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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박물관

이런 부채도 있다니... 세상의 진기한 부채 다 모였네

 

 

 

이런 부채도 있다니... 세상의 진기한 부채 다 모였네

- 경남 의령 일준부채박물관

 

처음엔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수목원 한 구석에 있는 박물관이 뭘 그리 대단할까 여겼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입장료가 5000원이라는 말에 내심 불쾌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박물관에 들어서는 순간 그 삿된 마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애초 박물관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의령읍내에서 소바 한 그릇을 먹고 더위도 피할 겸 인근에 있는 목도 수목원으로 갔다. 나무 그늘 아래 오후 내내 늘어져 더위를 피할 요량으로 말이다. 수목원의 주차장은 금방 찾았는데 입구를 찾다 몇 번이나 허탕을 쳤다. 겨우 입구를 찾아 수목원에 올랐는데 이건 왠지 관리가 안 된 느낌이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더위 피할 곳을 찾고 있는데 마침 눈앞에 부채박물관이 보였다. 망설임 틈도 없이 박물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선생님으로 보이는 어른의 인솔 아래 관람을 하고 있었다.

 

   

 

일준부채박물관. 부채를 유심히 보고 있는데 박물관의 유일한 직원 허화자(71) 씨가 다가왔다. 부산시립미술관에 근무했던 허 씨는 수목원이 좋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의 소개로 우선 1층의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1층 전시실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친필 글씨

 

이곳 부채박물관에는 모두 600여 점의 부채가 있다. 그중 180종을 전시하고 나머지는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3.1운동 33인 중의 한 분인 오세창 선생의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미수 허목의 글

 

“일준 선생님이 누구십니까? 혹시 이곳에 계신가요?”

 

사실 1층만을 보았을 뿐인데(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2층에 전시된 작품은 상상을 초월했다.) 소장한 작품을 보고 문득 박물관의 주인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지금 바깥에서 풀을 뽑고 있을 겁니다. 금방 나가셨거든요.”

 

아마 오세창 선생의 작품에 있는 상주리 석각문을 여행자가 알아보지 않았다면 일준 선생과의 만남은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층 전시실

 

허화자 씨의 안내는 1층에서 끝이 나고 여행자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오르는 층계 좌우에도 여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부채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2층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부채의 양과 종류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일준 이일원 선생

 

“안녕하세요. 제가 일준입니다.”

 

연신 감탄을 하며 부채를 감상하고 있는데 건장한 어르신 한 분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호기롭게 아는 체를 했다. 곁에는 허화자 씨가 있었다. “아, 작품에 대해 조금 아시는 듯해서 선생님을 모셔왔습니다.” 그제야 사태를 깨닫고 깊이 인사를 드렸다.

 

 

일준 이일원(68) 선생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부산 바다에 있는 목도라는 섬 이름을 따서 처음 수목원을 ‘목도 수목원’으로 이름 붙였다가 지난 1월 20일에 치유숲으로 선정이 되어 ‘자굴산치유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단다.

 

 

“그림이 좋아서 부채를 모으게 되었어요. 전에는 그림도 수집했었는데 보관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액자에 보관하면 몇 점만 있어도 집안이 꽉 차버렸지요. 그에 비해 부채는 살을 빼고 그림만 별도로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그림만 넣으면 보관함에 100점도 수월하게 들어갑니다.”

 

부채에 특별히 애착을 갖게 된 이유가 있는지를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일준 선생은 그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좋아하는 그림을 쫓다 보관이 쉬운 부채에 매력을 느꼈던 그는 25년 전부터 관련 논문을 뒤지고 외국까지 가서 부채를 구입해오는 등 부채에 그의 모든 것을 걸게 됐다.

 

 

“부채에 대해 관심이 생기자 점점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관련 논문을 찾아보니 채 100편도 되지 않았습니다. 왜 이리 부채에 대한 자료가 없고 연구가 부실하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더니 5천년 역사 속에 1800번 이상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제대로 남아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피난 갈 때 누가 부채까지 챙겨갔겠어요?”

 

부채를 들고 있는 조선시대 관리와 기생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의 우리나라의 부채들은 대부분 국내가 아니라 일본․중국․미국 등 외국에서 대개 구입해서 들여왔다고 했다. 전쟁 등을 통해 유출되거나 외국인들이 많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미국은 주로 병인양요 이후 부채를 가져간 것으로 생각되는데, 보관상태가 가장 좋았다고 덧붙였다. 외국에서 직접 구입한 부채의 그림 값은 크기에 상관없이 전지 반장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그림 가격은 밝히지 않았다. 이곳에 부채를 보러온 사람들이 부채 자체의 가치보다 오히려 가격에 관심을 갖는 것을 그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9세기의 프랑스 부채

 

“혹시 실례가 안 되신다면... 선생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부채는 어떤 겁니까?”

“허허, 곤란한데요. 저에게는 다 소중한 거라... 보시면 아시겠지만 똑같은 부채는 없어요. 그만큼 다양하게 만들어졌고 각기 그 고유의 가치가 있는 거지요. 부채는 시․서․화의 종합예술입니다. 음, 굳이 고르라면 이겁니다.”

 

그가 가리킨 것은 ‘태행산색’이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을 6번이나 했다는 정원용의 작품이다. 옅은 채색의 수묵 담채로 그린 이 그림은 흔히 태항산(태행산)으로 불리는 중국의 타이항산을 그린 그림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채로 고려 태조가 개국공신 김선평에게 하사한 부채, 안동 태사묘에 있다.

