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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정원

영혼마저 치유하는 숲, 광릉

 



영혼마저 치유하는 숲, 광릉


국립수목원 바로 아래에 광릉이 있다. 그런데 주차장에 들어서니 별도의 입장료를 내라고 한다. 입장료는 기꺼해야 1,000원이었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국립수목원을 광릉숲으로 알고 있듯이 수목원 입장권으로 광릉도 함께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광릉은 남양주에 있고 수목원은 포천에 속한다는 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몇 걸음을 앞두고 관리 주체가 다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현재의 홍살문

丁자 모양의 정자각

조선 최고의 숲에 자리한 광릉

이 일대가 최고의 숲을 자랑하는 데에는 광릉에 힘입은 바가 크다.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마음대로 손대지 못한 광릉이었기에 오늘날 사람들의 각광을 받는 산림휴식처가 되었다.

광릉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수림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반질반질한 흙길을 따라 울창한 숲을 걸으면 온몸의 나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숲길의 끝에 홍살문이 나오고 정자각을 가운데에 두고 그 좌우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수라간은 현재 건물이 없고 터만 남아 있다. 수라간 터에 있는 사진에는 1930년대에 찍은 옛 수라간 모습이 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인 수라간은 현재 그 초석 일부만 남아 있다.

광릉 세조의 능

두 언덕에 자리한 Y자 형의 왕릉

광릉은 조선 7대 왕인 세조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52세로 승하한 세조와 15년이 지나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왕의 동쪽 언덕에 왕비를 예장하였다.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였는데, 이를 동원이강同原異岡릉이라고 한다. 이러한 형태로 조성된 능은 광릉이 최초이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Y자 형이다.

왼쪽 세조의 능과 오른쪽 정희왕후의 능, 가운데에 정자각을 두고 좌우 언덕에 능을 조성한  Y자 형의 동원이강릉

세조는 무덤에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광릉에는 돌방인 석실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인 회격으로 소박하게 꾸몄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을 세웠다. 병풍석이 없으니 난간석의 기둥에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않고 능을 간략하게 조성한 것은 백성의 고통을 줄이고 국가재정을 절약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풍수적인 측면도 고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왕릉의 사초지인 강은 대부분 자연 그대로이고 일부만 흙으로 보충하는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는 자연토가 아니면 생기가 통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생기가 발하는 곳이 바로 혈이고 그 혈 자리에 능을 쓰게 된다. 세조가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고 유언을 한 것도 능 내로 생기가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풍수적 관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과 병풍석을 쓰는 대신 회격으로 무덤 내를 꾸미고 둘레에 난간석을 둘렀다.

원래 홍살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광릉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어느 왕릉에나 있는 참도가 없다는 것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광릉은 홍살문과 정자각이 지척에 있어 애초 참도가 없었던 것으로 대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현재의 홍살문에서 한참 아래의 길 좌우로 초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석의 형태로 보아 기둥을 세우기에 충분했고 그 위치를 보니 옛 홍살문이 있었던 자리가 아닌가 여겨졌다.

옛 홍살문 자리로 추정되는 곳의 초석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간략한 답변을 하던 여직원이 질문이 조금은 버거웠는지 남자직원을 바꿔주었다. 그 직원의 말과 자료를 조합해 보니 단정은 지을 수는 없어도 초석이 있는 자리가 원래의 홍살문 자리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기존의 콘크리트 홍살문을 없애고 그 자리에 지금의 홍살문을 세웠다고 했다. 그러던 중 1990년대에 길을 보수 공사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초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기록에는 이렇다 할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세조가 자신의 능에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유지는 있었으나 참도에 관해 언급했다는 기록은 없다. 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인 광릉산릉도감의궤 등이 있었다면 참도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있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니 그 내막을 알 수가 없다.

다만 1778년에 유의양이 왕명을 받아 오례로 나누어 편찬한 <춘관통고>에는 홍살문이 정자각 좌측 남쪽으로 약 270보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1444년 이후의 1보는 주척으로 여섯 자 되는 거리이니 대략 500m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원래의 홍살문 자리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아래 주초석이 있는 곳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파란만장했던 왕과 왕비의 무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동생으로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 왕위에 오른다. 세조는 재위 14년 동안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만년에는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번민하다가 불교의 가르침에 의존하였다고 한다.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예종·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덕종․예종․의숙공주를 슬하에 두고 1483년 66세로 생을 마쳤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와 두 아들을 먼저 보낸 정희왕후의 파란만장했던 삶도 이곳에서 긴 휴식을 갖게 되었다. 울창한 숲에서 영혼마저 깨끗이 치유되었을 것이다.

정희왕후능과 비각

광릉의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침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날짜를 고려해야 한다. 홀숫날에는 세조의 능에, 짝숫날에는 정희왕후의 능에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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