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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 머물다

찬찬히 눈여겨보니 하나같이 보물이네



찬찬히 눈여겨보니 하나같이 보물이라네
-경기도 안성 칠장사

경기도 안성하면 제일 먼저 유기그릇을 떠올리고 조금 더 관심을 갖는 이라면 가죽꽃신을 생각할 것이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한 이 두 가지는 그 옛날 풍성했던 안성장의 대명사였다.

안성에는 이름난 절집이 더러 있다. 일곱 도적이 개과천선 했다는 칠장사, 남사당의 흔적이 남아 있는 청룡사, 산속 깊숙이 자리한 석남사 등이 그것이다. 그중 칠현산의 울창한 숲에 고색창연한 칠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곱 도적이 도를 이루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세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0세기경에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때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수했다는 설이 있다.


절이 칠장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 때 절 주위에는 포악한 일곱 도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도적 한 명이 목이 말라 샘물을 마시러 절에 있는 샘에 갔다. 샘물을 뜨려고 하는데 바가지를 보니 순금이었다. 도적은 얼른 물을 떠 마시고는 품안에 슬쩍 넣었다. 다른 도적들도 물을 마시러 갔다가 금바가지를 발견하고 하나씩 옷 속에 감추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이 일이 벌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몰래 가지고 온 금바가지가 온데간데없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한 도적이 다른 도적에게 사실을 말하자 다른 도적들도 하나같이 금바가지가 사라진 것을 실토하였다. 이들은 혜소국사가 신통력을 부린 것을 곧 알아차리고 이날부터 혜소국사의 제도를 받기 시작하여 오래지 않아 도를 이루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부터 절 뒷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 절 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 했다고 전한다.

나한전과 나옹선사가 심었다는 노송

이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대웅전 뒤편 언덕에 있는 혜소국사비 옆의 나한전에는 이 칠현인의 현신이라는 일곱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전각 위로는 나옹선사가 심었다는 노송 한 그루가 햇빛을 가리는 일산처럼 가지를 뻗쳐 있어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날이었다. 고졸한 절맛이 깊다는 칠장사의 이야기도 오늘처럼 무더운 날에는 소용없는 일이다. 일주문에서 은행나무가 겨우 마련해준 그늘을 따라 조심조심 칠장사로 향했다.

                                어사 박문수의 길 초입

어사 박문수와 의적 임꺽정의 흔적을 만나다
길옆으로 안내문이 보인다. ‘어사 박문수길’이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길이 있다. 길의 재발견인지 아니면 걷기 열풍의 맹목적인 추종인지는 모를 일이다. 지루한 옛길의 발견임에도 이야기 한 자락은 들어야 길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길은 옛날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가던 소로였다. 어사 박문수가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중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과거시험에 출제될 문제가 나와 장원급제를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안성시는 이 설화를 배경으로 안성 쌀로 만든 ‘어사 박문수 몽중등과夢中登科’라는 떡을 상표 출원하였다고 한다.


널찍한 절 앞 공간이 다소 휑하다. 사천왕문에 들어서니 제법 고색창연함이 느껴진다. 대개의 절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상이 이곳에도 있다. 사천왕상은 절을 수호하는 동서남북의 신장으로 양쪽에 2구씩 있다. 특히 이곳의 사천왕상이 놀라운 것은 거대한 소조상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것이다. 손에 각각 비파, 보검, 여의주, 창을 든 신장들이 무서운 듯하면서도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든다.

흙으로 빚은 사천왕상


사천왕문을 지나니 화려한 명부전의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 건물 옆면에는 드라마 <임꺽정> 출연진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칠장사는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의 무대이기도 하다. 임꺽정의 스승인 백정출신 도인 갖바치가 이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 깁는 법을 가르쳐 가죽신이 안성유기와 더불어 안성 특산물이 되었다. 갖바치는 병해대사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고 임꺽정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인물이다.



