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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서울 가까이 이런 곳이 있었구나




서울 가까이 이런 한적한 곳이 있었구나
-경기도 양평 용문산 사나사

경기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용문산은 원래 미지산으로 불리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용이 드나드는 산이라 하여 용문산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미지는 미리의 완성형으로, 용의 새끼를 일컫는다고 하니 이래나 저래나 그 뜻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셈이다.

절마당 끝을 흐르는 계곡

용문산의 동쪽에 그 유명한 용문사가 있다면 서쪽에는 사나사가 터를 잡고 있다. 사시사철 사람들이 붐비는 용문사와는 달리 사나사는 그 고요함을 잃지 않고 있다. 사나사가 가지고 있는 소박함과 그 한갓짐은 용문사에 비할 데가 아니다.


두물머리에서 남한강을 따라 냉면마을로 유명한 옥천리를 지나면 길은 사나사 계곡으로 이어진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계곡은 한가하다. 본격적인 피서철이 되면 이곳도 사람들로 붐비겠지만 오늘은 가끔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산사로 가는 길은 계곡을 따라 한참이나 이어진다. 함왕의 전설이 서린 함왕혈과 봉은사에서 옮겨왔다는 일주문을 지나면 산중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넓고 평평한 분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너른 터에 비해 절은 대적광전과 몇 채의 전각만 있어 아담하고 조촐하다.


사나사는 고려 태조의 국정을 자문했던 대경국사 여엄이 제자 융천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1367년(공민왕 16)에 태고 보우대사가 140여 칸 규모로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1698년(숙종 24) 덕조가 다시 지었으나 1907년 의병과 관군의 충돌로 또다시 모두 불에 탔다. 이후 다시 지어졌으나 한국전쟁으로 불타고 1993년에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

대적광전 앞에는 예쁘장한 삼층석탑과 원증국사 부도가 아름드리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봉은사말사지>에는 창건 당시 오층석탑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그 탑은 찾을 수 없고, 함께 세웠다는 이 석탑만 남아 있다.

사나사원증국사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 )

삼층석탑의 옆에 석종부도와 석종비가 있다. 사나사를 크게 중창하고 왕사와 국사를 지낸 원증국사 태고보우(1301~1382)의 부도와 비이다. 기단과 몸돌, 보주로 이루어진 종모양의 이 부도는 기단 윗면의 연꽃 모양을 제외하면 아무런 조각이 없어 평이하다.

사나사원증국사석종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

석종비는 지대석을 파고 비신을 끼워 세웠다. 비신 양옆으로는 길고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위에는 밑이 둥글고 위는 평평한 지붕돌을 얹어 비의 몸체를 보호하였다. 비의 일부가 파손되어 비문의 완전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정도전이 글을 짓고 의문이 썼다. 보우의 제자인 달심이 부도와 석종비를 세웠다고 한다.

함씨각 내부

사나사에는 특이한 전각이 하나 있는데 ‘함씨각’이 그것이다. 절 아래의 함왕혈과 산 위에 함왕성지가 있고, 이 절에 함씨각이라는 전각을 별도로 지었으니 함씨 일족과는 상당히 연관이 깊은 사찰로 보인다.


절을 둘러보는 데는 잠시였다. 너무나 조촐하고 소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동안 떠날 수 없었다. 너무나 한적하고 고요했기 때문이다. 울창한 숲과 하얀 바위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청량하다. 주말 점심에는 국수를 무료로 보시한다고 하니 그 마음 또한 청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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