거대한 성벽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는 석축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깊은 산중에 이렇게 웅장하고 정교한 석축이 있으리라고는 쉬이 상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행한 일행 중 한 명은 이곳을 '잉카의 마추픽추라든가 밀림에서 발견한 고대의 신전처럼 경이로움을 표하기도 했다.

 

▲ 금당 터의 면석에는 사자상이 조각돼 있다

 

영암사지에 남아 있는 석축은 불국사 등에서 볼 수 있는 유물과 흡사하다. 석축에는 쐐기돌을 박아 단조로움을 피하고 돌들이 밖으로 불거지지 않도록 했다. 석축의 상단은 회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사지, 황룡사지 등과 같이 평지사찰에 회랑이 있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불국사나 이곳 영암사지처럼 산지사찰에서 보이는 회랑은 이 두 사찰이 평지사찰에서 산지사찰로 가는 과도기의 사찰이었다는 걸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 모산재와 쌍사자석등, 무지개돌계단은 한폭의 그림이다

 

영암사지는 하대신라에 창건된 절로 보고 있다. 절터에 남아 있는 유물과 서울대도서관에 남아 있는 '적연국사탑비'의 탁본에 의해서다. 적연국사(932~1014)가 고려 현종 5년(1014)에 향년 83세로 영암사에서 입적하여 영암사 서쪽 산중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영암사라는 절 이름이 확인되었고 이 절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절터에서 도편이 나왔는데 분청사기까지만 있었다고 하니 절이 폐사된 것은 조선 초로 추측된다.

 

▲ 가회면사무소에 있는 허 면장 송덕비. 허 면장은 마을사람과 함께 일본인들이 쌍사자석등을 훔쳐가자 되찾아왔으며 한국전쟁 당시 많은 인명을 살려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영암사지가 지금의 모습을 간직한 데는 가회면 주민들의 공이 크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현 영암사지의 석등을 일본인들이 밤에 몰래 훔쳐가는 것을 당시 가회면장 허 씨와 마을 주민들이 의령군 대의까지 쫓아가서 찾아 왔다. 그리고 면사무소에 있던 석등을 1959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에 세웠을 뿐만 아니라 쓰러졌던 삼층석탑을 바로 세웠고 마을의 옛집 두 채를 옮겨와 절터를 지켰다. 흙 속에 파묻혀 있던 금당 터도 역시 마을 주민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영암사지의 백미 쌍사자석등과 통돌을 깎아 만든 무지개돌계단

 

▲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6> 권의 표지 모델이 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석축 옆을 돌아가면 영암사지의 명물 석등을 만나게 된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권의 표지 모델이 바로 영암사지 석등이다. 석등 자체의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도드라진 석축과, 석등을 중심으로 펼쳐진 모산재의 화려한 자태가 있어 더욱 돋보이게 된다. 자칫하면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석등은 성벽의 치(雉)처럼 돌출된 석축을 쌓아 세움으로써 멋진 무대를 만들어 준 셈이다. 게다가 모산재라는 한 폭의 산수화를 무대그림으로 삼았으니... 이보다 화려한 무대는 없을 것이다.

 

▲ <천령의 구도> 석등 사이로 본 삼층석탑... 예전 여행자가 이 앵글을 처음 올린 후 이젠 제법 많이 알려져 영암사지 사진에서 이 구도를 흔히 볼 수 있다

 

석축의 층계를 조심조심 오르면 금당 터다. 금당 터로 오르는 돌계단도 주연 석등의 멋진 조연 역할을 한다. 통돌을 무지개처럼 둥글게 깎아 만든 그 솜씨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폭이 좁아 옆으로 오르지 않으면 발뒤꿈치는 허공에 뜨게 된다. 이 계단을 오르면 누구든 마음이 경건해지고 외경을 따를 수밖에 없다. 예전에 난간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붙잡을 수 없으니 오르는 동안 마음을 다잡는 도리밖에 없다.

 

 

 

금당 터에 올라 석등을 다시 본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쌍사자의 엉덩이는 아이의 엉덩이만큼 귀엽다. 금방 입이라도 갖다 대어 뽀뽀를 하고 싶을 정도다. 석등 사이로 삼층석탑을 보면 절묘하다. 이곳이 고향인 여행자가 수십 번 석등을 살펴보다 처음 이 앵글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대단했다. 그 후 이 앵글은 많은 이들이 즐겨 사용하여 제법 알려져 있다. 특허라도 받을 걸 그랬나. 허허!

