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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애불

김태희 저리 가! 내가 가장 얼짱이여



김태희 저리 가! 내가 가장 얼짱이여
-경기도 안성 아양동 보살입상 및 석불입상

안성에는 유독 불상이 많다. 도처에서 불상을 만날 수 있다. 깊은 산중의 석남사 마애불, 옛 봉업사 터의 조각이 빼어난 석불입상, 매산리의 태평미륵, 국사암의 궁예미륵, 대농리 석불입상, 기솔리 석불입상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안성에 소재한 시 지정 이상의 불상만 해도 20기를 훌쩍 넘는다. 대개 미륵으로 불리는 이 불상들이 안성에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양동 보살입상(좌) 및 석불입상(우)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청룡사 운부대사의 영향을 받은 장길산이 꿈꾼 새로운 세상이 곧 미륵세상이었다. 그 미륵의 세상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장길산은 운부대사에게서 받게 된다. 석가모니의 뒤를 이어 수십억 년이 지나서야 홀연히 나타나 중생을 구제할 미륵이 이룰 세상은, 적어도 낙원의 땅임에 틀림없다는 믿음이 있었을 게다. 미륵의 하생을 기다리는 땅,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간절함이 바로 이곳 안성 땅에 오롯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보살입상. 일명 '할머니 미륵'으로 불린다.

안성은 그 옛날 삼국의 각축지였다. 백제의 땅에서, 고구려 영토로, 다시 신라의 땅이 되는 등 하루라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했던 궁예도 안성 땅에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 궁예가 안성 죽산에서 일어난 기훤을 찾아갔으나 기훤이 무례하여 결국 등지고 양길을 찾아간다. 이후 궁예는 세력을 잡고 죽주지방까지 손에 넣었고 미륵을 자처했다. 국사암에는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불상 3기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안성은 고려 때에는 죽주산성에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겪게 되고, 조선조에는 탐관오리와 왜구의 피해 등이 극심했던 곳이 안성이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세상이 안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상세계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했던 것은 아닐까.

                                 석불입상. 일명 '할아버지 미륵'으로 불린다.

미륵을 세우고 혹은 그 돌가루를 갈아 아들을 낳기도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치성을 올리면서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불상의 생김새가 저마다 다르고 수인 또한 부자연스러운 고졸한 불상들은 우리네 백성들의 다양하고 질박한 삶의 흔적이 그대로 녹아든 것일 게다. 이처럼 안성의 미륵에는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의 이상세계의 꿈이 오롯이 살아남아 있다.

또한 안성은 조선시대에 충청, 경상, 전라의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안성은 큰 고을로 번성했는데, 이 또한 안성에 미륵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이날 여행자가 찾은 곳은 아양동이었다. 본래는 아롱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아양동으로 개명되어 부르고 있다. 안성의 미륵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 중 하나가 아양동 미륵이다. 도로공사 중이여서 아양동 불상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불상이 있다는 아파트 근처까지 와서 안내문까지 찾았는데도 불상은 보이지 않았다. 안내문은 공사때문인지 도로 한 편에 쓰러져 있었다. 풀숲이 무성한 곳이 의심스러워 다가갔더니 예상대로 석불은 그곳에 있었다.

                                   얼굴은 비록 크지만 김태희도 울고 갈 정도로 미인이다.

불상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왼쪽이 안성시 향토유적 제10호인 보살입상이고, 오른쪽이 향토유적 제15호인 석불입상이다. 마을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두 불상을 미륵불로 불러왔다고 한다.

왼쪽 보살상은 상체만 보이고 하체는 땅속에 파묻혀 있다. 훤칠한 키도 그렇거니와 얼굴 또한 상당한 미인이다. 불상계의 김태희다. 머리에는 꽃무늬가 선명한 보관을 쓰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동자에 박힌 하얀 돌이 인상적이다. 납작한 판석에다 얼굴과 몸체의 비례가 어긋나 아주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에 비해 무릎 아래가 묻힌 오른쪽 불상은 가지런한 눈․코․입과 다소 긴 관모를 쓴 모습에 위엄이 서려 있다. 다만 목이 밭아 얼굴에 어깨가 붙은 것이나 법의가 아니라 관복처럼 보이는 옷이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푸근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다.

주민들은 왼쪽의 미인불상을 ‘할머니 미륵’으로, 오른쪽의 불상을 ‘할아버지 미륵’이라 부른다고 한다. 안성의 미륵이 새로운 점은 미륵이 민간신앙화 되면서 기존의 형식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 불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법의와 관복이 혼용되고 수인이라고 할 수 없는 손 모양 등이 그러하다.

                                    특이하게 자갈을 박아 눈동자를 표현했다.

이 두 불상은 고려 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의 위치는 3m 앞이라고 하는데, 일제 때 홍수가 나서 목 부분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후 마을사람들의 꿈에 미륵이 나타나서, 주민들이 풍물을 치며 집집마다 방문해 시주를 모으는 걸립패를 조직해 불상을 다시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석불 앞에 조성된 제단석은 <을사년정월십사일아양동일동乙巳年正月十四日峨洋洞一同>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마을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면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남자들이 풍물을 치고 여자들이 제를 주관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석불 앞에 조성된 제단석은 <을사년정월십사일아양동일동
乙巳年正月十四日峨洋洞一同>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965년 1월 보수 때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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