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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참말로 곱고 잘생긴 절이구먼




부여에 가거들랑 이곳 꼭 가보세요
참말로 곱고 잘생긴 절이구먼, 무량사

이번에도 곧장 무량사로 가겠다는 의지는 중도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우리 땅 구석구석이 그러하듯이 부여 땅도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너무 많았던 까닭이었다. 골짜기마다 들판마다 깃든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는 데에만 반나절이 걸렸다. 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무량사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무량한 절집, 무량사

무량. 말 그대로 셀 수 없다는 말이다.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를 셀 수 없는 곳이 바로 극락이니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이 바로 만수산 기슭의 무량사다. 무량사에 들어서면 산중에 이렇게 너른 분지가 있다는 데 놀라게 된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무량사는 제법 너른 분지를 끼고 있어 아늑함을 준다.

일주문

예스런 일주문을 지나면 맑은 물줄기가 절집을 감싸고 흘러내린다. 계곡을 건너 겨우 몇 발자국 뗐을 뿐인데 어느덧 천왕문이 나타난다. 절까지는 제법 긴 거리를 예상했건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왕문이 당혹스럽기는 하다. 그렇다고 섣불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짙은 녹음과 졸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세속의 먼지를 씻어 내고도 남음이 있다. 그 강렬한 청량감은 절 마당을 지나 산신각이 있는 청한당까지 이어진다.

                                  당간지주

마치 액자 속의 풍경사진 같아...

천왕문 옆 담장에는 당간지주 두 기가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 숲의 기운과 잘 어울린다. 천왕문에 들어서니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왕문이 만들어낸 사각형의 앵글 속으로 보이는 극락전 일대는 마치 액자 속의 풍경사진 같다. 돌길을 따라 석등을 지나고 오층석탑을 돌아 극락전까지 이르는 길은 마치 극락을 가는 듯 엄숙하고 장엄하다.


잠시 범종각에 눈길을 주고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 느티나무 주위에 층층 단을 쌓아 놓았다. 이곳에서 보니 절이 아주 아름답게 보인다. 석등과 석탑, 극락전과 우화궁이 정연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여인 하나가 탑 옆을 지나더니 극락전 앞에 섰다. 그녀는 아무 행위도 없이 그저 서 있었다. 여행자도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깊은 고요가 흘렀고 절과 나무와 인간이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참으로 잘생긴 극락전


여인이 사라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탑을 돌았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꼭 빼닮은 이 탑은 매우 장중하면서도 안정감을 주었다. 적당한 비례가 주는 상승감, 완만한 지붕돌에 살짝 반전을 준 처마선의 경쾌함 등에서 백제계 석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오층석탑과 극락전

석탑 앞의 석등도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지붕돌이 조금 큰 감은 있으나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석등에서 고개를 돌리면 명부전이다. 단아한 건물에 비해 단청은 화려하다. 건물 정면은 둥근기둥과 세살문을 달았는데 뒷면은 사각기둥을 쓰고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명부전과 극락전, 석등

극락전 앞에 서니 말 그대로 감개가 무량하다. 넉넉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거대하면서도 아늑함을 주는 극락전을 바라보니 정말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든다. 대단한 미남인데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아름다움이 이곳에 있었다.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2층 구조의 건물이 독특하다. 이러한 예는 5층의 법주사 팔상전, 3층인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마곡사 대웅보전 등에서 볼 수 있다. 외관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는 역시 천장까지 뚫린 통층이다. 위엄과 장엄함을 주는 극락전 안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65호)이 있어 더욱 화려하다. 극락전 내에는 1636년에 만든 범종이 하나 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곳이 예 있구나

극락전 뒤를 돌아가다 나도 모르게 ‘아!’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계류 너머로 건물 두 채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숲속에 다소곳이 앉은 산신각과 청한당은 마치 신선이 머무는 곳만 같았다.

산신각과 청한당

계곡으로 내려갔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다리를 건넜다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산 깊은 곳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작은 폭포를 이루었다 소에서 머무르기를 반복하더니 발 아래로 흘러갔다.

청한당. 김시습의 호가 청한자이기도 하다.

