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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 남도 800리

[경전선 800리] 가운데에 기찻길이... 시끌벅적 가야시장

 

 

 

가운데에 기찻길이... 시끌벅적 가야시장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② 아라가야의 역사가 깃든 함안

 

 

군북역에서 상하행선 기차가 동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기차를 잘못 탄 할머니들이 급히 바꿔타고 있다.
ⓒ 김종길

 

 

갑자기 기차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역무원이 큰소리로 외쳤다.


"하동 가는 기차인 줄 알고 타신 할머님들, 어디 계세요. 이 기차는 마산 가는 기차입니다. 어서 내리세요."

뒷자리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할머니 서너분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를 빠져나갔다. 하필 상하행선이 같은 시간에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일어난 촌극이었다. 기차는 다시 선로를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했다. 개양, 남문산, 갈촌, 진성, 반성, 수목원, 평촌, 원북, 군북… 정겨운 역들은 이름만으로도 옛 추억에 빠져들게 한다.

옥신각신, 왁자지껄 활기찬 가야시장

낮 12시 41분, 1시간여를 달린 끝에 함안역에 도착했다. 역사는 한산했고 타고내리는 승객들도 거의 없었다. 역 앞 식당에서 돌솥밥 한 그릇을 먹고 시장으로 향했다. 뜻밖에도 시장이름이 함안시장 아니라 가야시장이었다. 흔히 '00군'의 소재지하면 군 이름과 같은 '00읍'이지만, 엉뚱하게도 함안군에는 함안면이 따로 있고 소재지는 가야읍이다. 함안은 군과 소재지 이름이 같지 않은 보기 드문 지역이다.

함안역은 1923년 12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오는 12월이면 신역사로 옮긴다. 현재 경전선 복선 개통을 앞두고 KTX 열차의 함안역 정차 요구가 뜨겁다.
ⓒ 김종길

 


가야시장은 상설시장이자 5일과 10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 김종길

 


가야시장은 매일 장이 서는 상설시장이기도 있지만 5, 10일에 열리는 5일장이기도 하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 때문인지 시장 초입은 의외로 한산했다. 그런데 시장 안으로 들어설수록 사람들로 붐볐다.

"오늘은 장이 영 신통치 않아. 사람들도 별로 없고. 보통 때 같으면 손이 쉴 틈이 없지."

장사가 잘 되는지 묻는 여행자의 말에 물건을 매만지던 한 아주머니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여행자의 눈에는 시장이 활기차게 보였다. 특이한 것은 시장의 가운데를 기찻길이 지나가고 그 양옆으로 장이 길게 늘어섰다는 것이다. 시장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려면 기찻길 아래 뚫린 굴다리를 통과해야 했다.

가야시장은 철로 양옆으로 형성돼 있어 굴다리를 통해 왕래한다.
ⓒ 김종길

 


함안하면 제일로 치는 게 곶감이다. 파수곶감으로 대변되는 함안곶감은 예전에는 나라님께 진상까지 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근래에는 곶감과 더불어 수박이 함안의 명물이 되었다.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격으로 참외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아쉽게도 때가 때인지라 오늘은 수박만 겨우 몇 덩이 보일 뿐 시장의 나머지 주인공들은 볼 수 없었다.

철로변을 따라 형성된 시장 모퉁이는 노점상들의 차지다. 시장 안쪽과는 달리 이곳은 손님들이 뜸했다. 장사꾼들은 콩을 빼거나 채소를 다듬는 등 소일을 하며 손님을 기다렸다.

마늘을 사고파는 할머니들이 흥정을 하고 있다.
ⓒ 김종길

 


"아까는 오천원이라 하더니만. 인자 와 더 비싸게 말하노."

마늘을 사려는 할머니가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언제 그랬소. 그런 말은 한 적도 없는디…"

할머니 두 분이 마늘 한 접을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더니 흥정을 하던 할머니는 자리를 떴고 마늘을 팔던 할머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가로수에 기대어 잠시 쉬는가 싶더니 이내 허리를 곧추 세워 장사를 시작했다.

후텁지근한 날씨, 채소를 팔던 아저씨는 도로 한 쪽의 평상에 아예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손님도 없고 날씨마저 이러니 낮잠만큼 좋은 것은 없으리라.

