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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해인사 가면 이 외나무다리 꼭 건너세요.



해인사에 가면 이 외나무 다리 꼭 건너세요.

합천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해인사를 가본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합천이라고 답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늘 한결같았다. "아! 합천 해인사요." 이럴 때에는 정말 난감했다. 당시에는 해인사를 가 본 적이 없었고 30대가 되어서야 해인사를 가보았으니... 그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합천은 생활권이 크게 세 곳으로 나누어진다. 군 단위치고는 면적이 넓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합천은 크게 삼가권·초계권·합천읍권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초계·삼가·합천으로 독립되어 있다 일제시대에 행정구역이 통합되면서 초계와 삼가가 합천군에 합쳐졌다. 여행자가 살았던 가회면은 사실 삼가현에 속했고 생활권은 합천읍보다 진주시에 가까웠다. 해인사를 가려면 같은 군이지만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만 했고 시간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합천군과 경남도민일보의 초청으로 다시 해인사에 왔으나 여전히 고향에 온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었으나 머리만은 이곳 또한 나의 고향이라고 새기고 또 새겼다. 요즈음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철쭉제의 황매산과 기암괴석 모산재, 폐사지의 으뜸 영암사지가 있는 합천이 여행자의 고향이라고 떠벌리고 다닌다.


해인사는 여전히 북적댔다. 대장경축제까지 겹쳐 대형버스는 연신 관광객들을 쏟아내고 승용차는 정신없이 주차장을 드나들었다. 숲길에 접어드니 사람들의 소리도 조금은 주위로 스며드는 듯했다. 우산을 지팡이 삼은 할머니 세 분이 절 구경을 하고 나오고 있었다. 역시 오랜 절집엔 늙고 구부렁한 할머니들이 가장 정겹다.

성철스님 사리탑

비석무리가 있는 곳의 언덕을 오르니 성철스님 사리탑이 있었다. 사리탑을 가운데에 두고 원형인 '선의 공간'을 한 바퀴 돌았다. 문득 드는 의문 하나. ‘과연 숲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부처가 열반하고 난 후 몇 백 년 동안은 불상이 없었다. 불상이 생긴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수도자는 별도의 형상이 없어도 부처의 가르침을 알겠지만 대중이 아무 매개체도 없이 부처를 알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불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원경왕사비

그런데도 이곳은 뭔가 과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산청의 겁외사가 그러하고 이곳 또한 그러하고, 백련암의 그것 또한 그러하고 그 뜻은 알겠으나 사려 깊지 못한 과함으로 인해 오히려 그 본디 정신에 흠을 내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스럽다. 성철스님이 살아 계셨다면 당장에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옛 법식대로 해도 스님과 대중을 이을 수 있는 최소한의 형상만 필요할 텐데... 형해화의 오류는 비단 이곳만의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스님 한 분이 산문을 나선다. 바랑 하나 둘러메고. 법당 앞에 있는 여느 탑과는 달리 길가에 있는 탑 하나가 눈길을 끈다. 묘길상탑. 전란에서 사망한 승려들의 원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탑 안에서 최치원이 지은 글과 흙으로 빚은 157개의 작은 탑들이 나왔다.

이 고사목은 해인사를 창건할 즈음에 심은 것으로 약 1,200년동안 살아오다가 1945년 고사하였다고 한다

원경왕사비를 지나니 골짜기에 연못이 나타났다. 지리산 칠불암에 전해지는 수로왕비와 가락국 일곱 왕자의 이이기가 이곳 영지에도 담겨 있다. '가야산 해인사'라고 적힌 일주문이 지척이다. 일주문 현판은 근대 서가의 대가인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인 봉황문까지는 천년 노거수들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오래된 길이다.


불佛·법法·승僧. 대개 불교의 삼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절들로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 승보사찰 송광사를 꼽는다. 법보사찰 해인사는 통일신라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던 화엄사상을 생산하고 전파하던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 창건되었다. 의상대사의 손제자인 순응스님이 애장왕 3년(802)에 처음 만들고 대를 넘겨 이정화상에 의해 완성되었다.

