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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기행

어느 시골의 봄, 이런 풍경이 그립다




어느 시골의 봄, 이런 풍경이 그립다
-진주시 지수면 마을길 산책

봄꽃이 그리워 진주의 어느 시골마을을 찾았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웬 종일, 며칠째 헤매고 다녔습니다. 굳이 봄꽃이 아니어도 좋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을을 쏘다녔습니다.

어떤 그리움

지수면 어느 옛집에서 눈길이 멎었습니다. 담장 아래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들이 봄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네들만 있었다면 그저 그렇거니 하며 잠시 바라만 보았을 것입니다. 담장 너머로 노오란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 몰래, 고개를 담장 너머로 내밀었습니다. 마치 어여쁜 옆집 아가씨를 흘깃 훔쳐보는 봄 총각의 야릇한 눈길로 말입니다.

산수유 그리는 옛집

그쯤에서 고개를 돌렸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산수유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깊숙이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별당아씨가 저 꽃덤불 너머로 미소를 짓는 듯했습니다. 노란 꽃을 몇 번 헤쳐 앞으로 나아갔는데도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노란 저고리를 입은 아씨는 마루에 앉아 연신 웃고만 있습니다.

하늘! 그립다

춘정
春情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봄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애써 벗어나기보다는 질펀하게 퍼질러 앉기로 했습니다. 잠시 하늘을 보니 아득했던 정신이 차려집니다. 누군가 부르지 않았다면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겠지요.

농부의 땅

승산마을을 지나는데 부부가 텃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부지런히 괭이질을 해서 고랑을 만듭니다. 아주머니는 그 고랑을 따라 씨앗을 뿌립니다. 겨울 내내 어둠에 갇혀 있던 검은 흙이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수고하십니다.”는 말에 아저씨는 그저 굵은 미소 한 번 지을 뿐입니다.

흑백의 봄

소재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어느 민가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을 인 소담한 바깥채 담벼락에 매화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사실 매화는 무리지어 피기보다는 한 그루의 향이 더 진한 법입니다. 이 한 그루의 매화에서 뿜어내는 꽃향기는 정신을 멀게 했습니다.

고고함이란?

그 아련한 향기에 취해 할 일도 잊은 채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헤벌쭉 웃는다고 하기에는 매화가 너무 고고합니다. 퇴계 선생이 숨을 거두면서 "저 매화나무에 물주라."고 했다는 말이 귀청을 울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깊은 울림이 있다는 걸 매화는 매번 깨우쳐 줍니다.

                                    산책
  
길상사의 스님은 나들이 중이었습니다. 넓은 지수들을 돌아 야트막한 야산 허리를 에돌아가면 길상사라는 작은 절이 있습니다. 산책하는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사진 요청을 했습니다. 스님은 흔쾌히 여행자의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가끔 강아지가 봄기운을 못 이겨 말썽을 부렸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촬영이었습니다.

봄의 미소

송정마을의 할머니는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마실을 갑니다. 텃밭에서 밭일을 하다 여행자와 시선이 마주친 할머니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였습니다. 사진 한 컷을 부탁드렸더니 "늙은 거 뭐 할라꼬 찍는고."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보고 계속 웃어 주었습니다. 할머니의 뒤로 소담한 2칸 집이 보였습니다. "법정스님도 울고 갈 무소유의 집이네요." 동행했던 최 선생이 한마디 했습니다.

세월

골목길에서, 텃밭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심심찮게 만났습니다. 춘심
春心이 일어나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호미질로 흙내음을 일으키고 모종을 심어 봄기운을 애써 묻습니다. 제법 근사한 전원주택을 지은 할머니는 마당 앞의 텃밭을 부지런히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텃밭

마늘이며, 파며, 봄동들이 겨우내 할머니의 손을 타서 이제는 제법 자랐습니다. 저녁이 되면 맛있는 밥상에 푸른 향이 올라오겠지요.

봄맞이

송정마을 공동작업장에는 할머니들이 마를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지수는 장마(긴 마)로 유명합니다. 지금 부지런히 손질해서 내일이라도 당장 심어야 여름이 끝날 즈음에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이곳 시골다방의 단골메뉴도 마즙이었습니다. 걸쭉한 마즙 한 잔이면 봄이 불뚝불뚝 일어납니다.

봄소식

다시 골목길로 들어갔습니다. 흰둥이 한 마리가 편지를 기다리고 있네요. 빨간 우체통에 복순이가 보낸 편지가 있나 없나 킁킁거리다, 여행자의 발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납니다. 그래도 우체통을 떠나지는 않습니다. 여행자가 슬며시 자리를 피해 주었습니다.

                                    봄마중

봄의 전령

멀리 시골버스 한 대가 보리밭을 가르며 다가왔습니다. 간이 정류소에는 아무도 없는데 차가 멈추었습니다. 반대쪽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온힘을 다해 뛰어옵니다. 시골버스 운전사는 느긋하게 기다립니다. 정시에 출발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류소에 있는 손님만 태우고 간다면 그는 더 이상 버스운전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꽃화살

청담마을로 갔습니다. 화살촉에 꽃 장식을 매단 듯한 산수유 가지가 하늘로 향해 살을 쏘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바람이 불어 시야가 좋습니다. 하얀 구름을 과녁삼아 꽃화살을 쏘기에는 아직 멋진 봄날입니다. 긴 담벼락에 쇠살문을 달고 가볍게 슬레이트 지붕을 인 대문이 주변풍경과 퍽이나 잘 어울립니다.

사라지는 담배창

"저기 뭐꼬?" "보모 모르것나. 담배창 알가." 사라지고 있는 담배창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주고받습니다. 지금이야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담배건조장이 있지만 예전에는 집집마다 담배창이 있었습니다. 등짝을 시커멓게 태우는 뙤약볕 아래에서 담뱃잎을 따본 사람이라면 담배창의 추억을 알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 풍경이 되겠지요.

한 움큼의 인정

마을 안내를 했던 류 씨 할아버지가 별안간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파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쪽파가 너무나 싱싱하여 파전을 해먹으면 좋겠다는 일행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괜스레 죄송하여 파를 뽑을 필요가 없다고 해도 할아버지는 막무가내입니다. 한 아름의 쪽파를 뽑고 나서야 할아버지는 밭을 나섰습니다. 이날 저녁 후배의 사무실에서 파전을 안주삼아 먹걸리에 밤새 취했습니다.

느긋한 봄

이날 마을 탐방은 청원리에서 끝났습니다. 재령 이씨 집성촌인 청원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 두 곳이나 있습니다. 촬영을 하기 전에 마을 돌담길을 돌다, 소담한 옛집에 끌려 담장을 기웃거렸습니다. 산수유와 매화가 사이좋게 피어 있더군요. 이를 본 마을 주민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길게 늘어진 산수유 가지가 봄을 마중하고 있었습니다.

봄마실

집을 나서는데 고양이가 길을 막습니다. 아니 봄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의 명상을 여행자가 깨뜨렸습니다. 한참을 쬐려보더니 대문 밑의 구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봄은 스멀스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원색의 강한 봄빛이 흑백으로 바뀔 즈음 마을을 빠져나왔습니다.

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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