고분군에 올라 옛 '아라가야'를 회상하다

그 어느 지역보다 치열했던 함안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12월에 세운 3.1독립운동기념탑
ⓒ 김종길

 


가야시장을 빠져나와 고분군으로 향했다. 가야읍의 군청 뒤편을 오르면 아라고분군이 나온다. 봉긋봉긋 솟은 고분들은 어찌 보면 조촐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풍요롭다는 생각이 든다. 전망이 꽤 뛰어난 이곳에 오르면 제일 먼저 3·1독립운동기념탑과 마주치게 된다.

경남에서 3·1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났던 칠북면 연개장터, 약 5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해 21명이 숨질 만큼 치열했던 군북·함안 등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67년 12월에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일제시대에는 '마산형무소는 함안사람의 재실'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함안의 독립운동은 그 어느 지역보다 치열했다.

3·1운동기념탑 바로 뒤로 고분이 이어진다. 이곳의 고분군은 사적 제84호인 말산리고분군과 제85호인 도항리고분군으로 나눠 불리다 2011년 7월 28일에 해제되어 사적 제515호인 '함안 말이산 고분군'으로 새로 태어났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사적 제84호인 말산리고분군과 제85호인 도항리고분군이 2011년 7월 28일에 해제되고 사적 제515호로 새로이 지정되었다.
ⓒ 김종길

 


고분군에서 본 가야읍 전경
ⓒ 김종길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고분은 3·1운동 기념탑 바로 뒤에 있는 고분이다. 봉토의 높이가 10m, 밑지름이 43m 정도라고 하니 실로 대단하다. 이곳에 올라 고분을 둘러싼 주변 지형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면 이 정도면 작은 부족국가 하나쯤은 경영할 만한 도읍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아라가야'. 그 이름만 들어도 예쁘고 아련하다.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고대의 나라이름이다. 문헌상 기록돼 있는 '안야국'이나 '안라국'이라는 이름이 맞다고들 하지만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은 아무래도 '아라가야'다.

4호분 옆 언덕에는 조금은 색다른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얼핏 보면 병이 들어 누렇게 변한 걸로 보이지만 실은 잎의 끝자락만 황금색인 소나무이다. '황금교송(黃金絞松)' 또는 '금송'으로 불리는 이 소나무는 솔잎 끝부분의 1cm 정도만 황금색이고 나머지는 녹색이다. 경북 울진지방에 이어 두 번째로 발견된 희귀한 소나무이다.

고분 옆 언덕에는 솔잎 끝 1cm만 황금색인 '황금교송'이라는 희귀한 소나무가 있다.(위 사진은 2009년 봄 촬영)
ⓒ 김종길

 


무덤 사이로 산책로가 나 있다. 멈춘 고대의 시간 사이로 현재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오늘에 지친 이들이 과거의 언덕에 잠시 몸을 비벼 지금 살아야 될 이유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

가야시장의 시끌벅적한 오늘도 이곳에선 고요해진다. 잿빛구름이 하늘을 덮어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할 즈음, 고분에 바람이 불었다. 무덤 한 귀퉁이에 서 있는 소나무가 간간이 제 몸을 흔들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700년 동안 잠들었다 다시 핀 '아라홍련'

박물관 가는 길은 고분을 따라가는 과거의 길이다.
ⓒ 김종길

 


고분의 내부를 보기 위해선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고분에서 내려다보면 박물관이 코앞이다. 함안박물관 입구 작은 연못에는 700년 전의 연꽃이 피어있다. 그중에서 검은 대형 화분에 핀 연꽃만 '아라홍련'이라고 한다. 박물관 직원의 말이다. '아라홍련'을 더 많이 보려면 박물관을 나와 주차장 끝에 있는 화장실 옆 시배지로 가면 된다.

그러나 가까이선 볼 수 없다. 온통 철책으로 둘러처져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역사성을 지닌 700년 전 아라홍련의 종근과 종자 유출을 방지하고 관광객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 참 멋진(?) 발상이다. 연꽃 때문에 사람이 상했다는 말을 내 들어본 적 없건만… 아무리 중한 거라도 지나치면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박물관 앞의 아라홍련 시배지는 철조망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 김종길

 


박물관 측에 의하면 2009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성산산성을 발굴하던 중 연씨 15알을 수습하게 된다. 농업기술센터에선 5알 중 2알 발아에 성공했고, 박물관에선 3알 중 1알을 발아시켜 싹을 틔웠으며 2010년 첫 꽃이 피었다.