 

              ▲ 석양이 지는 쌍사자석등과 모산재(옛 사진)

 

            ▲ 석등을 바치고 있는 쌍사자의 엉덩이가 토실하면서도 섹시하다. 만지고 싶어 자꾸만 손이 간다

 

▲ 금당 터 옆 층계에 있는 천상의 새 가릉빈가 조각

 

석등 뒤로 금당 터다. 법당으로 드나들던 계단의 소맷돌은 부셔졌지만 그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정면 소맷돌에는 구름 위를 나는 용이 조각되어 있고 옆면 소맷돌에는 사람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는 가릉빈가가 보인다. 지금이라도 푸드덕 날개를 펼쳐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천상을 날아오를 듯하다.

 

▲  금당 터 옆면 면석에 새겨진 복슬강아지처럼 생긴 사자

 

기단 면석에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한 마리씩의 동물을 돋을새김 했다. 특히 귀여운 복슬강아지로 보이는 조각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실 이 조각은 사자 조각상이다. 인도에서 코끼리, 말, 소와 더불어 사성수(四聖獸)의 하나인 사자는 금당을 지키는 영물인 셈이다.

 

▲ 이 익살스런 표정에 절로 빙그레 웃게 된다

 

복슬복슬한 이 사자와는 달리 반대편 사자는 한 발을 치켜들고 고개를 홱 젖혀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다. 다른 사자상은 얼굴이 마모되어 자세하지는 않으나 두 발에 턱을 고이고 있다. 대신 뭉툭한 꼬리만은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금세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 듯하다.

 

▲  금당 터 왼쪽 옆면에 새겨진 사자의 꼬리. 금방이라도 꼬리를 내칠 것 같다

 

금당 터의 조각은 이뿐만 아니다. 네모진 모양으로 보아 불상이 자리했던 지대석으로 보이는데, 이곳에도 섬세한 조각이 있다. 사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곳의 조각은 놓치기 십상이다.

 

금당 터 안 불상이 자리했던 자리의 지대석에 새겨진 팔부중상. 한 뼘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이런 조각을 새길 생각을 한 석공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

 

원래는 바깥 지대석을 돌아가며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뒤편에서 그 일부를 볼 수 있다. 지대석에 새겨진 조각은 팔부중상이다. 그중 하나는 그 조각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한 뼘도 안 되는 이 좁은 공간에 조각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금당 터 옆으로 난 길을 몇 발자국 가면 흔히 '서금당터'라고 불리는 곳이 나온다. 사방 숲에 둘러싸인 이 공간에는 깊은 고요가 흐른다. 빈터에는 건물이 들어섰을 공간이 있고 그 좌우로 귀부가 있고 앞에는 지대석과 하대석만 남은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 서금당터(조사당) 가는 길에서 본 금당 터

 

 

               ▲  금당 터의 옛 사진. 2차 발굴 전이라 지금과는 달리 민가 두 채가 보인다

 

건물터 좌우로 귀부(돌거북)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사당이 있던 곳으로 보고 있다. '서금당터'라는 이름은 앞에 있는 금당 터의 서쪽에 있다 하여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다. 귀부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데, 북쪽의 거북은 조각이 아주 뚜렷한데 비해 남쪽의 것은 새김이 깊지 않고 무늬가 닳아 희미하다. 귀갑문이 선명한 북쪽의 귀부에는 비좌의 양옆에 물고기를 조각해 두었다. 한쪽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있고, 다른 쪽은 입을 벌려 연꽃 비슷한 것을 다투고 있다.

 

▲ 서금당터에 있는 북쪽의 귀부. 조각이 아주 뚜렷하고 비좌에 물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남쪽의 귀부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본다

 

목을 바짝 세운 남쪽의 귀부는 전체적으로 조각이 섬세하지 못하나 그 기운만큼은 당당하다. 여의주가 훤히 보이는 입안에서 금방이라도 큰 소리를 지를 것만 같다. 아무래도 북쪽의 거북이 남쪽의 거북보다 앞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탑비가 있었다면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었겠지만 이 두 귀부는 영암사를 창건한 개창조와 중건한 중창조의 탑비로 추정되기도 한다.

 

▲ 서금당터에 있는 남쪽의 귀부. 북쪽의 귀부에 비해 섬세하지 못하나 그 기운만큼은 당당하다

 

☞ 현재 영암사지는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있다. 사적 제131호로 지정돼 있다. 보물 제489호인 귀부, 보물 제353호인 쌍사자석등, 보물 제480호인 삼층석탑 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 '영암사'라는 절 이름이 보이는데, 흥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진 점과 이곳에서 8세기 경의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절의 창건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빼어난 풍광의 모산재와 그 아래 깊숙이 자리한 절터 자체가 보물이다.

 

▲ 서금당터에는 깊은 고요가 흐른다. 건물 터와 귀부 두 기, 석등 한 기가 모산재를 배경으로 숲속에 숨어 있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