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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땅, 제주도

비양도의 별미 보말죽, 그 맛에 매료되다

 

 

제주의 막내섬, 비양도를 걷다 ②

 

북 카페를 나와 섬을 걷기 시작했다. 포구를 막 벗어나려던 순간 나도 모르게 발길을 돌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하나, 배가 고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어디 식당이 없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골목 안쪽에 있는 한 식당을 찾아냈다.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왠지 야무져 보였다. 그제야 이 식당이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는 '호돌이식당' 임을 알았다.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운 날씨, 식당 마당 평상에는 구름이 펼쳐졌다.

 

마당의 시멘트조차 녹일 태세의 불볕더위는 식당 안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에어컨 하나 없는 섬의 식당에는 낡은 선풍기만 헉헉거리며 땀에 전 손님들에게 위안을 줄 뿐이었다. 마치 광활한 사막 가운데에 폭염과 거센 모래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건물처럼... 오늘 같은 날 이곳은 여행자에게 섬에서 유일한 피서처로 보였다.

 

이 식당은 이제 비양도를 찾는 낚시꾼들이나 여행자들에게 제법 알려져 있다.

 

 

비양도에서 20년째 식당을 운영해오고 있는 임연자(72) 할머니

 

손님은 의외로 많았다. 비양도를 여행한 이들이 인터넷 등에 남기면서 이 집은 어느새 비양도의 명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뭘 먹어야 하나' 고민도 잠시, 열기 가득한 주방으로 다가서자 할머니가 땀을 훔치며 죽을 쑤고 있었다.

 

"보말죽 드시오. 방금 막 끓였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래, 요즈음 전복보다 더 귀하다는 보말죽 한 그릇이면 이까짓 더위쯤이야 못 견딜까.'

 

스스로 자위하며 자리에 풀썩 앉았다.

 

한 그릇에 만 원인데, 섬에서 먹을 수 있는 별미이다.

 

죽 한 그릇이 곧장 나왔다. 호돌이처럼 투박하게 생긴 사내가 죽 한 그릇만 달랑 들고 나오더니 상 위에 턱하니 내려놓는다. 그 뒤뚱하는 모양새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얼른 반찬 가져다 드릴 테니까."

 

솥뚜껑 같은 그의 손은 의외로 날렵했고 말씨는 공손했다.

 

 

사실 보말죽은 처음이었다. 처음 접하는 음식을 대할 때 생기는 묘한 긴장감은 배고픔에 굶주린 숟가락질에 이내 묻혀 버렸다.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훔칠 새도 없이 죽에 온 신경을 모으고 먹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죽에 씹히는 보말의 쫄깃함이 아주 그만이었다. 이열치열의 진정한 종결자는 바로 이 여름 비양도의 보말죽이었다.

 

식당에서 우연히 본 창은 제주의 한 풍경을 액자에 그대로 담은 듯하다.

 

죽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고개를 들어 시원한 물을 들이키려다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을 질렀다. 아까는 몰랐는데 통풍을 위해 아예 창문을 떼어낸 창이 하나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제주 특유의 밭담을 경계로 갖은 채소들이 자라는 녹색과 짙푸른 하늘빛, 하얀 집과 야자수가 그림처럼 창에 담겨 있었다.

 

 

배가 불러야 풍경이 보인다. 나의 여행은 아직 배고프다. 하나둘 손님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시각은 채 1시가 되지 않았다. 해가 조금 기울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호돌이가 혹시 사장님인가요?”

“아니요. 조카 별명입니다. 허허.”

 

여행자가 보기엔 덩치도 좀 있고 수더분하게 생긴 사장이 영락없이 호돌이 같아서 지레짐작한 것인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벽 한 쪽에 가족사진이 있어 주인 윤 씨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동생네 가족이었다. 이곳 비양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윤지섭 씨(40)는 어머니 임연자(72) 씨와 둘이서 20년째 식당을 운영해오고 있다.

 

 

지금이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죽도 팔고 밥도 팔곤 하지만, 처음엔 섬으로 오는 낚시꾼을 상대로 밥장사를 했다고 한다. 낚시꾼들은 대개 1박 2일 이상 섬에 머물러 밥장사로 밥은 굶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비양도는 부근 해안에 해조류가 풍부하고 80여 종의 풍성한 어족이 서식하고 있어 예전부터 낚시터로 꽤나 이름나 있었다. 여행자가 섬을 찾은 이날도 배의 승객 대부분은 낚시꾼들이었다.

 

비양도에 오면 한번쯤 들르는 식당, 손님이 빠져나간 오후는 한가했다.

 

“보말은 자연산인가요?”

“보말은 양식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가격이 양식 전복보다 오히려 비쌉니다. 주로 오유월에 해녀들이 채취하지요. 그걸 일일이 까서 삶고 진공포장 한 뒤 냉동을 시킵니다. 죽에 쓰는 보말은 흔히 갯바위에서 채취하는 보말하고 다릅니다. 갯바위에서 잡은 거는 잘아서 그냥 삶아 먹지 죽으로는 적당하지 않아요. 우리도 죽을 쑤기 위해 보말을 사서 쓰고 있어요.”

 

부지런히 주방과 마루를 오가며 빈 그릇을 치우던 윤 씨는 귀찮을 법도 하지만 여행자의 물음에 넙죽넙죽 잘도 대답해주었다.

 

비양도 마을 골목으로 들어가면 속을 까낸 보말 껍데기가 무더기로 버려진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가야 되나 보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눈앞에 재밌는 광경이 펼쳐졌다. 손님이 밥값을 건넸는데 주인 할머니가 갑자기 주방 앞 마루의 장판을 들어올렸다. 그러곤 손님이 준 돈을 장판 밑에 툭 던져 넣었다. 그 바닥이 할머니의 소박한 금고인 셈이었다.

 

더운 열기에 구름마저 낮게 깔렸다.

 

포구로 나왔다. 구름이 낮게 깔렸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도리도 없다. 입을 앙다물고 섬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마침 보말을 까고 있었는데, 여행자에게 계속 갓 삶은 보말을 권했다.

 

'이 더위에 걸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는 마음에 마을을 흘깃 뒤돌아보는데 할머니 한 분이 대문 그늘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까고 있었다. 첫인사부터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매번 큰 소리를 질러야 서로 눈치껏 알아챌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잘되지 않았다.

 

"이거 먹어 봐요."

 

바늘로 하나하나 보말을 까고 있던 할머니는 여행자의 고함에 가까운 말은 한 귀로 흘리고 무조건 보말 알갱이를 건넸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할머니는 연거푸 보말만 여행자의 입에 넣어주신다. 거듭 이어지는 할머니의 손길에 더 이상 염치없어 안 되겠다 싶어 넙죽 절을 하고 길을 나섰다. 건데 걷는 내내 그 달콤한 맛이 자꾸 입안에서 질겅질겅 씹혔다.

 

새들도 구름 아래서 휴식

 

☞ 비양도는 한림항 도선대합실(064-796-7522, 011-691-3929)에서 타야 한다. 배는 하루에 단 한 번, 아침 9시에 들어갔다 오후 3시 15분 배로 나와야 한다. 여름에는 12시에 중회 운영되기도 한다. 배삯은 어른 2000원, 어린이 1200원이다. 배로 15분이면 비양도에 도착한다.

 

                          추천은 새로운 여행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