봉황문(천왕문)

일주문에 서서 왜 절 이름을 해인사라 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에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이 나온다. 해인사의 이름은 바로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즉 중생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참지혜의 바다(海)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구광루 섬돌에 잠시 앉았다.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대는 경내에서 그저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높직이 자리한 대적광전, 석탑과 석등 그리고 가끔 바람에 쨍강쨍강 소리 내는 풍경들에서 그나마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해인사를 처음 다녀간 후 몇 번이나 이곳을 다녀갔지만 아직도 뭔지 모를 답답함이 엄습해 온다. 대적광전 앞에서 경내를 내려 봐도 답답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매번 느끼는 이 답답함, 무슨 이유일까. 처음 절을 지었을 때도 이랬을까. 아님 계속되는 보수의 과정 속에서 그랬던 것일까. 여느 절이 주는 아늑함과 안온함을 이곳에서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다.

선열당

마침 산안개라도 피어오르지 않았다면 지붕들이 주는 그 규격화된 불협화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오래된 사찰에 오면 그 고풍스러움과 푸근함, 전각들의 지붕이 만들어내는 일렁이는 물결 같은 모습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도 아니라면 산사를 둘러싼 푸근한 산자락을 은연중에 떠올리게 마련이다.

장경판전 담장과 그랭이공법으로 쌓은 축대

그러나 해인사는 너무나 과도한 지붕들과 전각들로 인해 외부에서 오는 이도 오래 머물 수가 없고, 내부에 있는 이들도 수행에 전념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공간구성이 되바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의 해인사는 오래 머물기에는 분명 부담스러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전각들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등한시한 것이 이리도 부담스런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다.

특히 옛 건축답사를 하다 보면 이런 황망한 경우와 종종 맞닥뜨리곤 한다. 그 용도를 떠나 결국 건물이라는 건 그것을 관리하고 소유한 이의 안목과 분별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겠다.

장경판전 별꽃무늬담장

그나마 장경판전 오르는 길에 동그랗게 다듬은 화강석과 기와를 끼워 만든 별꽃무늬담장이 눈길을 끈다. 예스러운 맛은 덜하지만 그랭이공법으로 자연스럽게 쌓아 올린 축대 위의 담장에 눈길을 중간 중간 끊어 보면 색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 흡사 낙산사의 담장과 비슷한데 암키와와 흙을 교대로 다져 쌓으면서 동그란 화강석을 다듬어 끼워 넣은 그 정성이 놀랍다.

장경판전 월문

대적광전 뒤의 장경판전에 올랐다. 이곳은 촬영금지 구역이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호각을 불며 소리를 지리는 관리원과 넘쳐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북쪽의 법보전과 남쪽의 수다라전, 동사간전과 서사간전 모두 네 동의 건물이 있다.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장경판전 건물의 과학성이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터이고, 이번 대장경 축제도 결국 이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경판전

발 디딜 틈 없던 장경판전을 빠져 나와 학사대에 올랐다. 이곳에 서면 장경판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통풍과 습기 조절을 위해 격자창을 내고 우진각 지붕을 한 거대한 장경판전을 바라보는 것만 해도 흐뭇해진다.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했던 최치원이 이곳 학사대에 올라 대장경판전을 보았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학사대

형인 현준대사와 정현화상과 담론을 즐기고 시를 지을 때 학들이 춤을 추었다는 학사대는 이제 옛 이야기로만 남아 있었다. 최치원이 직접 심었다는 전나무만 있을 뿐 학이 날던 그 정취는 미루어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평면이 육각형인 독성각은 늘 봐도 특이한 건물이다. 범종각 뒤의 청화당에서 잠시 멈추었다 계곡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외지인들이 잘 모르는 길이다. 대개 해인사를 찾은 이들은 장경판전까지 올랐다가 다시 일주문으로 돌아 나와서 홍제암이나 원당암으로 가게 마련이다.

해인사 뒤안길로 홍제암 가던 길에서 본 와편담장

해인사에는 무수한 산내암자가 있다. 성철스님이 입적한 백련암이 가장 높고 아름답다면 홍제암과 원당암은 지척에 있어 누구나 손쉽게 찾을 수 있다. 해인사를 구경하고 부러 일주문으로 다시 내려가기보다는 범종각 뒤로 난 오솔길로 가면 용탑전과 홍제암, 원당암 등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이 길은 특히 계곡에 걸친 외나무다리가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극락에 간다는 외나무다리

계곡 위에 엄청난 크기의 통나무를 얹은 외나무다리는 어른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이다. 지금이야 안전상의 문제로 철제 난간을 둘러 그윽한 풍취는 덜하지만 그 한갓진 맛은 비할 데가 없다. 이 다리를 건너면 극락에 간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해인사에 가면 꼭 건너볼 일이다.

홍제암 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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