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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타임슬립

어떤 그리움 찾아 구둔역을 가다




어떤 그리움 찾아 구둔역을 가다

간이역, 어떤 그리움이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간이역을 처음 본 건 간이역이라는 술집에서였다. 생맥주 몇 잔에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간이역 사진을 가리키며 언제고 떠난다고 흰소리를 하곤 했었다. 술잔에 담긴 눈동자는 그 낯선 공간으로 이미 밤도와 떠난 뒤였지만....


찌르레기 한 마리 날아왔던가, 날아갔던가, 너 밤차 타고
바다에 가던가던 중앙선 그 길 어딘가에 푸른 신호등을 켠
구둔역도 있었을 것인데,

고고학 전공의 국립대학 졸업생, 너 죽고 없는 빈 세상,
40년도 훨씬 넘는 푸른 안개 속에 채송화도 봉선화도 피우며
겨우겨우 살았을 옛날의 네 여자가, 백발이 다 된 네 여자가
오늘 찌르레기 한 마리로 스쳐날면서 다시 바다로 가는 간이역,
그냥 스쳐가는 구둔역....

이건청의 <구둔역-찌르레기는 어디를 가는가>에서


양평에도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길은 구불구불 외딴곳으로 이어졌다. 옛 시골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을 비켜 길은 낮은 언덕배기를 넘는다. 바로 그 순간 거기에 딱 알맞을 성 싶은 작고 아담한 구둔역이 나타났다.


역사는 조용했다. 하얀 벽면에 오랜 시간의 흔적이 묻어났다. 가을이면 황금빛 은행이 멋스러울 역사 앞은 그 흔한 벤치도 없다. 구둔
九屯. 구둔역이 자리한 일신리 일대는 예로부터 군자 요충지였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길목이면서 문경새재를 넘어 남한강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구둔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때 마을 산에 아홉 개의 진지를 구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합실로 들어갔다. 길게 누운 긴 의자와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시간을 적어 놓은 시간표가 휑한 대합실을 메우고 있었다. 기차는 아직 이고 기다리는 이도, 떠나는 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 옛날 이곳은 기다림과 만남, 사랑과 이별, 설렘과 그리움으로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중앙선 매불역과 매곡역 사이에 있는 구둔역은 1940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구둔역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붐볐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용문산 일대에서 약초와 취나물, 두릅 등을 채취해 경동시장으로 팔러나가는 노인들과 통학하는 학생들, 인근 양평으로 장을 보러가는 주민들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자가용 등의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이용객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구둔역은 더 이상 기차표를 팔지 않는 간이역이 되었다. 지금은 하루 90여대의 기차가 이곳을 거쳐 가지만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열차가 3번 정차할 뿐이라고 한다.


역사 벽면에는 ‘등록문화재 제296호 양평 구둔역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적혀 있다. 건물 앞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차양도 보인다. 차양을 덧댐으로써 건물의 단조로움을 피함과 동시에 그늘도 지게 하는 효과를 보고 있는 셈이다.




자전거 한 대가 역사에 기대어 있다. 역무원의 것인가 보다. 한참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더니 멀리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사진에 담으려 다가서자 역무원이 조심하라고 소리친다. 운 좋게도 이번 기차는 구둔역에 정차를 했다. 몇몇 사람들이 내렸고 기차는 떠났다. 역무원은 부동의 자세로 끝까지 가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차가 떠난 자리, 구둔역은 따뜻했다. 인화
人和, 나무 아래의 바위에 누군가 글씨를 새겨놓았다. 역사 한 켠 철로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붕어와 물망초, 덜커덩 덜커덩 쇳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붕어들은 연못을 한가로이 유영했다.



철로는 점점 뜨거워졌다. 이쯤 되면 시원한 물 한 바가지 생각이 절로 난다. 그도 아니라면 막걸리 한 사발이 간절하다. 인근에 100년이 넘은 지평 술도가가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 터였다.

마을로 내려갔다. 영화슬레이트와 카메라로 꾸며진 마을 입구가 예사롭지 않다. 구둔마을은 한때 주민들이 직접 영화제를 이끌어 영화마을로 소문난 곳이었다. 마을 회관 나무 아래서 노인 한 분이 더위를 피해 쉬고 있었다. “요즘도 영화를 합니까?” 여행자의 물음이 뜬금없었는지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축제하는 가을에만 여기서 영화를 상영해요. 지금은 아무 것도 안 해요.” 노인의 말이 왠지 한가로우면서도 허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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