눈길을 확 끄는 고색창연한 대웅전과 석불입상
널찍한 절마당 끝에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원래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 부재를 죽림리 목장에서 관리해오다 목장주의 기증으로 현재의 위치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빛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한 대웅전이 눈길을 확 끈다. 늘 새로운 것이 대접받는 세상에 이 고졸한 대웅전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을 때 비로소 시간을 비켜선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5단의 기단 위에 맞배지붕을 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단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는 맞배지붕의 특성이 그대로 살아난 건물이다. 작지만 옹골찬, 힘센 기운이 느껴진다. 법당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우물천장에는 불화와 연꽃이 채색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쪽에 조각이 빼어난 석불입상 한 기가 있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진 불상은 원래 죽산리 봉업사터에 있었던 불상이다. 봉업사가 폐사되자 죽산중학교로 옮겼다가 1980년경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 양식의 우수한 작품으로 꼽는데 모자람이 없어 보물 제9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불입상을 바라보다 더위를 피해 나무그늘로 숨어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숲까지 따라온다. 숲에서 울어대는 새소리만 아니었다면 바람의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거북이 모양을 꼭 닮은 바위도 뜨거운 햇살을 피해 땅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장을 물리친 혜소국사비의 신통력
원통전 앞에는 석탑 한 기가 있었다. 탑의 형체만 겨우 알아볼 정도로 흩어진 석재들을 간신히 쌓은 듯하다. 한 칸의 소담한 전각인 영각을 돌아 혜소국사비로 향했다. 비각이 있는 지금의 자리가 예전 혜소국사가 홍제관이라는 수행처를 세운 곳이라고 한다.


혜소국사비 일대는 산신각, 나한전, 비전 등의 건물이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때에 안성에서 태어나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여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83세에 가부좌를 한 채 열반에 들었는데, 이 비는 그 후 문종 14년(1060년)에 세웠다.


비각 안에는 비신․귀부․이수가 각각 떨어진 채로 있다. 날렵한 비신에 비해 귀부와 이수가 지나치게 커 보인다. 아마 큰 이수를 못 이겨 비신이 쓰러진 게 아닌가 싶다. 여기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비신의 양측에 새겨진 쌍룡이 빼어난 혜소국사비

<안성군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칠장사에 들러 절을 뒤지는 등 무례를 굴었다. 이때 한 노승이 나타나 크게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노승을 치니 노승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본 가토는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고 한다. 이를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지금도 비신의 가운데가 갈라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비신의 양측에 새겨진 쌍룡이 빼어나다. 혜소국사비는 보물 제488호이다.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철당간의 위용
혜소국사비에서 잠시 경내를 내려 보다 부도군으로 내려왔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이 시원하다. 바위 벼랑 아래에 작은 샘이 있었다. 땀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일주문으로 나왔다. 당간지주로 가야했다.

영각

일주문에서 주차장을 지나 길 아래로 얼마간 내려가면 오른쪽에 사적비가 있다. 사적비 옆에 거대한 철당간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 있다. 높이 11.5m로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30마디였다고 한다. 그 위에 칠장사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꼈을 것을 상상만 해도 장관이다.

견고한 지주석 사이에 끼여 있는 철당간에는 풍수설과 관련된 이야기 한 자락이 있다. 칠장사의 지형이 배 모양과 같아 돛대의 역할을 하도록 당간지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철당간은 국보인 충북 용두사터 철당간과 계룡산 갑사 등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문화재이다.

                                철당간

다시 길을 내려갔다. 올라올 때 미처 보지 못한 부도밭으로 가기 위해서다. 모두 14기의 부도가 있다. 부도 앞으로 하얗게 피어난 망초군락을 보며 칠장사의 면면을 돌아보았다.

고려 말 왜적의 행패가 극심할 때 충주 개천사에서 보관하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겨 소실을 면하기도 했다. 조선 선조의 부인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자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이후 세도가에게 절을 빼앗겨 불탄 것을 초견대사가 다시 세웠으나 다시 세도가들에게 불에 타는 부침을 겪게 된다.

칠장사에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냥 휑하니 돌면 괜한 공허감만 생길 뿐이다. 찬찬히 눈여겨봐야 칠장사가 감춘 수많은 보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감동이 절로 일 것이다.

부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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