산신각에는 인적조차 없다. 아래에 있는 청한당에도 들렀으나 스님은 신발만 남겨두고 없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한閒자를 눕힌 재미있는 현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여유롭고 한가했다. 이곳에 있으면 누구나 산사의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겠다.

                                산신각 옆에서 흘러들어와 앞을 감도는 계류

산신각에는 10년간 독공으로 득음을 한 한 명창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바로 박동진 선생의 스승인 김창진 명창이다. 김창진 명창은 이곳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입고 있던 옷이 다 떨어져, 거적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밑이 다 드러날 것만 같은 그런 꼴이 안타까워 무량사 주지스님이 옷 한 벌을 주었다. 그러나 사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자 그 옷을 벗고 다시 거적을 쓰고 소리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그 후 서울로 상경하여 유명한 명창이 되었으나 낙향한 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영산전

섬돌에 서서 선연한 눈빛을 보다

다시 내를 건너 극락전 옆 언덕에 오르니 원통전과 영정각이 있다. 영정각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이 있었다. 진본은 영산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영정각의 매월당 영정은 가슴 아래가 잘려 있었다.

김시습초상

김시습은 젊어서 한 폭, 늙어서 한 폭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나 이 영정이 매월당 자신이 그렸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섬돌에 서서 한참이나 영정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실내에 매월당의 눈빛은 선연하다. 그 눈빛에 액자 위로 빛이 잠시 번득거린다. 혼돈의 세상에서 몸부림쳤던 그의 역경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오세신동이라 불리며 촉망받던 그가 번민의 세상에서 영정 속의 얼굴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여행자의 마음이 짠했다.

우화궁의 주련

꽃비 내리는 우화궁에서 시를 읊다

잘 생긴 반송 한 그루와 석등이 앙증맞은 영산전은 다른 건물보다 아래에 있어 고즈넉했다. 주위의 소란도 잠시 피해갈 만한 곳이었다. 영산전 아래에는 요사채인 우화궁이 있다. 요사채치곤 그 이름이 자못 화려하다. 현판 글씨가 하도 예뻐 자꾸 눈길이 간다.

여행자가 가장 좋아하는 절집 중의 하나인 완주 화암사에 가면 우화루라는 누각이 있다. ‘꽃비 내리는 누각’이겠다. 그럼, 이곳은 꽃비 내리는 궁이란 말인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만다라꽃이 비 오듯 내리고 천녀가 주악을 연주하며 공양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으니 우화궁은 설법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겠다.

우화궁 주련에는 진묵대사의 시가 걸려 있다. 술 잘 마시는 선승이었던 진묵대사는 이곳 무량사에서 무량수불에 점안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 나무열매로 술을 빚어 마시고 호방한 시심을 펼쳤다고 한다. 그의 호방함은 역시 천하제일이다.

하늘은 이불, 땅은 자리, 산을 베개로 삼고 天衾地席山爲枕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는 술통 삼아 月燭雲屛海作樽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大醉遽然仍起舞
행여 긴 옷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염려 되네 劫嫌長袖掛崑崙

김시습부도

오세신동 매월당의 부도

절마당으로 내려서는데 눈이 절로 극락전으로 향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산문을 나서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곡 건너 언덕배기에 비 하나가 보였다. 무얼까 궁금하여 다가가보니 김시습의 시비였다.

내친 김에 무진암까지 가야했다. 매월당 김시습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오세 김시습의 묘’라고 적힌 비석 뒤에 그의 부도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밭에서 팔각원당형인 부도는 단연 눈에 띈다. 이문구가 쓴 <매월당 김시습>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도 무슨 보물인양 집의 서가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부도 용조각이 다소 익살스럽다

김시습은 세종 17년(1435)에 태어나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천재였다. 김시습이 천재라는 소문을 들은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정성껏 키우라 당부하고 비단도포를 선물로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세
五歲’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로 관직을 버리고 평생을 떠돌다시피 살다 이곳 무량사에서 59세로 일생을 마쳤다. 오늘 서가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다시 꺼내어 보아야겠다. 율곡 이이가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한 그를 책에서나마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감사한 일이다.


무량사는 9세기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량사에는 무량사미륵불괘불탱(보물 제1265호),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석등(보물 제233호), 극락전(보물 제356호),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65호), 김시습초상(보물 제1497호) 등 6개의 보물과 각종 문화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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