농업기술센터는 그 중 2알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방사선탄소) 연대측정을 의뢰하였다. 그 결과 연씨 1알은 760년 전 고려 중기(1160~1300)의 것으로, 나머지 한 알은 650년 전 고려 후기(1270~1410)의 것으로 나왔다. 이후 '아라홍련'은 통상 700년 전 고려시대의 연으로 불리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연구결과는 연씨의 생명력을 약 1만 년으로 보고 있다. 보통의 연씨가 발아율이 100%에 가깝다면 아라홍련의 연씨 발아율은 33~40% 정도였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땅속 깊이 잠들어 있다 무려 7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꽃을 피웠다는 건 그 자체로 기적이고 경이로운 일이다.

박물관 입구에 핀 700년 된 아라홍련
ⓒ 김종길

 


아파트 공사 현장서 발견된 '말갑옷'... 기마병의 모습 떠올라

박물관은 덥고 습했다. 더위를 피해 안으로 들어왔지만 정작 실내가 더 더웠다. 에너지 절약 시책에 따른 것이라 어쩔 도리가 없단다.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참았다. 1층에는 아예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았다. 2층 전시실에도 한쪽 구석에 있는 에어컨 한 대가 전부인 모양, 힘겹게 돌아가고 있었다. 박물관의 입장료가 500원이니 이마저 감사해야 했다.

박물관 내의 유물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다양하지만, 가야 유물이 중심을 이룬다. 제일 눈길을 끈 건 말이산 고분군 북쪽 능선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말갑옷'이었다. 철기 가야 기마병의 당당한 모습이 오버랩 된다.

함안박물관은 가야시대의 유물이 주축을 이루며 그외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 김종길

 


또 다른 것은 '목간'과 '토기류'다.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목간은 약 280여 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양임과 동시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와 신라, 바다 건너 왜까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가야. 일본 열도 각지에서도 함안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늬에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관람이 거의 끝날 즈음 옛 농장을 재현한 장면이 여행자의 시선을 끌었다. 이른바 '함안농장 분규사건'이다. 일제시대 식량증산이라는 이름으로 개간한 가야·산인·대산·법수 일대의 경작지를 일러 '함안농장'이라 했다. 해방 후 함안농장은 당시 영남의 거부였던 하아무개씨의 소유가 되었는데, 해방 직후 당시 농토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한다는 소문에 하씨는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틈타 서둘러 농민에게 원가로 분매하였다.

그 후 토지정책이 변화하고 물가가 오르자 하씨는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계약서를 빼앗고 그 땅을 다시 새로운 소작인들을 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이 1974년 8월 가야읍 축암마을 벌판에서 땅을 지키기 위한 분규를 일으켜 땅을 되찾은 것이 일명 '함안농장 분규사건'이다.

함안농장 분규사건
ⓒ 김종길

 


박물관을 나왔다. 여전히 푹푹 찌는 날씨였다. 아내와 아이는 지쳐 있었다. 택시를 불렀다. 시장으로 돌아오니 갑자기 철로 주위가 부산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해지고 경찰과 역무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사방으로 손짓을 하자 사람들은 늘 겪는 일상인 듯 순식간에 철로 주위를 벗어났다.

잠시 후, '부아~앙'하며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쇳소리를 내며 기차가 달려왔고 거센 바람에 몸이 잠시 뒤뚱거렸다. 태풍처럼 바람을 몰고 눈앞을 지나간 기차는 희미한 꼬리만 남긴 채 점점 멀어져갔다. 건널목은 다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철길 좌우로 시장이 서는 가야시장엔 기차가 지날 때면 진풍경을 연출한다.
ⓒ 김종길

 


역을 향해 걸었다. 3시 28분, 기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난 8월 11일, 여행자는 다시 함안을 찾았다. 함안박물관에 다시 들러 지난 6월 30일에 제대로 피지 않은 '아라홍련'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날 무진정과 대산리석불, 악양루 등을 둘러보고 함안의 먹을거리로 유명한 '한우국밥촌'에서 소고기국밥을 맛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코레일과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기사원문보기) 가야시장은 함안역과 바로 붙어 있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함안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린다. 고분군을 산책한 후 바로 아래에 있는 함안박물관으로 걸어가면 된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