 

그의 부채에 대한 설명은 끝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부채는 널리 쓰이고 그 용도도 다양해진다. 대개의 부챗살이 27살 혹은 30살 정도에 그쳤지만 당상관 이상은 부챗살이 50살 정도는 됐다. 굳이 가격으로 따지면 5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일준 선생은 부채를 가격으로 환산하는 걸 매우 꺼려하신다. 부채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생으로 보이는 여인이 쥐고 있는 부채의 끝에는 선추(부채고리 장식품)가 달려 있다. 예전 남자들은 대개 선추에 도장이나 침통을 달고 기녀들은 우황청심환을 넣어서 다녔다고 한다.

 

2인의 작가가 하나의 선면 공간에다 각각 칠언율시를 써 내려간 부채로 오른쪽은 예서체로 소호 김응원의 글씨이고, 왼쪽은 갑골문자로 위창 오세창의 글씨다.

 

조선시대의 부채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는 조선유물전시관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가들의 부채가 전시되어 있는 근현대 전시관이 있다. 추사 김정희에서 소치 허유,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 변관식, 안중식, 이상범, 안창호, 운보 김기창, 이응노, 김병종까지....

 

19세기의 산수도로 소치 허유(련)의 작품이다.

 

이뿐만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부채를 전시한 외국관도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사람들은 신분의 상징으로 부채를 인식하였다. 문화혁명 당시 사라질 뻔한 부채를 홍콩을 통해 구입한 것도 있었다.

 

장승업의 뒤를 이은 구한말 최고의 대가인 안중식의 송음청화도.

 

외국관 앞에서 그가 걸음을 멈췄다.

 

“이게 프랑스 부채입니다. 표구도 당시의 것 그대로입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부채인데요. 자세히 보면 그림이 아니라 인쇄를 한 것입니다.”

 

유럽에 부채가 알려진 것은 유럽인들이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15~16세기경이었다. 그 후 17세기에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부채가 만들어졌다. 18세기는 유럽에서 부채가 전성기를 맞게 되어 여성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식품이 되었다. 상아, 비단 등의 다양한 재질에 풍속도를 그려 넣은 것이 인기를 끌다 점점 쇠퇴하고 19세기부터는 인쇄한 부채가 등장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묵란도

 

부채는 ‘부치는 채’란 말이다. 부채의 선(扇)자는 집이나 문을 뜻하는 호(戶)자에 날개를 뜻하는 우(羽)자를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는 이집트 투탄카멘 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것으로 황금 봉에 깃털을 붙인 것이다. 동양에서 제일 오래된 부채 유물은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옻칠이 된 부채 자루로 기원전 3,4세기경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해도 안악 3호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깃털부채 그림이 있고, <삼국사기>에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하자 견훤이 공작선을 올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부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안동 태사묘에서 발견된 부채다. 고려 태조가 개국공신에게 부여한 부채였는데, 이 부채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부채는 태사묘에 보관되어 있어 박물관에는 대신 사진이 걸려 있다.

   

 

차바퀴처럼 둥근 부채를 말하는 윤선은 단선(위 사진)에도 있고 접선(접는 부채)에도 있다. 접선 중에는 부채를 펴면 306도로 펼쳐져서 차바퀴처럼 원을 이룬다. 주로 바람을 일으키는 본래의 용도보다 햇볕을 가리는 일산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그는 이 모든 것이 힘에 부친다고 했다.

 

“사실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인 지원과 관리가 필요합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지만 개인이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는 다시 뜨거운 여름 숲으로 돌아갔다. 수목원과 박물관에 온 힘을 다하기로 작정한 그에게 잠시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백 종의 부채를 소유한 일준 선생님, 정작 그의 땀을 식혀줄 부채는 어디에도 없었다.

 

'쌍학자수미선'이라는 부채인데 조선시대 관복에 부착하던 흉배 도안과 동일하게 수를 놓은 부채다. 수 솜씨가 좋아 궁중에서 상궁들이 만들어 왕족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채자루 끝에 선추가 달려 있어 한층 더 멋이 있다.

 

이곳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600여 점의 부채 중 일준 선생이 가장 아낀다는 '태행산색'

 

공작 깃털로 만든 깃털부채

 

홍학 깃털로 만든 깃털 부채

 

                                          매화에 새를 그린 화조도로 옥조각선(부채)이다.(중국)

 

                                                       거북이 등껍질로 만든 구피선(중국)

 

남방풍경도(청나라 1849년)

 

홍매도(일본)

 

1864년에 제작된 일본의 부채

 

<화첩기행>의 저자인 김병종의 '생명의 노래'

 

33인의 한사람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의 글씨

 

국전에 특선을 5회나 한 곽남배의 일출

 

남농 허건의 쌍송도. 허백련과 함께 근대 호남화단을 대표하는 허건은 소치 허유의 손자이자 허형의 아들이다.

 

장욱진의 반추상 수묵화

 

허백련을 사사한 김옥진의 장강범영도

 

이상범의 설경산수도

 

의재 허백련의 산수인물도

 

박성환의 '소달구지 모는 사람'

 

도산 안창호의 글씨

 

이응노의 화조도

 

박생광 작품

 

해강 김규진의 노안도

 

변관식의 추경산수도

 

김은호의 수여적송도

 

운보 김기창의 독수리

 

장운상의 미인도

 

 

 

☞ 일준부채박물관은 자굴산치유수목원 안에 있다. 주소는 경남 의령군 가례면 괴진리 534번지에 있다.(☎ 055-574-4458).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니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자세한 사항은 누리집(http://jagulsan.com)을 참고하면 된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