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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은행나무보다 숲길에 홀딱 반한 용문사


은행나무보다 숲길에 홀딱 반한 용문사
-천년의 은행나무가 있는 양평 용문사

용문산은 경기도 내에서 화악산, 명지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해발 1157m로 산세가 웅장하며 계곡이 깊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이름나 있다. 이 빼어난 산의 서쪽에는 사나사, 동쪽에는 용문사가 자리하고 있다.

용문사 입구의 시비공원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은 용문사

아득한 저 용문산 산색이
아침 내내 나그네의 배를 비추고 있네

골이 깊어 오직 나무만 보이고
구름 그치자 이어서 안개가 일어난다

무릉도원이 있는 줄 진작 알고서도
서울거리와 인연을 끊기 어려워라

절이 숨어있는 곳
아름다운 숲과 물을 슬프게 바라보네

다산 정약용의 望龍門山에서

용문사 일주문의 꿈틀거리는 용 

천년의 은행나무가 있다는 용문사는 발길을 들이지 않아도 진즉 알고 있었다. 마의태자의 애잔한 전설 한 토막도 이곳 푸른 숲 어딘가에 숨어 있는 줄도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지척이지만 시인묵객들이 찾던 그 옛날에는 쉬이 갈 수 없는 또 하나의 무릉도원이었을 게다.

                                   일주문을 지나면 아름드리 숲길이다

용문사는 생각대로 왁자지껄했다. 입구부터 길게 늘어서서 정신을 쏙 빼놓는 상점들을 지나니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 공원이다. 나무 사이사이의 바위에는 저마다 시가 쓰여 있다. 용문사의 명성은 내 이미 들었지만 이토록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다녀갔음은 몰랐었다.

머리를 돌리니 용문산이 하늘에 꽂인 듯
거문고 줄처럼 좁은 절집으로 가는 길
지팡이 끌고 무성한 숲으로 들어가니
초여름 깊은 산에 두견새 소리만 이어지네

사가 서거정의 送誾上人還龍門寺에서


절로 가는 무성한 숲

시비 동산을 지나면 일주문이다.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북적댔다. 절의 이름처럼 일주문은 용문이다. 일주문 양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은 용문사를 상징하는 것이겠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바깥과는 딴판인 숲길이 나타났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속과 승의 세계가 이렇게 분명하다니.... 그동안의 소란스러움은 울창한 숲에 이내 묻혀버린다.


길은 계곡을 따라 숲으로 이어졌다. 길옆으로는 별도로 물길을 내었다. 딱딱한 길바닥에 지친 이들이 발을 적시기에 그만이다. 문 하나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별천지가 펼쳐질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람들은 숲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계곡을 건너니 오른쪽으로 흔들다리가 나온다. 정지국사부도로 가는 길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부도 가는 길은 숲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숲이 내어준 그늘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어느 순간 밝은 빛 속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나타났다.


천년 전 마의태자의 전설이 서린 은행나무

굳이 동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용문사 은행나무를 직접 보니 그 위용은 소문대로 대단했다. 가지마다 무성하게 돋은 잎들은 천년의 시간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푸르렀다.

저마다 주장이 다른 이 나무의 나이는 대략 11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자랐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에 심었다고도 한다. 그 사실이야 어떠하던 간에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은행나무는 거룩해 보였다.

                                   천년의 은행나무

이 나무는 오랜 세월과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아 천왕목
天王木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당상직첩을 받기도 했다. 높이 41m, 가슴둘레가 11.2m로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대한 은행나무 때문인지 경내는 의외로 비좁았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하나 그렇게 보기에는 터가 너무 비좁아 보인다. 지금의 터로 보면 도무지 상상이 안 되니 아마도 인근에 있는 암자터까지 포함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지국사 부도 가는 길

용문사는 진덕여왕 3년인 649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892년에 도선국사가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조선 태조 때 조안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정지국사이다.

정지국사는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을 했는데 입적에 든 지 3년 만에 부도와 비가 용문사에 세워졌다. 경내 한쪽에 있는 부도군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정지국사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경내의 부도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정지국사 부도가는 길이다

정지국사 부도로 가는 길은 청정 그 자체이다. 무리지어 보이던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볼 수 없다. 한 300여 미터 갔을까. 갈림길이 나오면서 왼쪽으로 부도비가 얼핏 보인다.

정지국사 부도비. 보물 제531호

부도비는 편편한 천연의 바위에 조촐하게 서 있다. 안내문만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지도 모른다. 본래는 지금의 자리 위쪽 바윗면에 있었다고 한다. 이수도 없고 자연석을 비좌로 삼아 그 자연스런 경지를 엿볼 수 있다. 비문은 당대의 학자인 권근이 지었다.

정지국사 부도. 보물 제531호

부도비에서 100보 정도 올라가면 부도가 있다. 울창한 솔숲이 둘러싼 언덕에 부도는 자리하고 있다. 한눈에 봐도 편안한 느낌이 든다.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정지국사는 나옹선사, 무학대사와 동시대를 산 승려이지만 오직 수도에만 전념해 두 사람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정지대사는 천마산 적멸암에서 72세로 입적을 하고 난 후 제자 지수의 꿈에 나타나 사리를 수습하라고 분부를 내린다. 마침 그때에 제자 조안이 용문사를 중창하고 있었기에 사리를 수습해 용문사에 부도와 부도비를 세웠고, 태조가 정지국사로 추증했다.

정지국사 부도에서 사찰 입구로 이어지는 산길. 1km 남짓 짧은 길이지만 숨 막힐 듯 아름답다. 

청정한 숲길 1km 남짓

숲에 가만히 누웠다. 천년의 시간이 숲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따금 오르내리던 등산객마저 사라지자 숲은 이내 깊은 적막에 쌓였다. 멀리서 설핏설핏 보이는 듯 들리는 듯 새소리가 전부다. 가지에 바람이 일었다.


숲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렇게 있다 간신히 몸을 세워 산길을 걸었다. 푸르다 못해 검은빛마저 감도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이 산길은 구불구불 1km 남짓 이어졌다.


산길을 나오니 친환경농업박물관이 보였다. 박물관 앞에 모내기를 막 끝낸 작은 무논이 있었다. 이곳에서 문득 90세의 나이에도 노동을 했던 백장선사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一日不作 一日不食.’ 그의 일갈이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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